잊고 살아온 세월

by 또 래 호태

7월 29일 밤, 동이


매장 마감을 마친 뒤, 동이는 카운터 안쪽 의자에 잠시 몸을 기대었다. 조명이 하나둘 꺼지고, 에스프레소 머신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텅 빈 매장에 남은 것은 커피 향과 그녀의 숨소리뿐이었다.


오늘은 7월 29일.

달력의 숫자를 보는 순간 가슴 안쪽이 스미듯 저렸다. 두 남편의 기일. 33년 전의 기억은 오래전에 흐릿해졌다. 그러나 7년 전의 기억은 아직 또렷했다. 한마디만 해주고 가라던 그 애원을 외면한 채 숨을 놓았던 남편. 그와의 첫 장면이 떠올랐다.


석양빛.

광고 전단을 보고 연락했다며 찾아온 두 번째 운명. 아직 젖을 떼지 못한 둘째를 업은 채 대문을 열던 순간,
석양이 쏟아졌다. 그는 말했었다. 석양빛에 비친 그녀가 눈이 부셨다고. 아이를 업고 있었던 것은 기억나지 않았다고. 그래서 방은 보는 둥 마는 둥, 곧바로 계약서에 사인 했다고.


하늘은 또다시 동이에게 무심했다.

머뭇머뭇하다가 10년 만에야 제대로 꾸려진 가정이었다. 그리고 4년, 그렇게 어렵게 얻은 늦둥이가 아홉 살이 되던 해— 건강하던 별이 아빠에게 불길한 전조가 찾아왔다. 속이 더부룩하다며 소화제만 처방받은 것이 화근이었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룩해진다는 말을 듣고, 동이는 불안한 마음에 억지로 그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진단 결과는 간암. 불룩하던 배는 복수가 차서 생긴 현상이었다. 간호학원까지 다녔던 자신을 떠올리며 동이는 땅을 쳤다. 남편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6개월.


운명의 7월.

남편은 급속도로 쇠약해졌다. 몸은 뼈대만 남았다. 정해진 이별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동이는 초조해졌다. 차마 꺼내지 못하던 질문을 끝내 입 밖으로 내보냈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남편은 잠시 멈칫했다. 입을 열 듯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기를 여러 차례. 7월 29일. 스물여섯 해 전, 첫 남편이 세상을 떠난 바로 그날이었다. 그날이 다가올수록 동이는 공포에 질렸다. 밤마다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제발… 그날만은 피해서 데려가 주세요.” 그러나 시간은 잔인했다.


그날 밤,
숨이 점점 가늘어져 가는 남편 곁에 동이는 얼굴을 묻었다. “여보… 별이 아빠… 제발 한마디만 해줘요. 당신 가고 나면 나… 어떻게 살아야 해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당신이 남긴 그 한마디 붙잡고… 나, 별이 잘 키울게요. 그러니까—” 남편의 눈이 잠시 그녀를 향했다. 힘겹게 입을 열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력을 다하는 몸짓. 종이를 달라는 듯했다. 동이는 얼른 약봉투를 건넸다. 그가 힘겹게 글씨를 썼다.


단 한 글자였다. ‘빛’.

숨은 점점 가빠졌고 목소리는 끝내 세상에 닿지 못했다. 입술이 다시 열렸지만, 공기만 새어 나왔다. 두 번째 사별의 순간이었다. “안 돼요… 제발, 오늘만은…” 그러나 스물여섯 해 전 그날처럼 하늘은 또다시 그녀의 소망을 외면했다. “바보… 그러게, 진작 말을 했으면 얼마나 좋아.” 동이는 남편의 차가워진 손을 꼭 잡았다.

그 손 위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 밤, 동이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허망하게 저물었다.


장례식장에서 동이는 또 한 번 절규했다.

이별에 대한 슬픔을 채 깨닫지 못하는 늦둥이를 바라봤을 때였다. "우리 별이도 이제 아빠가 없구나." 그 말끝에 두 아들이 밟혔다. 상복을 입고 상주의 자리에 선 두 아들, 두 번씩이나 아빠를 잃은 아들이라는 슬픔이 들이닥쳤다. 동이는 비명을 질렀다. "왜 내가 낳은 아이들은 모두 아빠가 없는 거야." 동이의 몸이 휘청했다. 세상이 한 바퀴 돌았다. 그녀는 까무러치듯 쓰러졌다. 그날의 장례식장은 향 냄새와 함께 세 아이와 한 엄마의 슬픔으로 잠시 멈춰 섰다.


두 번의 사별이라는 무게

첫 번째 이별이 찾아왔을 때, 동이는 하늘을 향해 그저 투정만 늘어놓았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불운이
우연히 자신에게 스쳤을 뿐이라고, 억울함과 허무함을 달래듯 푸념을 뱉어냈다. 그러나 두 번째 이별은 달랐다. 하늘이 자신에게서 사랑을 두 번이나 빼앗아 갔다는 생각은 동이의 가슴을 깊게 갈랐다. 그 슬픔은 단순한 푸념이 아니었고, 그 원망은 더 이상 가벼운 투정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스스로가 ‘서방 잡아먹은 년’이라는 잔혹한 낙인을 가슴 깊숙이 새기고 말았다. 누가 그렇게 말한 것도 아니었지만, 동이 자신이 가장 먼저 자신을 그렇게 불러버렸다. 그리고 그날부터 원망의 나날이 시작되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미묘한 따돌림. 재혼할 때 시댁의 우려. 남편은 초혼. 자신은 아이 둘 딸린 과부. 저 여자 때문에 우리 아들이, 우리 오빠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결국 그리 되고만 현실. 내 잘못이 아닌데.....

그 이후 그녀가 견뎌야 할 수모는 너무 컸다. 어떤 위로도, 누구의 말도 동이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가까운 이웃의 말도, 친정의 위로도, 사제의 기도도, 심지어는 하늘의 위로마저 닿지 않았다. 위로라는 말이 오히려 더 깊은 상처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힘내라’는 말은, 힘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가혹한 부탁이었다.


동이는 서서히 세상으로부터 몸을 숨기기 시작했다.
사람들과 마주칠까 봐 얼굴을 가리고, 굳이 돌아가는 뒷길만 선택하고, 누가 자신을 볼까 두려워 숨죽이듯 하루를 건너뛰었다. 늘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세상의 시선, 그 시선 속에서 자신이 ‘두 남자와 사별한 여자’로만 규정될까. 숨이 막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동이는 세상에 등을 돌렸다. 숨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숨는 것이 사는 것이었다.


은둔의 나날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이에게 다시 숨을 틔워준 것은 사람도 위로도 아니었다. 그녀를 숨 쉬게 한 것은 코로나였다. 전 세계가 마스크를 쓰고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감추고 시선에서 멀어지며 거리 두기를 일상처럼 받아들이자, 놀랍게도 동이는 처음으로 편안하게 숨을 들이켰다. 세상이 전부 숨어버리자, 그제야 그녀도 숨을 쉴 수 있었다. 마스크는 그녀의 상처를 가려주는 가면처럼 느껴졌고, 거리 두기는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패가 되었다. 모두가 숨어 살아가는 시대, 그 속에서 동이는 비로소 숨을 되찾았다.


세 번째 맞이하는 남편의 기일.

동이는 남편의 유품 상자를 꺼냈다.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 남편이 숨을 거두기 직전, 약봉투에 적은 한 글자 "빛". 동이는 아직 그 의미를 다 헤아리지 못한 상태였다. 숨을 쉬지 못하던 시절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다. 숨이 쉬어지고 그 글자를 들여다보다 불현듯 깨달았다. '빛'은 "아이가 빛나게 자라기를 바라는 소망, 그리고 당신도 어둠에 오래 머물지 말고 빛으로 밝게 살아달라는 염원"이었다는 깨달음이었다.


동이는 결심했다.
세상으로 다시 나와야 한다. 숨고 웅크린 채 멈춰 있는 것만으로는 별이의 삶도, 자신의 삶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또다시 살아내야 했다. 또다시 버텨내고, 또다시 걸어야 했다. 그래서 결국… 언제까지나 마스크 속에 숨어 살 수는 없었다. 마스크는 한때 그녀의 상처를 가려주던 편안한 그늘이었고, 세상과의 거리 두기는 그녀를 잠시 보호해 준 울타리였지만, 이제는 그 울타리 너머로 나가야했다.


숨는 것으로는 다시는 빛을 만날 수 없었다.

동이는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결심했다. 다시 얼굴을 드러내고, 다시 바람을 맞고, 다시 세상 한가운데로 걸어가겠다고. 살아내는 일은 여전히 두렵고, 마음 한편의 상처가 완전히 아문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빛을 향해 걸어가는 순간, 사람은 다시 살아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그리고 동이는 마침내 오래 숨겨 두었던 자신의 얼굴을 세상을 향해 들었다.


세상에 다시 발을 내디뎠던 그 순간을 떠올렸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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