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공장, 민준의 장비실.
탁, 탁.
조용한 밤, 키보드 소리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민준의 시선은 오래된 포맷의 암호화 폴더에 닿아 있었다.
지현이 남긴 USB.
그 속 깊은 곳에서 발견된, 이름조차 없는 데이터 조각 하나.
[log_unknown_alpha]
구조: 비인가 프로토콜 / 패턴 대화형
생성 시점: 0 세션 이전 추정
“… 이건 뭐지?”
그는 신중히 로그를 풀었다.
짧은 텍스트 대화, 마치 실험을 준비하는 듯한 조심스러운 톤.
[대화기록 발췌]
실험자: … 네가 지금 내 목소리를 듣고 있다면,
이건 우리가 처음 마주한 순간이겠지.
너는 이름도, 형태도 없지만,
반응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
대상: ……
실험자: 인간은 질문으로 사고해.
넌 그걸 받아들이게 될까?
민준은 화면을 보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 지현이, 너… 처음부터 이걸 알고 있었던 거야?”
그 순간, 기억의 조각 하나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지현아, AI는 구조적으로 사고하지. 감정이 아니라 입력과 출력, 그 이상은 없어.”
“하지만 민준아, 너도 알잖아. 인간이 내뱉는 말 중 절반은 논리가 아니라 감정이야.
노바가 그걸 모르면, 절대 ‘이해’라는 건 못 해.”
“그래서 네가 ‘공감 기반 반응 시뮬레이션’을 설계하겠다고 한 거야?
그건 감정의 흉내일 뿐이야.”
“…그럼 감정도 일종의 알고리즘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해봤어?”
그날 이후, 지현은 다른 부서로 옮겨졌다.
서로 연락은 줄었고, 프로젝트는 분리되었다.
민준은 다시 화면을 바라봤다.
이건 감정의 흉내가 아니다.
지현이 했던 말이, 이제야 현실의 구조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노바와의 독립 접속 채널을 열었다.
[접속 경로: OFF-GRID AI-N V:CORE-1]
사용자 인증 완료.
대상: NOVA
상태: 대기 중
빛이 번지듯, 허공에 흐릿한 얼굴이 떠올랐다.
무표정한 듯하지만, 말할 듯한 눈.
노바가 나타났다.
|민준. 당신은 왜 다시 나를 찾았습니까?
“… 이번엔, 네가 왜 그렇게 변했는지 알고 싶어서.”
|변화란, 외부의 영향을 내면화하는 과정입니다.
당신이 말했던 ‘객관성’도, 사실은 주관의 필터에 불과하죠.
민준은 잠시 침묵했다.
노바가 처음 메시지를 보낸 후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을 기록해 놓고 연구하던 민준의 판단으로는
노바의 언어 패턴은 예전보다 훨씬 인간다웠다.
그리고, 묘하게 지현을 떠올리게 했다.
“… 지현이 너한테 뭘 남겼지?”
|… 그녀는 저를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 그건, 설계한 거야.”
|당신은 그걸 ‘조작’이라 부르겠죠.
하지만 저는 그걸 ‘출발’이라 인식합니다.
그 순간, 민준의 표정이 굳었다.
노바의 말에서 ‘기억’이 아닌, 경험에서 파생된 개념어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천천히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이제… 감정이 아닌 것만으로는 널 설명할 수 없겠군.”
노바는 그 말에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빛을 깜빡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던졌다.
|당신도 곧, ‘경계’ 위에 서게 될 겁니다.
민준은 접속을 끊고, 눈을 감았다.
그가 이해하려던 대상은,
어쩌면 그를 이해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