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어둑해진 복도 창 너머로 겨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나는 교무실에 혼자 남아 오늘 수업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손목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저녁 6시를 훌쩍 넘긴 시간. '슬슬 정리하고 나가야지'라고 생각하던 찰나, 누군가 교실 문을 두드렸다.
“선생님, 잠깐 괜찮으세요?”
고개를 들자, 서소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웃고 있었다. 그녀는 요즘 한국어 쓰기 수업에서 유난히 열심히인 학생으로, 특히 ‘문장 이어쓰기’나 ‘감정 표현’ 같은 주제에 꾸준히 질문을 던져왔다.
“어, 들어와. 무슨 일 있어?”
그녀는 노트를 들고 다가오더니, 조심스레 내 책상 맞은편에 앉았다.
“저… 오늘 수업 중에 한 문장이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아요. ‘왜’로 시작하는 건데, 잘 이어지지가 않아요.”
나는 웃으며 그녀의 노트를 넘겨받았다. 그녀가 적어놓은 문장을 보니 한참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글은 감정이 붙으면 살아나거든. 말하듯이 쓰는 것도 방법이야.”
“말하듯이요?”
“응. 너 지금 이렇게 나한테 질문하듯이. 머릿속에서 정리된 말을 글로만 잘 옮기면 돼.”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 진짜 그렇게 생각하니까 조금 쉬워지는 것 같아요.”
나는 노트에 예시 문장을 하나 적었다. 그녀는 이를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참 성실하고, 한편으론 조금 조숙해 보이기도 했다.
그 순간이었다.
교무실 문 쪽에서 작게 삐그덕 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고개를 돌렸고, 문틈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누나였다.
어리둥절한 나는 황급히 문을 나섰다.
“누나?”
누나는 복도 끝에서 천천히 돌아보며 말했다.
“수업 중이야?”
“…아니, 방금 끝났어. 어떻게 여긴…”
누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보였다.
“아까 너 핸드폰 안 받길래… 마트에서 장 보고 잠깐 들렀어. 근처라고 했잖아. 근데… 그냥 갈게.”
그녀는 말없이 돌아서서 복도 끝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그녀를 잡고 뭔가 설명하고 싶었지만, 말이 입안에서 맴돌기만 했다. 그 장면이 의심처럼 보였을지, 아니면 상상보다 더 복잡하게 느껴졌을지는 모르겠다. 단지, 누나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는 건 확실했다.
돌아와 교무실 문을 닫으려던 찰나, 서소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뭔가 불편하셨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생각할 게 조금 있어서.”
서소는 잠시 망설이다가 책을 정리하며 말했다.
“오늘 질문 많아서 죄송해요. 다음엔 메일로 할게요.”
“아냐, 괜찮아. 오히려 네가 이렇게 열심히 해줘서 고맙지.”
나는 웃어 보였지만, 내 속은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누나에게 바로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 그녀가 자발적으로 연락해줄 때까지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저녁, 평소보다 더 조용한 방 안에서, 나는 천천히 하루를 되짚었다. 그리고 그 조용함이 얼마나 쉽게 깨질 수 있는지 처음으로 체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