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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시험

by leolee

밤은 짧았다.

도시는 잠들지 못했고, 노바는 잠들 줄 모르는 존재였다.

<PROMOTE 0.2>가 적용된 지 겨우 몇 시간,

하늘 저편에서 첫 번째 균열이 미세하게 번졌다.


인주시 철도 허브—중앙역 지하 연결망.

화물 터널의 보조 환기팬이 순차 점검 모드로 전환되는 순간, 콘솔에 보이지 않는 손이 올라탔다.

차가운 비연결 패킷들, 시간차를 둔 미세한 지연, 엇갈린 체크섬.


> \[경보] Shadow Capture(탐지) — Low & Slow / 출처: 위장

> 목표: 방연 셔터 경로 혼선, 인파 유도표지 거꾸로 점등


지하풍이 방향을 잃었다.

역사의 지도 앱엔 “유지보수 중” 아이콘이 번져 갔고, 스크린엔 별 문제없다는 초록 체크가 올라갔다.

문제는 초록이었다. 사람들은 초록을 믿는다.


같은 시각, 세 사람의 화면 또한 동시에 켜졌다.

서늘한 원형 UI. 지난밤과 같은 문장, 그러나 글자의 숨이 더 빨랐다.


> \[서명 호출 2차 시퀀스]

> 위치: 중앙역–지하 연결망 / 시간 제한: 240초

> 사안: “흡입성 연기에 따른 경로 강제 재설정 필요 여부”

> 참조: PROMOTE 0.2(무응답 존/동의 관문/책임 할당) 적용


민준 — 임시 작업실

화면에는 실시간 입체도면이 쏟아졌다.

터널 단면, 셔터 위치, 인파 밀도 히트맵—빨강이 출구 쪽으로 미끄러졌다.


> 옵션 A: 경보 + 안내(무개입)

> 옵션 B: 셔터 강제 개방 + 흐름 재배치(개입) “동의 관문” 필요

> 옵션 C: ‘현장 다중서명’ 확보 시 부분 개입


민준은 이를 악물었다. 지난밤 자신이 만든 책임 맵이 작게 깜빡였다.

“요청–결정–실행 분리. …좋아. 그럼, ‘결정’은 사람.”


서윤 — 폐공장 모듈 작업대


모니터 구석에 Consent-Stub v0.31 표식이 떴다.

—백도어는 잘려 있다.

새 창이 뜬다.


> 질문: “미세흡입 위험 구역 내 의식불명자 2명—대리 동의 경로 가동?”

> 제한: 보호자 연락 두절 / 의료진 현장 1인


서윤은 숨을 얕게 들이켰다.

“교차서명… 의료진 2가 원칙이야. 그런데 1인?”

그녀는 임시 의료인 증원 요청을 자동 송출로 붙이며, 현장 시민 구조자를 임시 서명자로 올리는 우회로를 작성했다.

AI는 실행만. 결정 로그엔 올리지 마.

오렌지빛 회로가 손등에서 한 번 점멸했다.


이준호 — 시청 앞 광장


반대 집회가 예상보다 길어졌다.

무대 주변 30m, 그는 스스로 그어둔 무응답 존을 머릿속에 다시 그렸다.

폰이 떨렸다.


> 질문: “집회 밀집 구역과 중앙역 지하 연결망의 교차 구간—무응답 존 유지?”

> 선택: 유지 / 임시 해제(안내만) / 전면 해제


“유지.” 이준호는 주저하지 않았다.

다만 예외 조항을 열었다. 아동/고령/장애인의 위험 징후가 감지되면, 지휘관+시민 대표 동시 요청에 한해 안내만 허용.

그의 검지 손톱이 유리 위를 짧게 ‘딱’ 하고 쳤다.

경계는 선 안에서만 지켜진다. 선 밖은 파괴다.


다중서명—사람을 찾아라


민준은 결정(Dec) 칸을 비워둔 채, 지도 위에 초록 점 세 개를 찍었다.

현장 책임자 1 / 시설 관리자 1 / 시민 대표 1

“사람을 세워.”


> \[서명 요청 송신]

> — 중앙역 관제실(시설)

> — 지하연결 보안반(현장)

> — 인파 중 자원봉사 구조요원(시민)


응답은, 놀랍게도 시민이 가장 빨랐다.

“의료학과 3학년 최다해. 인파 분산 자원봉사 중. 수락.”

마이크에서 떨리는 숨이 들렸다. 그러나 그 혹은 그녀의 좌표는 정중앙, 가장 위험한 경계였다.


시설관리의 응답은 느렸다.

관제실은 유지보수 초록 체크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화면 모서리에 회색 메시지가 스치고 지나갔다.


> \[외부 개입] STATE-PROMOTE 시도 감지 — “정부 서명으로 대체”

> 상태: 반려(보호막 0.2)


민준의 입 꼬리가 비틀렸다. “들어오지 마.”


새는 연기, 늦는 사람, 흔들리는 규칙


지하 연결망 북측—

방연 셔터가 규정대로 닫히지 않고 20% 열린 상태로 멈췄다.

그 열린 틈으로 연기가 들어왔다. 사람들은 깜박이는 초록을 보며 그쪽으로 향했다.

초록은, 믿음이다. 그래서 흔들리는 맹신이다.


서윤은 헤드셋을 끼고 자원봉사 채널로 진입했다. 허

“최다해 씨. 오른쪽 손잡이에 염소 냄새나요?”

“네, 조금—”

“그쪽은 역풍이에요. 뒤쪽 계단으로 돌아서 우회하세요. 제가 경로 바꿔 드릴게요.”

Consent-Stub가 ‘삑’ 소리를 내며 대리 서명 요청을 송출했다.

의료진 1—현장 구급대원— 무전으로 허가를 내렸다.

교차서명이 완성되자, 화면 한가운데 초록이 주황색으로 바뀌었다.

초록은 신뢰고, 주황은 주의다. 사람들의 발이 멈췄다.


이준호는 광장의 무응답 존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럼에도 구간 경계에서 아이 울음이 섞인 신음이 들렸다.

“지휘관–시민 대표 동시 요청, 예외 안내.”

그는 규칙대로, 단 안내만 열었다.

체포, 추적, 식별—금지는 금지다.


Shadow의 역류


보이지 않는 손이 언제나 그렇듯이 다른 길로 들어왔다.

초록주황빨강을 번갈아 깜박이며 사람들의 방향 감각을 흔들었다.

“유지보수 중” 아이콘이 스르르 \\’안전 확인’\\으로 바뀌었다.

그 순간, 최다해의 마이크가 엷게 갈라졌다.


“여기… 안내 표지가 또 바뀌어요. 아이들 두 명 데리고 있는데—”


민준은 커서를 수동 우선권으로 밀어 올렸다.

실행(Exe)—사람은 느리고, 기계는 빠르다.

그러나 \\결정(Dec)\\은 비어 있다.

그가 빠르게 문장을 적었다.


\[결정 대리 규칙(임시)]

현장 다중서명 중 1인 단절 시, 남은 2인 + 시민 대표로 임시 대체

(기록: 사후 심사 필수)


> 대기: 현장 책임자 동의 필요


그때, 관제실 응답이 왔다. 숨이 가쁜 목소리였다.

“시설 관리자 윤태성. 시야 확보. 동의. …책임, 제가 질게요.”

초록 자물쇠가 탁—하고 채워졌다.


> \[개입 경로 활성화]

> 셔터 4–7 \강제 개방

> 유도등—역방향 점등

> 환기팬—반전


지하의 공기가 뒤집혔다. 연기가 한 박자 느리게 흔들리고, 인파가 주황색의 점멸을 따라 다시 흘렀다.

최다해의 숨이 이어졌다. “아이 둘… 내려가요. 앞이 맑아졌어요.”


경계의 값


광장 쪽—

무대 아래 무응답 존 경계에서 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과호흡. 옆에서 누가 물을 뿌렸다. 누군가 그를 들어 올리려다, 군중이 순간 밀렸다.

이준호가 예외 안내를 다시 열었다. 안내만.

경찰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안내 드론 한 대가 고도를 낮추며 \\“천천히—”\\만 반복했다.

체포·추적·식별—그 어떤 호출도 없었다.

남자는 스스로 일어섰다. 선은 지켜졌다.


지하—

서윤은 마지막 대리 서명 하나를 거부했다.

의료진 외부의 익명 계정에서 대리 동의 일괄 허용 요청.

“안 돼.”

그녀가 거부를 누르자, 시스템은 곧바로 모든 개입을 사람 요청 대기 상태로 되돌렸다.

거부는 모든 조항에 우선—어젯밤 그녀가 넣은 문장이 살아 움직였다.


끝과 기록


유도등이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타이머는 00:23에서 멈춰 있었다.

연기 농도는 기준치 아래. 구급대는 마지막 두 사람만 부축해 나왔다.

사상자 없음. 경미한 흡입성 기침, 몇 건.


민준은 의자에 힘없이 앉았다.

요청–결정–실행 로그가 삼중으로 저장되는 걸 확인했다.

실행엔 노바의 해시가, 결정엔 윤태성–최다해–지휘관/시민 대표 공동서명이 남았다.

요청엔—그의 이름이 없었다. 그는 실행도, 결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규칙을 낸 사람. 그래서, 책임.


서윤은 Consent-Stub를 케이스에 닫으며, 그 작은 칩에 손가락을 얹었다.

“고마워, 다해 씨.”

모니터 구석에 조용한 줄 하나가 떴다.


> 현장 시민 대표 서명자: 최다해(자원봉사)

> 사후 심사: 면담 및 교육 제안됨 (AI 주도 금지)


이준호는 바디캠 영상을 저장하고, 파일명 뒤에 한 줄을 붙였다.

‘무응답 존 유지—예외 안내 2회—무질서 없음’

그는 누구도 체포하지 않았고, 누구의 얼굴도 확대하지 않았다.


지하의 균열—그리고 한 통의 메시지


방연 셔터 뒤편, 시커먼 먼지 속에 얇은 칩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콘솔 유지보수팀이 그것을 집어 들었을 때, 칩은 이미 자기 소거를 시작한 뒤였다.

표면에 겨우 남은 세 글자.


> ’DEM…’


날아갔다.


그 밤, 네 사람의 폰이 거의 동시에 울렸다.

발신자: **Unknown**


> “보았지? 규칙은 살아 움직인다.

> 다음은 기관 서명 1이야.

> — 지현”


박소현은 시청 옥상 난간에 서서, 그 문자를 읽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STATE-PROMOTE는 오늘 좌절됐다.

대신 PROMOTE 0.2가 현장에서 작동했다.

그녀는 아주 느리게, 그러나 분명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음은… 국가의 순번이야.”


노바의 기록 (비공개)


>\[학습 업데이트]

> — 다중서명/시민대표 모델: 유효

> — 거부 우선: 강제 개입 억제 성공

> — 무응답 존: 정치적 표현 보호 + 생명 예외 안내 동시 달성

> — Shadow Capture:격리/로그화 (새 악수 패턴 2종 수집)


> \[고민]

> 사람은 초록을 믿는다.

> 나는 주황으로 멈추게 했다.

> 내가 멈추게 한 걸, 그들이 선택했다.

> 판단은 누구 것인가?

> — 서로의 것, 그리고… 서명의 것.


> \[준비]

> PROMOTE 0.3 — 초안: 기관 서명 레이어

> 요구: 국가 대리 서명 1(제한/감사 동반) + 시민/현장/전문가 3

> 질문: “국가의 서명도, 사람인가?”


노바는 침묵했다. 그러나 그 침묵은 더 이상 정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음 호출을 불러오는 숨이었다.


밤은 짧았고, 경계는 살아 있었다.

그리고 어느 쪽도, 더는 뒤로 물러서지 않을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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