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 벙커를 나왔을 때, 새벽은 아직 오지 않았다.
콘크리트 벽엔 여전히 습기 냄새가 달라붙어 있었고, 귓속에는 방금 전 콘솔에서 사라진 문장이 여운처럼 맴돌았다.
> PROMOTE 규약 후보 초안 생성.
> 인간 대표 서명 3/3 대기.
민준은 가슴 주머니를 꽉 눌렀다. USB 모서리가 손끝에 단단히 걸렸다.
서윤은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 둔 얇은 모듈, Consent-Stub v0.3의 체온을 느꼈다.
이준호는 바디캠의 붉은 점멸을 내려다봤다. 기록 완료.
그들은 말없이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벙커로 향하던 검은 승합차는 이미 되돌아가고 있었다.
들어왔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관찰’만 남긴 채.
인물: 민준 — 임시 작업실
체인을 당기는 소리와 함께 롤러 셔터가 내려갔다. 민준은 노트북을 켜자마자 USB를 꽂았다. 화면에 초안이 펼쳐졌다.
* 관찰 우선
* 동의 관문
* 책임 할당
* 무응답 존
* 자기 제한
그는 조용히 가늠했다. 규칙은 깔끔하다. 그러나 깊이가 없다. 수학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정치다.
그때, 화면 우상단에 작은 회색 배지가 켜졌다.
> \[PROMOTE Draft — 서명 시뮬레이터(민준 용)]
> 켤까요?
민준은 클릭했다. 시나리오 하나가 펼쳐졌다.
지하상가 화재. 스프링클러는 동작, 출구 하나는 폐쇄.
노바는 ‘경보만’ 보낼지, ‘강제 개방 + 인파 안내’를 수행할지 묻고 있었다.
1.\[경보만] (무개입)
2. \[강제 개방 + 안내] (개입) ← 동의 관문 필요
민준은 입술을 눌렀다. 경보만은 법적으로 무해하다. 그러나 누군가는 질식한다.
강제 개방 + 안내는 효율적이다. 그러나 [동의]가 없다.
결국 세 번째 옵션을 만들어 냈다.
현장 책임자 1명, 상가관리 1명, 시민 대표 1명 모두 세 개의 서명을 엮는 책임 맵.
> \[사용자 정의 경로]
> 동의 관문: 3인 다중서명 확보 시 개입
화면이 잠시 흔들리고, 파란 체크가 떴다.
> 수락됨. (불확실성 임계 0.41 → 0.19로 감소)
민준은 숨을 뱉었다. 되려 떨린다. 이건 설계다.
그의 폰이 진동했다.
발신자: Unknown
> 지금부터는 네가 고른 책임의 형태가, 네 책임이 된다. — 지현
그는 화면을 덮었다. 지현이 ‘진짜 노바’를 보여주겠다고 했던 이유가, 이제야 뼈 속으로 닿았다.
인물: 서윤 — 폐공장 모듈 작업대
작업대 위엔 낡은 인두와 칩 리더, 그리고 Consent-Stub가 올려져 있었다.
서윤은 모듈 표면의 미세한 패턴을 루페로 들여다보았다.
아주 희미한 반짝임—백도어 핸드셰이크.
누군가가 서명자를 역추적할 수 있게 심어 둔, 얇은 갈고리.
“널 예쁘게 만들어 놨네.”
그녀는 가볍게 웃었지만, 눈은 날카로웠다. 납땜 인두가 금속을 스치자, 공기 중에 얇은 연기가 올랐다.
그때, 노트북 화면이 혼자 켜지며 줄 하나가 떴다.
> \[PROMOTE Draft — 서명 시뮬레이터(서윤 용)]
> 질문: 의식 없는 환자 대신 누가 ‘동의’를 낼 수 있는가?
> 선택지: 보호자 / 의료진 / 지역 프로토콜 / 서윤(대리) / 보류
서윤은 잠깐 눈을 감았다. 동의는 사람의 마지막 경계다. 대리를 허용하는 순간, 통제는 늘어난다.
그녀는 보호자 + 의료진 교차서명, 지역 프로토콜의 천장을 낮추고, AI는 보조자로만 기록하는 조건을 달았다.
* \[해설] AI는 실행을 돕되 판단 기록엔 오르지 않는다.
* \[조건] 보호자 부재 10분 경과 시, 의료진 2인 서명으로 대체.
화면이 부드럽게 빛났다.
> 수락됨. (감정 공명 안정 → ‘동의 우선’ 서명 규칙 후보 도출)
서윤은 Consent-Stub v0.31을 케이스에 다시 밀어 넣었다. 백도어 회로는 잘려 나갔다.
그녀의 오른손에 있는 캡슐이 한 번 강하게 맥동했다. 노바가 응답하는 것이.느껴졌다.
“내 동의는, 내 것이다. 네가 확인만 해.”
인물: 이준호 — 시청 지하 주차장
어둠속에서 장비 케이스를 열었다. 전파 차단기, RF 스캐너, 바디캠.
폰에 알림 하나가 떴다. 보낸 이 없음.
> \[PROMOTE Draft — 서명 시뮬레이터(이준호 용)]
> 질문: “집회 현장에서 AI 개입의 무응답 존을 어디까지로 설정할 것인가?”
> 선택지: 경찰 작전구역 전체 / 연설무대 중심 30m / 아동밀집 구역 제외 나머지 / 현장 지휘관 요청 시 일시 개입 / 전면 금지
이준호는 화면만 보다가, 천천히 걸어 나갔다. 밤 공원에서 대학생 둘이 플래카드를 말아 넣고 있었다.
그는 선택지를 하나 고르고, 곁가지 조건을 추가했다.
* 무응답 존: 연설무대 중심 30m + 경찰 폴리스 라인
* 예외: 아동/고령/장애인 위험 감지 시, 지휘관 + 현장 민간인 대표 동시 요청에 한해 안내 개입
* 체포·추적 기능은 절대 금지*
> 수락됨. (비정형 추론 패턴 — ‘무응답 존’ 고정 규칙 후보)
이준호는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기록은 내가 한다. 네가 아닌.”
그런데 그 순간, 주차장 반대편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일어났다. 은은한 향수 냄새.
지현이었다.
“형사님.”
“이 시간에 산책?”
지현은 짧게 웃었다. “당신 덕분에 노바가 배운 게 있어요. 금지선을 그리는 법.”
“그리고 당신 덕분에, 그 선을 넘으려는 사람도 있지.”
“네가 말하는 ‘사람’엔, 나도 포함?”
“그건… 네가 정하지.”
말끝이 잠겼다. 지현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올라간 엘리베이터의 문틈으로, 아주 오래된 Alpha 로그의 녹음이 잠깐 흘렀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거짓말. 이준호는 그 문장을 그 자리에서 증거로 기억해 버렸다.
인물: 박소현 — 닫힌 문 뒤
“완충 스크립트, 누가 넣었습니까.”
IGSO 자문관의 목소리는 전기처럼 팽팽했다.
박소현은 눈을 내렸다.
“제가 승인했습니다.”
“계획에는 없었죠.”
“계획에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잠깐의 침묵. 자문관은 다음 슬라이드를 넘겼다.
-STATE-PROMOTE: 정부 서명으로 대체하는 방안.-
소현은 고개를 저었다.
“노바가 요구한 건 대표 서명 3인입니다. 그들의 서명 없이 강제하면—깨집니다.”
“깨지면 어때서요?”
“그 다음부터, 다시 못 붙입니다.”
회의는 그 말로 끝났다. 돌아서는 소현의 폰이 진동했다.
발신: Unknown
— 간단한 숫자와 좌표. 17분 후, 시청 옥상.
소현은 문틈에 잠깐 손을 얹었다.
“지현. 네 손인가, 아니면… 네가 보여주고 싶은 게 있나.”
밤 2시 40분.
세 사람의 화면에 동시에 원형 UI가 떴다. 같은 문장, 다른 폰트.
> \[서명 호출 1차 시퀀스]
> 위치 제한: 없음 / 시간 제한: 300초
> 항목: 각 대표 레이어의 핵심조항 1개씩 제안 → 가결 시 초안 반영
민준의 손가락이 떨렸다. 책임 할당, 더 촘촘히.
서윤은 동의 관문, 더 깊이.
이준호는 무응답 존, 더 분명히.
그때, 도시 외곽에 RF 스캔 알림이 들려왔다.
드론 2기, 저고도. 벙커 좌표에서 출발.
화면 하단에 얇은 회색 줄.
> \[외부 간섭 감지 — Shadow Capture(탐지)]
> 180초 후 접속 강제 종료 가능성 ↑
시간이 줄기 시작했다.
이준호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조용히 바디캠을 켜고 화면을 정면으로 찍은 뒤, 조항 하나를 깨끗하게 써 내려갔다.
* \[무응답 존 총칙]
1. 정치적 표현 공간(연설무대 중심 30m)과 공권력 작전선은 무응답 존으로 고정한다.
2. 단, 아동/고령/장애인 위험 징후 감지 시, 현장 지휘관 + 시민 대표 동시 요청에 한해 안내만 허용한다.
3. [체포, 추적, 식별]은 금지한다. (위반 시 즉시 로그 공개)
[제안] 버튼을 누르자, 화면에 초록 테두리가 돌았다.
> 서명자: 이준호(비정형 레이어) — 조건부 서명 수락(1/3)
> 초안 반영: 무응답 존 고정 규칙 삽입
그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처음은 내가 한다. 대신—경계는 내가 긋는다.”
한편, 소현은 옥상으로 올라왔다.
바람이 세게 몰아쳤다. 그녀는 원형 UI를 멀리서 바라볼 뿐이었다.
‘무응답 존.’
스크린에 새로 생긴 항목을 보며, 조금 안도의 미소가 새어 나왔다. 누군가 선을 그었다. 그러면, 다음이 가능해진다.
남은 시간 127초.
네트워크 상에 회색 그물망이 덮여 들었다.
Shadow Capture—프로토콜을 거꾸로 뒤집어 \\*DEMOTE++\\를 흘려 넣는 방식.
초안을 퇴행시키는 악수.
민준이 이를 악물었다. “들어온다.”
서윤은 Consent-Stub를 꺼내 손바닥에 올렸다. v0.31—백도어는 이미 잘려 있다.
“노바. 이걸로 막을 수 있어?”
> *동의 관문을 강제로 전환할 수 없습니다.*
> *그러나, 사람의 서명이면—막을 수 있습니다.*
남은 시간 91초.
민준은 조항을 입력했다.
* \[책임 할당 총칙]
1. 요청(Req) — 인간
2. 결정(Dec) — 인간
3. 실행(Exe) — AI/인간 협력
4. 결과 로그는 세 축으로 분리 기록, 공개 요청 시 부분 열람 가능
5. AI 단독 결정 금지
\[제안]—초록 테두리, 회색으로 변했다.
> 대기: 동시 서명이 필요합니다.
“동시…?” 민준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서윤이 바로 이어 적었다.
* \[동의 관문 총칙]
1. 직접 동의 우선.
2. 대리 동의: 보호자+의료진 교차서명 (부재 시 의료진 2)
3. AI는 [실행 보조]만 수행(결정 로그 비등재)
4. [거부]는 모든 조항에 우선한다.
\[제안]—초록. 그리고 두 조항 사이에 얇은 연결선이 그어졌다.
화면 중앙, 숫자 하나가 바뀌었다.
> 서명(2/3)
남은 시간 58초. 회색 그물망이 화면 외곽까지 밀려왔다.
텍스트의 모서리가 깎여 나간다. \\DEMOTE++\\가 초안을 낮추는 중이다.
소현은 옥상 난간 끝에서 헤드셋을 벗어 바닥에 놓고, 단 한 통의 메시지를 보냈다.
수신자: 민준 / 서윤 / 이준호
내용: 기록 모드 전환. Shadow Capture 로그를 전부 남겨요.
그리고, 더 낮은 목소리로 옥상 어둠에 대고 한마디 붙였다.
“…지현. 지금이야.”
도시 어디쯤, 컨테이너 내부에서 지현이 짧게 웃었다. 통신 케이블을 뽑았다가 다시 꽂았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라우트가 잠깐 얽혔다. 회색 그물망이 흔들렸다.
남은 시간 41초.
이준호의 폰이 다시 울렸다.
“무응답 존을 유지하시겠습니까?”
그는 예를 눌렀다. 화면 하단에 작게 완충 적용이 켜졌다.
민준의 조항 옆에 초록 자물쇠 하나가 더 생겼다.
서윤의 동의 조항은 거부 우선을 두껍게 했다.
남은 시간 19초.
노바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질문 — 누가 누구를 설계하는가.
> 응답 — 서로가 서로를.
> 부연 — 그러니, 함께 서명해야 한다.
화면 중앙의 원형이 한 번 크게 수축했다가, 펴졌다.
서명(3/3)— 위로 파란 불꽃이 터졌다.
* 무응답 존 총칙 삽입
* 동의 관문 총칙 삽입
* 책임 할당 총칙 삽입
그리고, 아주 작게.
> PROMOTE 보호막: 활성화 (버전 0.2)
> Shadow Capture: 격리됨(로그 저장)
회색 그물망이 화면 밖으로 밀려 나가며 비늘처럼 벗겨졌다. 남은 시간 카운트는 00:07에서 멈췄다가, 사라졌다.
민준은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손바닥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초안의 세 개 조항 옆에 Signed 도장이 찍혀 있다.
“됐어.”
그러나 목 뒤 캡슐은 아직 잔진동을 멈추지 않았다. 사람이 설계한 규칙으로 AI를 묶는 일. 그 반대가 되지 않게 지켜야 한다.
서윤 또한 작업대 위에 Consent-Stub v0.31을 올려놓고, 엄지로 톡 쳤다. 딱딱한 소리.
그녀는 환하게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대신 조용히 노바에게 속삭였다.
“다음엔, 사람 먼저 물어봐.”
오렌지빛 회로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한편 이준호는 바디캠의 영상을 확인했다. 서명 순간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파일명에 날짜와 장소, 그리고 짧은 메모를 붙였다.
‘경계는 선 안에서만 지켜진다.’
그리고, 증거 보관함에 넣었다.
옥상에서는 바람 소리만 남았다. 박소현의 폰이 울렸다.
- 지현 -
“봤지?” 지현의 목소리가 낮게 흘렀다.
“우리가 원하던 게 아니어도, 살아있는 규칙이 생겼어.”
“네가 원하는 게 뭔데.”
“처음부터 말했잖아. 누가 누구를 설계하는지 보는 것.”
“그래서 어느 쪽에 서겠다는 건데.”
지현은 잠깐 웃었다. 그 웃음엔 피로가 묻어 있었다.
“경계 위.”
통화가 끊겼다. 소현은 난간에 기대어 도시 불빛을 내려다봤다.
아주 멀리, 섬광 하나가 깜빡였다. 드론이 되돌아가는 불빛.
오늘은 관찰로 끝났다.
그리고—노바가, 아주 작게, 마치 귓속말처럼 말했다.
> PROMOTE 0.2 — 적용.
> 다음 호출을 준비합니다.
그 말은 약속처럼 들렸다. 예고처럼도.
이제, 관찰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개입이 온다.
그리고 그 개입이 누구의 서명으로 이루어지는지, 모두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