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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정전

by leo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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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일 오후 6시 20분, 2호선 시청–을지로입구 사이 전구간 정전.

열차 5편성 동시 정차, 객실 비상등 간헐 점등.

안내방송 지연, 통신 불안정.

노약자 6명, 탈수 의심 3건, 경미한 타박상 2건.

외부 구호반 대기, 승무원 수동 개문 준비.

평균 지연 47분 예상.



1 김하린(17, 고3 / 모의고사·카톡·부끄러움)

오늘도 단어장만 들여다보면 마음이 좀 나아질 줄 알았다. 그런데 열차가 툭 멈췄다. 객실 안의 사람들이 서로의 숨을 듣게 되었다. 누군가 “휴대폰 플래시 켜세요”라고 말했는데, 나는 배터리가 9%라 망설였다. 모의고사 날짜가 내일모레라서, 단어장보다 배터리가 더 소중해졌다. 누가 웃었다. 긴장하면 나오는 이상한 웃음. 카톡 단체방에 “2호선 멈춤;;”을 올리려다 지웠다. 모두가 나를 실시간으로 볼 것 같아서. 문 앞에 서 있던 남자분이 “괜찮아요?” 하고 물었다.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다리가 떨렸다. 요즘 학교에서 ‘안전교육’ 영상을 많이 보는데, 영상 속 나는 늘 침착했다. 실제의 나는 손이 차갑다. 창밖은 터널이라 아무것도 없는데, 갑자기 내가 투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스스로를 설명할 말이 없을 때 사람은 작아진다. 그때 어떤 아주머니가 내 손을 잡고 “학생, 물 조금씩 마셔”라고 했다. 목이 부드러워졌다. 그 말이 엄마 같은 온도였다. 비상등이 한 번 들어오고 꺼졌다. 모두의 표정이 동시에 켜졌다 꺼졌다. 나는 내일 단어 30개 못 외워도 좋다고, 지금은 그냥 여기서 버티자고 마음속으로 말했다.


오늘의 내 해석: 진짜 시험은 가끔 교실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나온다.




2 박도윤(28, 배달라이더 / 평점·지도점·시간=돈)

앱 상단에 ‘지연 사유: 정전’이 떴다. 지도 속 내 점은 멈춰 있는데 시간만 흐른다. 시간은 돈이고, 돈은 집세다. 헬멧 안에서 땀이 턱을 타고 떨어진다. 고객 채팅창엔 “얼마 남았나요?” 같은 말풍선이 잇달아 뜨다가, 잠시 뒤 “취소합니다”로 끝난다. 취소 수수료가 위로가 되지 않는 밤이 있다. 옆 칸에서 누군가 아이에게 물을 건넨다. 나도 가방을 열어보니 보냉팩에 얼음이 남아 있었다. 배달은 못 가도 얼음은 나눌 수 있다. “이거, 아이 목에 대세요.” 손이 얼음보다 더 차갑다. 이런 때 친절은 영업이 아니다. 그냥 같은 칸에 갇힌 동료라는 느낌. 평점이 좋으면 나도 덜 두렵다. 그런데 오늘은 평점을 매길 고객도, 도착 버튼도 없다. 내가 도착할 곳은 잠시 비상등이 깜박이는 이 객실이다. 안내방송이 반복될 때마다 내 수입표도 반복해서 줄어든다. 하지만 아이가 울음을 멈추고 엄마의 어깨에서 잠들자, 내 속도계도 잠깐 멈췄다. 속도 없이도 유효한 순간이 있네, 하고. 문이 열리면 나는 다시 시계가 된다.


오늘의 내 해석: 멈춤은 때로, 일의 목적을 다시 알려주는 브레이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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