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전의 공기는 평일과는 확실히 달랐다. 알람은 똑같이 울렸고, 세수하는 물의 온도도 평소와 비슷했는데, 몸 안에 흐르는 리듬이 달랐다. 수업 준비를 하는 손길이 어른 반이나 유학 준비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장이링과 리우위쉬엔, 겨우 두 명의 이름을 떠올리며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나도 모르게 어깨를 조금 가볍게 만들었다가 또 조금 무겁게 만들었다.
책상 위에는 전날 밤까지 끄적여 놓은 낙서 같은 교안이 펼쳐져 있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계획표라기보다는, 내 머릿속을 따라가다 그때그때 끼어든 아이들의 얼굴과 표정을 쫓아가며 적어 놓은 메모들에 가까웠다.
‘오늘 목표:
“안녕하세요” 복습 – 속도 놀이.
“나는 ~ 좋아해요” — 그림 카드 사용.
게임: 좋아하는 것 바꿔 말하기.
마지막에 한국어로 자기소개 한 번 더.’
어제 적어 두고는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번이고 줄을 긋고 다시 쓰다 보니, 종이는 어느새 볼품없이 지저분해져 있었다. 그래도 그 지저분함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했다. 아이들 수업이란 원래 이렇게 완벽하지 않은 상태로 시작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펜을 내려놓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창밖에서는 토요일 아침답게 차 소리도 적고,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도 느긋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부산대 메일을 보냈던 그 밤과는 사뭇 다른 공기였다. 그날 밤에는 ‘내가 뭘 포기한 걸까’라는 질문이 마음속에 선을 그리는 느낌이었다면, 오늘은 ‘내가 뭘 시작하려고 하는 걸까’라는 질문이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작은_한국어_놀이터’라는 이름으로 만든 폴더를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좀 유치한 이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삭제하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건, 누군가를 시험에 합격시키는 기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한국어를 통해 자기 목소리를 조금 더 자유롭게 꺼낼 수 있도록 하는 일이라는 생각. 그게 어른이든, 아홉 살짜리 소녀든, 열두 살짜리 장난꾸러기든 상관없이.
휴대폰 화면을 켜니, 이미 리란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이링이 오늘 아침부터 가방 메고 서 있었어.
너무 일찍 오면 안 된다고 말리는 중.”
줄 끝에 웃는 이모티콘 대신 마침표가 찍혀 있었지만, 그 점 앞에서 장이링의 얼굴이 선명하게 상상됐다. 토요일 아침부터 가방을 메고 현관 앞에 서서, ‘이제 가자, 이제 가자’ 하고 외치는 모습.
나는 짧게 답을 보냈다.
“나도 준비 다 됐어.
조금 있다가 봐.”
시계를 보니 약속까지는 아직 넉넉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더 앉아 있으면 교안을 또 고치고 싶어질 것 같아서, 가방에 노트와 그림 카드, 색연필 몇 자루, 그리고 A4 몇 장을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수업 장소는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그 카페였다. 가게에서 멀지 않은 2층 카페, 주인 아저씨가 예전에 “나도 한국어 배우고 싶은데”라고 말하던 곳. 그날 이후로 한 번 더 언급이 없었기에 가볍게 흘려버렸었는데, 이번에는 내가 먼저 그 말을 꺼냈다. 토요일 낮, 두 시간 정도만 조용한 자리 하나 부탁할 수 있겠냐고. 그 대신, 수업이 끝난 뒤에 간단한 표현과 발음 정도는 무료로 봐 주겠다고.
아저씨는 예상보다 쉽게 승낙했다.
“애기들이랑 같이 오는 거예요?
그럼 좋아요, 가게도 좀 밝아지겠네.”
상대가 이렇게 말해 주면 감사한 마음이 들기보다, 마음 한구석이 조금 든든해진다. 이 도시에서 내 자리를 조금씩 조용히 찾아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현관문을 잠그고 계단을 내려오며, 나는 생각했다. 대학교를 거절한 것은 하나의 선택이었고, 이제 그 선택에 살을 붙이는 일은 이런 작은 약속들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카페에 도착하니 문 앞에는 아직 손님이 많지 않았다.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니, 주인 아저씨가 에스프레소 기계를 닦고 있었고, 벽 쪽 좌석에는 한두 명의 손님이 노트북을 펴고 앉아 있었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벨 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왔어요?”
주인 아저씨가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했다. 나보다 훨씬 큰 체격에 둥근 배를 가진, 성격 좋은 아저씨였다.
“네, 오늘 애들 수업이 있어서요.
자리 괜찮을까요?”
“괜찮아요, 저쪽 구석 자리 비워뒀어요.
애들 오면 시끄러울 수도 있으니까,
창가보다는 안쪽이 낫겠죠?”
“네, 딱 좋아요.”
내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아저씨는 싱긋 웃었다.
“나중에 끝나고 나 좀 봐줘요.
‘안녕하세요’는 이제 잘하는데,
뒤가 문제야, 뒤가.”
“알겠습니다.”
나는 웃으며 대답하고, 그가 손으로 가리킨 구석 자리로 향했다. 커다란 나무 테이블 하나가 벽에 붙어 있었고, 의자 세 개가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아이들 둘, 그리고 나. 딱 맞는 숫자였다.
가방에서 노트와 카드들을 꺼내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어디야?”
리란이었다.
“카페 도착. 자리 잡았어.”
“응. 우리도 이제 올라간다.
이링이가 뛰어가려고 해서 잡고 있어.”
전화기 너머로 작게 “선생님!!”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웃으며 통화를 끊고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 아래에서 아이들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텅텅, 가볍게 뛰는 발소리. 곧 문이 열리고, 장이링이 먼저 얼굴을 내밀었다.
“선생님—!!”
그 뒤를 리우위쉬엔이 조금 더 수줍은 표정으로 따라 들어왔다. 리란은 둘 뒤에서 조용히 아이들의 가방을 받아 들고 있었다.
“왔어요?”
“응, 왔어.”
장이링이 나를 향해 양팔을 활짝 벌렸다가, 갑자기 멈추고 두 손을 가방끈에 다시 올려놓았다.
“그…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 말투가 어제까지 연습한 티를 내고 있어서, 나는 일부러 조금 과장되게 칭찬했다.
“오, 장이링, 발음 많이 좋아졌는데?”
리우위쉬엔도 한 발짝 다가와 조심스레 말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위쉬엔이도 잘했어.
자, 오늘은 여기서 수업할 거야.
카페 교실, 어때?”
장이링이 주위를 둘러보며 눈을 크게 떴다.
“우와… 여기서 공부하면, 공부 아니고 놀기 같아요.”
“맞아.
오늘은 공부 아니고… 뭐라고 했지?”
나는 일부러 말을 멈추고 아이들의 표정을 살폈다.
“놀이터!”
위쉬엔이 먼저 말했다.
“그래.
오늘은 ‘한국어 놀이터’야.”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아이들을 자리에 앉히고, 리란에게는 카운터 쪽 다른 테이블에 자리잡으라고 했다.
“너도 같이 들을래?”
“아니, 난 저기서 볼게.
괜히 내가 있으면 애들 긴장해.”
“긴장 안 하던데.”
“그래도… 엄마 없으면 더 잘할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카운터 근처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긴장하는 쪽은 오히려 리란이었다. 아이들보다 더 자주 이쪽을 흘끔거릴 사람은 분명 그녀일 것이다.
나는 아이들 앞에 카드뭉치를 내려놓았다. 색연필과 A4용지도 그 옆에 펴놓았다.
“자, 오늘 먼저 뭐 할까?”
“그림!”
장이링이 가장 먼저 말했다.
“안녕하세요!”
위쉬엔은 전에 배웠던 걸 먼저 말해 보고 싶은 눈치였다.
“그래, 둘 다 할 거야.
근데 순서는… 안녕하세요부터.”
아이들이 동시에 “에이—” 하고 투덜거렸다.
“왜.”
“그거 맨날 했어요.”
“맨날 해야 잘해져.”
내가 일부러 진지한 표정을 짓자, 둘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근데 매번 똑같이 하면 재미없잖아.
그래서 오늘은 새로운 방식으로 할 거야.”
“새로운?”
“게임이야.”
내가 ‘게임’이라고 말하자, 둘의 눈빛이 즉시 돌아왔다.
“자, 이게 뭐게?”
나는 일부러 트럼프 카드 섞는 것처럼 카드뭉치를 섞는 시늉을 하다가, 테이블을 톡톡 세 번 두드렸다.
“자, 오늘 게임 이름은 ‘빨리 인사하는 사람 승!’이야.”
이링은 살짝 기대가 줄어든 표정이었다.
“그게 뭐야… 그냥 빨리 말하는 거잖아요.”
“그냥 빨리 말하면 혀 꼬여서 지는 거고.
이긴 사람은…”
나는 일부러 말을 끊고, 아이들을 번갈아 보았다.
“이긴 사람은 오늘 끝나고,
케이크 한 입 더 먹을 수 있다.”
둘은 동시에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진짜?”
“진짜.
근데 아저씨랑 엄마 허락도 받아야 돼.”
그 말이 끝나자마자, 장이링이 번개처럼 리란 쪽을 돌아봤다.
“엄마! 나 이길 거야! 나 이길 거야!”
리란은 멀리서 양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괜찮다는 뜻 같았다.
나는 웃으며 게임 룰을 설명했다.
“선생님이 ‘하나 둘 셋’ 하면,
둘이 동시에 ‘안녕하세요, 저는 장이링이에요’,
‘안녕하세요, 저는 리우위쉬엔이에요’
이렇게 말하는 거야.
근데 중간에 틀리면, 다시.”
“다시?”
“응. 말이 꼬이면, 케이크도 꼬여.”
장의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선생님, 그 말 좀 이상해요.”
“원래 선생님 말은 좀 이상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 준비!
입 풀기 먼저.”
나는 일부러 우스꽝스럽게 입을 풀어 보였다.
“아에이오우, 아에이오우,
까까까까, 따따따따,
사사사사, 샤샤샤샤.”
장의링이 따라 하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사사사사, 귀신 같아요!”
“그래, 그 귀신이 ‘ㅅ’ 발음 귀신이야.”
위쉬엔은 조금 진지한 얼굴로 입모양을 따라 하더니, 갑자기 말했다.
“선생님, 저 ‘샤’ 발음 어려워요.
자꾸 ‘사’ 돼요.”
“그래서 하는 거야.
샤, 셔, 쇼, 슈, 시.
같이 해볼까?”
나는 손가락으로 리듬을 타며 다섯 음절을 끊어 읽었다.
“샤, 셔, 쇼, 슈, 시.”
장이링이 먼저 따라 했다.
“샤, 셔, 쇼, 수, 시.”
“어, ‘슈’ 어디 갔어.”
“몰라, 도망갔어요.”
나는 먹잇감 발견한 듯이 손을 까딱했다.
“그래서 우리가 잡아야지.”
다시 한 번, 이번에는 더 천천히.
“샤—”
“샤—”
“셔—”
“셔—”
“쇼—”
“쇼—”
“슈—”
“수—”
장이링이 또 틀리자, 위쉬엔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장이링 케이크 못 먹겠다.”
“너도 ‘샤’ 이상했거든.”
나는 둘을 번갈아 보며 일부러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
케이크를 포기하든가, 발음을 잡든가.
둘 중 하나 선택해.”
“발음!!!”
둘이 동시에 대답했다.
“좋아.
그럼 오늘 케이크의 주인은 발음 귀신이다.”
나는 다시 입모양 그림을 A4에 크게 그려서 보여주었다. 혀 위치, 이 사이, 바람 나가는 방향을 간단히 표시했다. 아이들이 그림을 유심히 보며 따라 하는 동안, 어느새 그들의 표정이 평소 공부할 때보다 훨씬 진지해졌다는 걸 느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자신들의 입모양을 서로 보고 웃으면서도, 발음 하나만큼은 대충 넘기지 않았다.
몇 번 더 연습하고 난 뒤에야 나는 게임을 시작했다.
“자, 진짜로 한다.
하나, 둘, 셋!”
“안녕하세요, 저는 장이링이에요!”
“안녕하세요, 저는 리우위… 시엔이에요…”
위쉬엔이 끝에서 살짝 미끄러졌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음, ‘시엔’도 귀엽지만…
우리 오늘은 ‘쉬엔’으로 가기로 했잖아.
다시.”
“하나, 둘, 셋!”
“안녕하세요, 저는 장이링이에요!”
“안녕하세요, 저는 리우위쉬엔이에요!”
이번에는 둘 다 무사 통과였다.
발음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리듬과 억양이 훨씬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들이 자기 이름을 말할 때의 얼굴이었다. 조금씩, 한국어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표정.
나는 박수를 쳤다.
“오케이, 오늘 케이크는…
둘 다 한 입 더.”
장이링이 자리에서 폴짝 일어나 손을 들었다.
“선생님 최고!”
위쉬엔도 어색한 얼굴로 박수를 쳤다.
“선생님,
저는 초코 케이크 좋아해요.”
“그 문장은 좀 이따가 써먹자.
이제 두 번째 게임이야.”
이제야 아이들이 눈을 완전히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미리 준비해 온 그림 카드들을 꺼냈다. 종이에 급하게 그린 그림들이라 전문가의 그림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아이들에게는 충분히 통했다.
강아지, 고양이, 아이스크림, 피자, 책, 게임기, 바다, 비행기, 엄마, 선생님.
장을 펼치자 장이링이 웃음을 터뜨렸다.
“선생님, 이게 강아지예요? 돼지예요?”
“강아지지.
어디가 돼지야.”
“코가…”
위쉬엔이 옆에서 작게 거들었다.
“코가 좀 뚱뚱해요.”
나는 일부러 한숨을 쉬는 척하며 말했다.
“원래 강아지도… 인생 살다 보면 코가 넓어질 수 있어.”
아이들이 한 번 더 웃고 나자, 나는 카드를 하나씩 가리키며 한국어 단어를 말했다.
“이건 강아지.
이건 고양이.
이건…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
장의링이 제일 크게 반응했다.
“이건 피자.”
“피자!!!”
이번에는 둘이 동시에 소리쳤다.
“좋아.
이제 이걸 가지고 문장을 만들 거야.”
나는 종이에 크게 적었다.
“나는 __ 좋아해요.”
“자, 이게 오늘의 마법 문장이야.
어떤 그림이든 가져와서,
이 문장에 넣으면 돼.”
장이링이 손을 들어 말했다.
“나 해볼래!”
“그래, 해봐.”
그녀는 주저 없이 아이스크림 그림을 가져와 내 앞에 탁 놓았다.
“나는… 아이스크림… 좋아해요.”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는 동안, 그녀의 얼굴에는 작은 자신감이 피어 있었다.
“완벽해.”
나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위쉬엔은?”
위쉬엔은 잠시 고민하다가 강아지 그림을 집어 들었다.
“나는… 강아지… 좋아해요.”
발음은 부드러웠고, 억양도 자연스러웠다.
위쉬엔의 장점은, 한 번 마음먹으면 꽤 정확하게 따라 한다는 점이었다.
“이제 좀 난이도 올려볼까?”
“난이도?”
아이들이 동시에 나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두 개.”
나는 종이 아래에 하나 더 문장을 적었다.
“나는 __하고 __ 좋아해요.”
장이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선생님, 욕심쟁이 같아요.”
“그래.
세상은 원래 욕심쟁이들이 재미있게 살아.”
이번에는 장이링이 피자와 아이스크림 카드를 동시에 들었다.
“나는 피자하고 아이스크림 좋아해요!”
위쉬엔은 강아지와 책 그림을 골랐다.
“나는 강아지하고 책 좋아해요.”
나는 아이들이 만든 문장을 노트에 적어 주었다.
글자를 따라 읽게 하고, 발음이 헷갈리는 부분은 다시 입모양을 잡아 주며 고쳐 나갔다. 그렇게 몇 차례 반복하고 나니, 아이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문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하고 피자 좋아해요.”
“나는 게임하고 아이스크림 좋아해요.”
“나는 선생님하고 아이스크림… 음… 조금 좋아해요.”
마지막 문장을 말하며 장이링이 슬쩍 내 눈치를 봤다.
“조금?”
“응.
너무 좋아하면… 선생님 머리 아파.”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래,
조금 좋아하는 게 오래 가긴 하지.”
멀리서 지켜보던 리란이 입가를 가만히 눌렀다 떼며 웃고 있는 게 슬쩍 보였다. 그녀의 눈빛엔 안도와 기쁨과 약간의 걱정이 섞여 있었다. 어쩌면 내가 지금 이 작은 테이블에서 만들어 가는 이 시간이, 그녀에게는 내가 이 도시를 선택한 것의 증거처럼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다시 카드를 섞으며 서로 자신의 ‘좋아하는 것’을 자랑하는 동안, 나도 마음속으로 이런 문장을 조용히 만들어 봤다.
나는… 이 도시하고, 한국어하고, 그리고… 이 사람들을 좋아해요.
여기서 ‘사람들’이라는 단어에는 학생들과 아이들, 리란, 그리고 조금은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업 마지막에는 예정대로 ‘자기소개 타임’을 다시 꺼내 들었다. 오늘 배운 문장을 섞어, 각자 자기소개를 만들어 보게 했다.
“자, 오늘 대망의 마지막.
진짜 한국 사람처럼 말해 보는 시간.”
“우리 한국 사람 아니에요.”
장이링이 말했다.
“알아.
근데… 한국어 말할 땐 한국 사람 느낌 내도 돼.”
나는 장난스레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누가 먼저 할래?”
둘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가, 눈을 마주치고 동시에 손을 내렸다.
“그럼 오늘은…
장난꾸러기부터.”
“선생님, 누구요?”
“장이링.”
“왜요!”
“왜긴, 너잖아.”
장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가 이내 웃으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장이링이에요.
나는 아이스크림하고 피자 좋아해요.
한국어 조금… 아니, 많이 좋아해요.”
마지막 문장에서 잠깐 망설였다.
‘조금’과 ‘많이’ 사이에서 고민하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더니, 결국 ‘많이’라는 단어를 택하는 것을 보고, 나는 박수를 크게 쳤다.
“완벽하다.”
“선생님, ‘완벽하다’ 무슨 뜻이에요?”
“아주, 아주, 아주 좋다.”
장이링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위쉬엔, 준비됐어?”
리우위쉬엔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안정되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리우위쉬엔이에요.
나는 강아지하고 책 좋아해요.
한국어… 음…”
잠깐 멈추더니,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한국어… 조금 어려워요.
그래도… 좋아해요.”
마지막 문장을 말할 때, 그녀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말끝이 약간 떨렸지만, 그 떨림의 모양이 나에게는 오래 기억될 것 같았다.
“좋아.
어려워도 좋아한다는 말은
진짜 마음에서 나오는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이들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서 또 하나의 문장이 떠올랐다.
부산에 가도,
이런 순간을 만들 수 있었을까?
아마, 다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더 정해진 교실, 더 좋은 시설, 더 많은 학생, 더 명확한 규칙.
하지만 이렇게 카페 구석 테이블에서, 손으로 직접 그린 이상한 강아지 그림을 들고, 케이크 한 입을 걸고 “샤, 셔, 쇼, 슈, 시”를 외치는 시간은… 이 도시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수업 시간은 어느새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오늘 수업 끝!”
내가 손뼉을 치자, 아이들이 “에—” 하고 동시에 불평을 터뜨렸다.
“더 할래요.”
“조금만 더요.”
“조금만 더”라는 말은 어른들이 할 때와, 아이들이 할 때의 무게가 다르다. 어른의 ‘조금만 더’에는 미련과 욕심이 섞여 있고, 아이들의 ‘조금만 더’에는 온몸으로 붙잡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나는 시계를 한 번 보고, 카운터 쪽을 한 번 바라보았다. 리란이 우리를 향해 작게 엄지손가락을 올려 보였다.
“그럼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더 하자.”
나는 종이를 한 장 꺼내고, 가운데에 크게 ‘좋아하다’라는 글자를 썼다. 그리고 그 아래에 동그라미 두 개를 그렸다.
“자, 이번에는 그림일기야.
그냥 글 쓰는 게 아니라,
그림하고 글 같이.”
“그림이면 좋아요.”
장이링이 먼저 말했다.
“여기다가,
너희가 진짜 좋아하는 거 하나만 그려.
아무거나 상관없어.
그리고 옆에 한국어로 한 줄만 쓰자.
‘나는 __ 좋아해요.’”
아이들은 색연필을 부여잡고 동시에 종이에 고개를 묻었다.
장이링은 역시 아이스크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색연필 두세 개를 번갈아 쥐고 크림 위에 초코칩을 찍고, 그 옆에 괴상한 모양의 하트를 그렸다. 위쉬엔은 조금 더 신중했다. 먼저 작은 책 네 권을 그리더니, 그 중 한 권에만 색을 칠했다. 그리고 오른쪽 구석에 작게 강아지를 그렸다.
그들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들었다. 색연필이 종이를 긁는 소리, 카페 에스프레소 기계에서 뜨거운 물이 나오는 소리, 멀리서 주문을 받는 아저씨의 목소리, 리란이 가끔 가방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는 소리. 이런 소음들이 오늘만큼은 몽땅 배경음악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장이링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 다 했어요!”
종이에는 아이스크림과 하트, 그리고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나는 아이수크림 좋아해요.’
“오, ‘아이스’랑 ‘크림’이 싸웠다.”
“네?”
“스펠링이 조금 다투고 있어.
그래도 괜찮아.
선생님이 살짝 도와줄게.”
나는 지우개로 ‘수크’ 부분만 살짝 지우고, 옆에 ‘아이스크림’이라고 다시 써 주었다.
“봐,
틀려도 괜찮아.
우린 고치는 법도 배우는 중이니까.”
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선생님, 나중에 내가 잘 쓰면,
선생님 글씨 지워도 돼요?”
“그럼.
나중에 진짜 잘 쓰게 되면,
내 글씨는 다 지우고
네 글씨만 남겨도 돼.”
위쉬엔도 다 그린 종이를 내밀었다.
‘나는 강아지하고 책 좋아해요.’
글씨는 조금 작았지만, 한 줄 한 줄 눌러 쓰느라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종이에서도 그 힘이 느껴졌다.
“위쉬엔, 이거 네 방에 붙여도 되겠다.”
“엄마가…
그러면 좋아할까요?”
“당연하지.
네가 좋아하는 걸 한국어로 말할 수 있다는데,
어느 엄마가 안 좋아하겠어.”
말을 하고 나서,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리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순간, 우리를 바라보며 아주 조용히 웃고 있었다.
그 웃음 속에는, 장이링의 엄마로서의 감정과, 내 연인으로서의 감정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그 두 감정이 섞인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이 도시를 선택한 이유는,
어쩌면 이미 내 삶의 여러 군데에 조금씩 새겨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단지 내가 늦게 눈치챘을 뿐.
수업이 완전히 끝나고, 아이들이 케이크 한 입씩을 더 받아 들고 의자 위에 반쯤 누워 있을 때쯤, 나는 가방을 정리했다.
“오늘 어땠어?”
내 질문에 장이링이 입에 케이크를 물고 대답했다.
“맛있었어요.”
“수업이 아니라 케이크 얘기잖아.”
“둘 다요!”
위쉬엔은 조금 더 진지하게 말했다.
“재미있었어요.
오늘 ‘좋아해요’ 많이 써서…
기분이 좋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좋아하는 것’만 이야기했으니까.
다음에는…
싫어하는 것도 한 번 말해볼까?”
장이링이 눈을 번쩍 떴다.
“좋아요!
나는 숙제… 싫어해요!”
“그건 엄마 앞에서 말해.”
리란이 그제야 자리에 다가와 아이들의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선생님 힘들게 했어, 안 힘들게 했어?”
“조금… 아니,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장이링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선생님은 우리 좋아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가슴 어딘가가 살짝 따끔했다가, 금방 뜨거워졌다.
“그럼.”
나는 장난을 섞지 않고 대답했다.
“좋아하지.
많이.”
리우위쉬엔이 슬쩍 내 얼굴을 보더니, 장난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우리 좋아해요가 더 많아요,
아니면…
리란 아주머니 좋아해요가 더 많아요?”
카페 안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가, 곧장 풀렸다.
아이들의 질문은 항상 이렇게 직선적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둘 다 좋아해요.”
장이링이 “에이—” 하며 발을 구르자, 리란이 아이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그만.
선생님 놀리지 마.”
그러면서도, 그녀의 귀끝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카페 밖으로 나왔을 때, 이미 오후 햇살이 거리에 내려앉고 있었다. 아이들은 가게 쪽으로 먼저 뛰어갔고, 리란과 나는 그 뒤를 천천히 걸어갔다.
“오늘 어땠어?”
내가 먼저 물었다.
“누가?”
“너.”
리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링이 표정 보니까…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안 들더라.”
나는 웃었다.
“그 말은 선생님에게 최고의 칭찬이야.”
“근데…”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 힘들진 않아?”
“좀.”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애들 수업은…
어른 수업이랑 또 다른 종류의 체력이 필요하더라.”
“그치.”
“근데… 좋다.”
말끝에 자연스럽게 그 말이 붙었다.
“좋아?”
“어.
얘네들이 한국어로 자기 좋아하는 걸 말할 때,
표정이…
어른들이랑 다르더라.
그거 보는 것도…
재미있고.”
리란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우리가 걷는 발소리만 상가 복도 바닥에서 가볍게 울렸다.
“준용아.”
“응?”
“부산 안 가기로 한 거,
오늘 또 한 번 잘했다고 생각했어.”
“왜.”
“그냥…
이렇게 토요일 낮에,
아이들 데리고 카페에서 수업하고,
끝나고 같이 걸어가는 거.
이런 게…
네 삶이랑 잘 맞는 것 같아서.”
나는 그 말을 듣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나도… 그런 것 같아.”
“진짜야?”
“응.
나…
이런 게 좋아.”
그 말은,
단지 오늘 하루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내가 앞으로 살아가고 싶은 방향에 대한 고백에 가까웠다.
리란은 잠시 나를 보다가,
입꼬리를 아주 작게 올렸다.
“그럼 됐어.”
그녀의 그 한마디가, 놀랍게도 오늘 하루를 통째로 정리해 주는 문장처럼 느껴졌다.
‘그럼 됐어.’
집이 없고, 차도 없고,
퇴직연금도 빚도 제대로 없는 인생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선택한 것들에 대해 조금 덜 불안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말.
작은 한국어 놀이터에서 시작된 토요일의 수업은,
그렇게 내 인생의 작은 방향표 하나를 더 세워 주고 있었다.
나는 가게 앞에 먼저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는 아이들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오늘도 잘 살았다.
그리고,
다음 토요일에는 또 어떤 문장을 아이들 입에서 꺼낼 수 있게 해 줄지,
벌써부터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