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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교무실

by leolee

토요일 아이들 수업이 끝난 다음 날, 일요일 밤은 유난히 길었다. 장이링과 위쉬엔의 웃음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어서인지, 내 마음 어디엔가 따뜻한 온도가 계속 맴돌고 있었지만, 밤이 깊어질수록 그 온도와는 전혀 다른 냉기가 슬며시 스며들기 시작했다.

‘잘 살았다.’
그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잠들었는데, 이상하게도 새벽에 잠이 깼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것도 아니었고, 대학교 생각이 다시 떠오른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낯선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시작될 어떤 일이 조용히 다가오는 기척.
문을 열기 전, 손잡이 건너편에 누군가 서 있는 것 같은 느낌.

맹탕한 불안은 보통 이유 없이 찾아오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느낌을 외면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보통 그런 날은 학교에서 작은 사건이 생기거나, 학생이 큰 고민을 털어놓거나, 그냥 하루가 버겁게 흘러가곤 했다.

그런데 이날은 그 ‘작은 사건’이 생각보다 큰 파도로 밀려왔다.

월요일 아침,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학교에 도착했다.
정문을 지나면서 학생들의 인사를 받는데, 느낌이 조금 달랐다. 몇몇 아이들은 평소처럼 웃으며 “선생님!” 하고 손을 흔들었지만, 두세 명은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나를 스치듯 지나갔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시험 기간이라 예민한 아이들도 있고, 학교 사정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경우도 많으니까. 하지만 복도 끝에서 이어지는 묘한 기류는 계속 발목을 잡았다.

교무실 문을 열자마자, 부장 선생이 내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평소처럼 반갑게 웃는 얼굴은 아니었다.

“태겸 쌤, 잠깐 와봐요.”

그 말투.
짧고, 단단하고, 설명 없는 부름.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감지했다.
아, 뭔가 터졌구나.

나는 조용히 그녀 자리 앞으로 다가가 의자를 하나 끌어다 앉았다.

“왜요?”

부장 선생은 모니터를 돌려 나에게 보였다.

단체방.
H대 준비반 학부모 단톡방.
그 안에 하나의 글이 빨간 표시와 함께 떠 있었다.

“이번 수업, 도대체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합니다.
아이 말로는 선생님이 대부분 발음만 잡아주고,
전공 관련 내용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는데
이게 맞는 건가요?
저희 아이는 제대로 배우고 있는 건가요?”

그리고 그 아래에는
짧게 ‘맞아요’ ‘저도 좀 의아했어요’
비슷한 반응이 몇 개 이어져 있었다.

순간, 입안이 말라붙었다.

발음만 잡아준다?
전공 관련 내용은 없다?

나는 지난 몇 주간 준비했던 교안을 떠올렸다.
전공별 질문 리스트를 20문제씩 정리했고,
학생들 개별 답변을 수정해 줬고,
실제 면접 상황을 대비해서 줌으로 모의 면접도 돌렸고,
발음 교정은 그 중 일부에 불과했다.

하지만 학부모들은 ‘일부’만 떼어 전체로 본 것 같았다.
아니면—
아이들이 집에서 그렇게 말한 것일 수도 있었다.

부장 선생이 조용히 말했다.

“쌤이 잘못한 건 아닌데…
이게 좀 커질 수도 있어요.”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물었다.

“누가 올린 거예요?”

“밍루 엄마.”

아.
밍루.

수업 시간마다 딴짓은 안 하지만,
표정이 항상 무기력하고,
질문하면 대답 반 템포 늦게 하고,
한 번 틀리면 그 자리에서 멈춰버리는 아이.

그 아이의 어머니는 반대로 강한 성향이었다.
깔끔하고, 직설적이고,
자기 아이가 어디에서든 뒤쳐지는 걸 참지 못하는 사람.

전에도 몇 번 교무실에 와서
“우리 아이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확실히 알려 주세요.”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던 게 떠올랐다.

부장 선생은 마우스를 돌리며 말했다.

“그리고… 이거.”

새로운 메시지가 화면에 올라와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다른 한국어 선생님들은 교재도 자세히 봐주고
문법도 깊게 설명해 준다는데
태겸 선생님 수업은 왜 이렇게 가벼운지 모르겠어요.
아이 수준에 맞는 건가요?”

‘가볍다.’
그 말이 가슴에 비수처럼 걸렸다.

나는 단 한 번도 가볍게 가르친 적이 없었다.
가볍게 설명한 적은 있어도,
가볍게 가르친 적은 없었다.

학생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과
수업이 가볍다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저기…”
내가 입술을 달싹이자 부장 선생이 말했다.

“일단 교장 선생님이 좀 보자고 하셨어요.
그리고 민원 들어온 이상,
쌤도 그 학부모 만나야 할 것 같아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하지만 목소리는 생각보다 훨씬 작았다.

교장실 문을 열자, 교장은 평소보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는 서류를 한쪽에 밀어놓고 나에게 말했다.

“태겸 선생.”

“네.”

“민원 들어온 거 알죠?”

“네. 방금 확인했습니다.”

교장은 안경을 벗고, 손가락으로 콧등을 눌렀다.

“사실…
우리 학교에서는 학부모 민원이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이에요.
유학반 문제는 특히 그래요.
아이 한 명이 유학을 가면,
그만큼 학교 수익이 발생하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교장은 말을 이었다.

“근데 학부모들이 ‘수업이 가볍다’고 말한 이상,
우리도 그냥 넘길 수는 없어요.”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가볍게 한 적 없습니다.”
이 문장을 말하고 싶었지만, 목이 막혀 소리가 되지 않았다.

교장은 계속 말했다.

“알아.
열심히 하고 있어.
근데…
학부모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 느낌도 중요해.”

‘그 느낌도 중요해.’
그 말이 교장실을 가득 메웠다.

나는 자리를 뜨지 못한 채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
감정이 꿀렁거리며 올라왔지만,
감정으로 말하면 더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낮았다.

교장은 서류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오늘 오후 상담 일정 잡아놨어요.
밍루 엄마가 직접 오겠대요.
대화 잘 해봐요.”

나는 천천히 종이를 받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무실로 돌아가는 길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벽에 붙은 포스터도, 복도의 형광등도,
아이들이 뛰어가는 발소리도
모두 희미하게 들렸다.

점심시간, 나는 도시락 대신 책상 앞에서 물만 마셨다.
머릿속에는 같은 문장이 계속 맴돌았다.

가볍다.
전공은 안 가르친다.
우리 아이는 뭐가 달라졌는지 모르겠다.

나는 수업 내용을 다시 체크했다.
메모, 교안, 질문 리스트, 학생 개별 첨삭.
한 줄 한 줄 떠올리며
혹시 내가 빠뜨린 게 있었나 되짚었다.

그러다 문득 한 문장이 떠올랐다.
지난번 모의 면접에서
밍루가 했던 말.

“선생님, 저…
이거 너무 어려워요.
근데…
집에서 말하면 엄마가 화낼까 봐…”

그때 나는 말했다.

“괜찮아.
모르는 건 모르는 대로 말하면 돼.
그게 네 페이스니까.”

그 말이 혹시…
밍루의 입에서
‘선생님이 자세히 안 가르쳐 준다’
이런 식으로 변해버린 건 아닐까?

나는 이마를 천천히 짚었다.
어쩌면,
아이에게 맞추어 말한 내 말이
집에서는 ‘가볍다’로 해석됐을 수도 있었다.

오후 3시.
상담 시간이 다가왔다.

교무실 문이 열렸다.
부장 선생이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왔어요.”

밍루 엄마였다.
예상대로 단정하고 깔끔한 복장,
표정은 차가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앉죠.”

그녀의 말투는 똑 떨어졌고,
표정엔 감정이 거의 없었다.

부장 선생과 나는 상담실로 이동했고,
문이 닫히자마자 그녀는 곧장 말을 꺼냈다.

“우리 아이 수업이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혹시 어떤 부분이 걱정되세요?”

“걱정되는 정도가 아니라…
솔직히 불안합니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서류 하나를 꺼냈다.
아이의 전공 관련 예상 질문 목록이었다.
내가 직접 정리해 준 것.

“이거요.”

그녀가 문장을 가리켰다.

“밍루가 이걸 집에서 읽는데
전혀 이해를 못 해요.
왜 이렇죠?”

나는 순간 답이 막혔다.

“그건…
수업에서 조금씩 풀어서 연습하고 있어요.”

“근데 왜 집에서는 못 해요?”

그 질문은
‘교사로서 당신은 무능하다’라는 문장으로 들렸다.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밍루 학생은 기본 문장 자체가 아직 안정적이지 않아서—”

“그러니까요.”
그녀가 말을 잘랐다.
“기초가 안 되어 있는데
왜 어려운 걸 시키나요?”

기초가 안 되어 있어서 기초도 가르치고 있는 거라 말하려 했지만
그녀의 말이 더 빨랐다.

“그리고 우리 아이 말로는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발음만 계속 한다고 하던데
그게 맞아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발음은 기본기라서,
실전 답변 연습 전에 필수로—”

“근데 전공 관련 질문은요?
밍루는 하나도 모르던데.”

“전공 질문도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아이는 모르죠?”

그 질문은
칼끝이 내 쪽으로 향하는 소리 같았다.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말했다.

“밍루는 다른 학생들보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합니다.
집에서도 연습하는 게—”

“우리는 매일 연습해요.”

일격.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학생마다 습득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그러니까,
우리 아이가 늦는다고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올라갔다.
부장 선생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어머님, 선생님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죠?
지금 들으니까 그런 뜻이네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
잘못한 게 아니라 해도
이 상황에서는 어떤 말도 ‘변명’이 되어버린다.

그녀는 마지막 말만 더 했다.

“우리 아이는 유학을 준비하는데
이러다가 떨어지면
책임은 누가 집니까?”

책임.

그 단어가 나를 정면으로 때렸다.
아이의 미래, 부모의 기대, 학교의 수익 구조,
그리고 내 수업.

그 모든 무게가 한꺼번에 내 가슴 위로 얹혀졌다.

나는 잠시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차갑지만 어쩌면 진심이 담긴 눈.
그녀는 아이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그 싸움의 방식이 거칠 뿐.

나는 조용히 말했다.

“어머님,
밍루 학생에 대해…
제가 더 신경 쓰겠습니다.
개별 지도도 지금보다 늘리겠습니다.”

그녀는 그제야 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말…
꼭 지켜주세요.”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의자에 몸을 깊게 묻었다.
숨이 길게 빠져나갔다.

부장 선생이 나를 보며 말했다.

“쌤…
기운 내요.
민원은 누구나 받아요.
근데… 쌤은 잘하고 있는 거 알죠?”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목소리는 낮았고
내 안에서 작은 균열이 조금씩 벌어지는 기분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휴대폰이 진동했다.

리란이었다.

“오늘… 힘들었어?”

나는 길 한복판에서 메시지를 오래 바라보았다.

결국 이렇게 답했다.

“응.
좀.”

몇 초 후, 그녀의 답장이 왔다.

“괜찮아.
너 잘하고 있어.
너한테 배우는 사람들은 다 알아.”

그 말이 화면에 뜨는 순간,
나는 불쑥 숨이 고여 눈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해 주는 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그제야 실감했다.

나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

“고마워.
내일 얘기하자.”

리란은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
단순한 하트 하나였는데
오늘 만큼은 그게 꽤 큰 힘이 되었다.

집에 도착해 샤워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눈을 감아도 상담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왜 우리 아이는 모르죠?
이러다가 떨어지면 책임은 누가 집니까?

그 말들이 가슴 아래쪽에서 둔하게 울렸다.

하지만 동시에
수업 시간에 나를 바라보던
학생들의 눈빛도 떠올랐다.

“선생님, 한국 안 가요?”
“선생님 계속 있어요?”
“선생님 발음 잡아줘서 감사해요.”

그리고 장이링의 말.

“선생님… 나는 한국어 많이 좋아해요.”

그 말이
내 흔들리는 중심을 아주 조금 잡아주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래…
내일 다시 해보자.”

오늘은 흔들렸지만
지금 도망치지 않는다는 선택만큼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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