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점심 약속

by leolee

아침 공기가 조금 묘했다. 대학교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는 메일을 보낸 지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마치 한 계절쯤 지나온 것처럼 공기가 달라져 있었다. 어제는 선택이라는 묵직한 문장 속에 들어가 하루를 보냈다면, 오늘은 그 문장 밖으로 걸어 나와 처음으로 실제 땅을 밟는 기분이었다.

결정 후의 첫 아침은 늘 이상하게 느껴진다. 쓸데없이 가벼운 것 같다가, 갑자기 배 밑이 푹 꺼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두 감정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었다. 가벼움과 두려움이 서로 기대고 서 있는 느낌. ‘남았다’는 사실은 안도감을 주면서도, ‘그만큼 또 책임이 생겼다’는 감정이 함께 따라붙었다.

세수를 하고 나와 거울을 보니, 눈 밑이 살짝 붓기는 했지만, 어제보다 표정이 안정되어 있었다. 스스로를 설득하는 시간은 이미 끝났다. 이제는 남기로 한 사람이 어떻게 하루를 살아야 하는지만 생각하면 되었다.

책상 위의 폴더를 열자 친근한 파일 이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린이한국어_장이링_리우위쉬엔(4회차)’
‘H대_전공별면접문답_최종정리’
‘기초말하기_발음교안(개선판)’


그중 첫 번째 파일이 유난히 눈에 오래 들어왔다.
이미 몇 주째 진행 중인 유료수업. 처음에는 리란의 부탁이었지만, 그 자리에서 바로 "수업비"라고 말하던 리란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실 그때 살짝 놀랐었다. 그녀는 원래 계산이 분명한 사람이었지만, 나를 애인으로 대해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선생님으로 존중해 주는 방식이 분명했다.

그날 아이들은 수업 내내 뛰어다녔고, 나는 웃다가 한숨 쉬다가 다시 웃다가 결국 KO 됐었다.
그런데도 리우위쉬엔은 집에 돌아가자마자 엄마에게 “안녕하세요”를 20번이나 외쳤다고 했고, 장이링은 내가 적어준 그림 단어장에 자기 스티커를 붙여 놓았다고 했다.

그러니, 이 수업은 분명 ‘내가 남기로 결정한 뒤에도 계속 이어져야 하는 것’ 중 하나였다.
문제는… 요즘아이들이 점점 더 수업에서 말이 많아지고, 장난도 늘어나고 있다는 점. 교안보다 순발력이 중요한 시간이 되고 있었다.

노트북을 덮고 가방을 챙겼다. 오늘은 그 점에 대해 리란에게 조금 조심스럽게 말해보려고 했다. 수업 방식 조정이든, 주 1회 추가든, 혹은 아이들 성향에 맞는 리듬 조절이든—어쩌면 그녀도 생각이 있을 것 같았다.

현관문을 닫는 순간, 휴대폰이 진동했다.
리란이었다.


“오늘 점심, 말하던 대로 몰에서 봐. 3층 푸드코트. 사람 많은 데가… 말하기 편해서.”


문장을 읽자마자, 가슴 안쪽이 묘하게 움직였다.
‘말하기 편해서’라는 말은 사실 반대로 들렸다.
조용한 데에서 말하면, 내가 감정 들킬까 봐.
리란은 늘 이렇게 조심스럽다. 그녀는 크게 소리치는 법이 없고, 중요한 말을 할 때는 자신보다 먼저 상대의 감정을 생각한다.

나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


“응. 12시에 도착할게.”


그러자 바로 메시지가 왔다.

“늦지 마. 나 오늘 할 말 많아.”


할 말 많아.
그 문장을 보는 순간, 다시 심장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어떤 말일까.
부담일까, 부탁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하지만 겁이 나지는 않았다.
이제는 도망치지 않기로 했으니까.


학교에 도착하자 평소보다 아이들이 유난히 많이 말을 걸었다.

“선생님! 대학교 안 간다면서요!”
“저 진짜 슬플 뻔했어요.”
“선생님 가면 우리 발음 누가 봐줘요?”

샤오왕이 가방 끈을 잡아끌며 말했다.
“선생님, 중국 오래 살아요?”

나는 웃으며 머리를 쓸었다.
“너 나 중국 국적 만들려고 그러는 거지?”
“아니요! 그냥… 오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애들 말투가 장난이면서도 다들 진심 같아서, 어제 내린 선택이 조금 더 안정적으로 다져지는 느낌이 들었다.

첫 수업은 기초말하기 반이었다. 오늘은 발음 교정 중심으로 하기로 해 두었었다.
아이들에게 ‘ㅅ’ 발음을 가르치면서 나는 종이에 큰 입 모양 그림을 그려 보였다.

“자, ‘ㅅ’은 이렇게. 이 사이로 바람 살짝 새게.”

그러자 뒷줄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선생님 어린이 수업하더니 그림 실력이 늘었네.”

순간 모두 웃음이 터졌다.
나는 무심하게 보이는 톤으로 말했다.

“너희도 그림으로 하면 잘 외워.
애들보다 못하면 안 되지?”

학생이 다시 물었다.
“애들? 장이링이랑 위쉬엔?”

“응.”

그러자 애들이 갑자기 웅성거렸다.
“어린이 한국어 그거 진짜 재밌겠다.”
“저도 배우고 싶어요.”
“선생님 애들한테 뭐 가르쳐요?”

나는 아이들의 학습 의지를 높여주기 위해서 말을 꺼낸 것이었지만, 학교 밖에서는 다른 수업을 하지 말라는 소리가 있었기 때문에 교실 안에서 이렇게 크게 이야기하는 건 좀 긴장이 되었다.

그리고는 잠깐 멈추고 생각했다.
수업의 즐거움이 어린아이들에게서 오히려 재충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요 며칠 사이에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애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그래. 이 길을 계속 가면 되겠다.
하는 결심도 조금씩 다져졌다.

두 번째 수업이 끝나 갈 무렵, 시간이 슬슬 다가오고 있었다. 11시 40분.
나는 슬며시 휴대폰을 꺼내 리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금방 끝나. 곧 갈게.”


답장은 바로 왔다.


“응. 자리 잡아둘게.”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과 빠르게 정리를 마친 뒤, 나는 걸음을 빨리 몰로 향했다. 점심시간 직전의 복도는 다소 한산했고, 햇빛이 창틀 사이로 내려와 바닥에 길게 떨어져 있었다.

몰 3층 푸드코트는 이미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요일 상관없이 늘 복잡한 곳이지만, 오늘은 유난히 소리가 크게 느껴졌다. 나는 사람들 틈을 지나 천천히 좌석을 찾았다.

리란은 푸드코트 구석, 창가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단정한 검은색 코트에 머리는 하나로 묶은 모습이었다. 옷가게 사장이지만, 그녀의 옷차림은 늘 편안하면서도 세련됐다. 가게에 있을 때와는 다른 분위기지만, 오늘만큼은 연인으로서 마주하는 시간이어서 그런지 그녀의 표정이 조금 더 부드러웠다.


“왔어?”


그녀가 고개만 들며 말했다.


“응. 많이 기다렸어?”


“아니. 방금 왔어.”


우리는 밥을 주문했고,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잠시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커피잔을 손으로 감싸고 있었고, 나는 젓가락을 정리하며 대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할 말 있다 그랬잖아.”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응.”

“뭔데?”

그녀는 잠시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 너 대학교 안 가기로 했다고 했을 때, 솔직히 조금 놀랐어.”

“왜?”

“네가 항상 남한테 맞춰주던 사람이잖아.
나한테도, 학생들한테도, 동료 선생님들한테도.
근데 어제는…
너답지 않은 선택을 했더라.”


“너답지 않은?”


“응. 네가 하고 싶은 쪽으로 간 거.”


그녀는 눈을 조금 내리깔며 말했다.

“그래서… 미안한데, 나도 그 말 듣고 나서야 하고 싶은 말 하나 생각났어.”

“말해.”


음식이 나오기 전, 그녀는 손을 무릎 위에 두고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장이링이랑 위쉬엔 수업 있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요즘 재미 붙였더라.”


“그거…
좀 더 늘릴 수 있을까?”


그녀의 말투는 조심스럽지만, 명확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물었다.


“왜? 배우고 싶은 게 많아졌나?”

“장이링이… 너한테 많이 빠졌어.”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너 수업 끝나고 가면 항상 그래.
‘엄마, 한국어는 재밌다.’
‘선생님 오늘은 왜 빨리 가?’
‘다음에는 언제 와?’
이런 말 계속해.”


나는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지난 몇 번의 수업은 아이들 장난에 쩔쩔매느라 정신없었고, 때로는 수업 같은 수업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에게는 그것조차 ‘재미’였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가 말은 못 했는데…”

리란은 조금 더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너 그 대학교에 갈까 봐, 괜히 욕심부리는 것처럼 보일까 봐…
말을 못 했어.”


“리란아.”
나는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대학교랑 이건 상관없어.
내가 선택한 건 ‘여기 남는 삶’이야.
그 안에 아이들 수업도 들어가 있고.”


그녀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고백하듯 말을 이었다.


“… 그러면, 한 주에 두 번은 안 될까?”


나는 순간 생각에 잠겼다.
한 주 두 번이면 준비 시간이 두 배가 된다.
H대 수업 준비도 있고, 일반 말하기 반도 있고, 교무실 업무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장 이링이…
요즘 학교에서 조금 지쳤어.
친구들하고도 싸우고,
학교 공부도 재미 없어졌다고 하고.
근데 너 수업은…
엄청 기다리더라.”


그 말은 단순한 부탁이 아니라,
엄마로서 진심을 담은 말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한 뒤, 천천히 말했다.


“음… 한 주에 두 번… 가능해.”


리란 눈이 커졌다.


“정말?”


“응. 근데 조건이 있어.”


“뭔데?”

“이번엔,
나 혼자 만드는 수업이 아니라
너랑 같이 만들기.”

“같이?”

“응. 애들 성향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무슨 게 싫고,
어떤 게 좋고,
어떤 방식이면 집중하고,
어떤 말 하면 도망가고.”


그녀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그건…
나도 좋아.”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대학교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 이 순간에서야
완전히 현실처럼 느껴졌다.

여기서 살아가는 일.
아이들과 함께 있는 일.
그리고 리란과 같이 무언가를 만들어 가는 일.

모든 게 자연스럽게 한 줄로 이어졌다.


“그러면…”

리란이 젓가락을 들며 말했다.
“다음 주부터 일주일 두 번이야?”

“응.
하루는 놀이 위주,
하루는 단어·발음 같은 기본기.”

“애들 좋아하겠다.”

“너도 좋아?”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응.

많이.”


푸드코트 천장 스피커에서 중국어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우리 테이블 주변만은 유난히 조용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남는다는 건,
단지 도시를 선택한 게 아니라
사람을 선택한 거라는 걸.

그리고 그 사람이 지금 바로 내 앞에 있었다.

keyword
월, 수, 금 연재
이전 14화남은 사람의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