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의 여운은 다음 날 아침에도 남아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먼저 떠오른 건 대학교의 메일이 아니라, 전날 밤 리란의 마지막 메시지였다.
“같이 살아보자고 했으면, 이런 얘기도 같이 하는 거지.”
그 문장이 스마트폰 화면 위에서 부드럽게 빛나던 모습이 떠오르며, 나는 베개를 머리 밑으로 밀어 넣고 잠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제는 맘이 뒤틀리지도 않고, 갑자기 무서워지지도 않고, 그저 조금 조용한 안도감이 있었다. 하지만 아침 공기 속에서는 어제와는 다른 종류의 긴장이 다시 느껴졌다. 결정이 끝난 다음에 찾아오는 ‘이제 진짜 시작이네’ 하는 묘한 무게.
그렇다고 나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어딘가 뜨거웠다.
대학 제안을 거절한 자리에,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이 새로 들어앉았다.
이제는 내가 만들어야 하는 시간이 왔다는 뜻이었으니까.
책상 위의 노트북을 켰다. 면접 제의 메일이 없어진 자리에는 공허함이 아니라, 방금 물걸레질한 듯한 정리된 여백이 있었다. 커서를 위아래로 움직여 보며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 진짜 나한테 달린 거네.”
커리큘럼 관련 폴더를 열었다. 어제까지는 망설임 때문에 손가락이 폴더 앞에서 겉돌았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파일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H대 대비반 말하기 교안’,
‘전공별 예상 질문 리스트’,
‘발표 지도 틀’,
‘학생 세부노트’.
이 모든 것들이 갑자기 의미가 더 선명해졌다. 어제까지는 “내일 가르칠 것들”, 오늘부터는 “내가 남아서 만들어갈 것들”.
메일함을 닫고 옷을 챙겨 입은 뒤,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닫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훅 들어왔다. 날씨가 맑았고, 하늘은 겨울과 봄 사이의 중간색을 띄고 있었다. 바람은 살짝 싸늘했지만 기분 나쁘지 않았다. 머릿속의 길들이 한 줄로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학교로 가는 버스는 평소와 다름없이 시끌시끌했다. 사람들의 대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광고, 버스의 진동. 그런데 오늘은 이 모든 게 배경음처럼 흐릿하게 느껴졌다.
자리에 앉자마자, 리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일어났어?”
바로 답장이 왔다.
“응. 가게 정리하는 중.”
그 문장만 봐도 그녀가 어떤 표정인지 알 것 같았다. 회사원이 아닌 상인 특유의 빠른 아침 리듬. 매일같이 옷걸이와 마네킹을 만지고, 가게의 공기부터 정리해야 하루가 시작되는 그녀의 일상.
“오늘 저녁에 가게 가도 돼?”
“응. 와.”
짧지만 분명한 말투.
가끔은 그녀의 이 간단한 말투가 내 마음을 너무 편하게 만들어 버렸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이 몰려왔다.
“선생님! 면접 어땠어요?”
“선생님 한국 진짜 가요?”
루루가 팔을 흔들며 뛰어왔다.
“저 얼마 전에 한국 가봤어요! 선생님 가면 저도 갈래요!!”
나는 웃으며 가방에서 출근카드를 꺼내며 말했다.
“안 가. 안 가기로 했어.”
그 말을 하자 아이들 얼굴에서 귀여운 환호가 터졌다.
“진짜요?!”
“우리랑 계속 있어요?”
“아싸!!!!”
리우위쉬엔이 뒤에서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 다행이다.”
평소 말이 없던 학생에게서 ‘다행이다’라는 말이 나오자 이상하게 마음이 찡했다.
“근데 선생님…”
한 학생이 말을 덧붙였다.
“한국 가는 게 선생님한테 더 좋은 거 아니에요?”
나는 그 학생을 바라보며
“좋은 것도 있는데…
여기서 해야 하는 게 아직 좀 남았어.”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교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래. 아직 여기서 해야 할 게 남아 있다.
첫 교시는 H대 유학 준비반이었다.
학생들 표정은 평소보다 밝았다.
내가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아이들은 긴장이 조금 풀린 듯 보였다.
“자, 오늘은 전공별 질문 다시 한 번 정리하자.”
칠판에 저번 시험에 나왔던 문제의 1번부터 20번까지 번호를 적고, 학생들에게 돌아가며 질문을 읽게 했다.
음악학과 학생은 전공 선택 이유를 제대로 말하지 못했고, 경영학 신청 학생은 ‘시장 분석’이라는 단어 발음에서 계속 말이 꼬였다. 미술 전공을 희망하는 학생은 발표가 너무 짧았고, 마지막 학생은 머릿속에서 문장이 정리가 안 되는지 계속 “음… 그러니까…”만 반복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더 가라앉기보다는 뜨거워졌다.
그래. 떠나기엔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다시. 처음부터.”
내 목소리가 평소보다 약간 단단했다.
20번까지 다 끝나고 나자, 모두 표정이 축 늘어졌다.
하지만 그중 몇 명은 살짝 웃고 있었다.
‘아 이거 진짜 해야 되는구나’ 하고 감이 온 얼굴들.
수업이 끝나고 리우위쉬엔이 조용히 다가왔다.
“선생님… 저 그거… 말하기 녹음했어요.”
그녀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집에서. 근데… 들어봐 주세요.”
아이들은 보통 내가 떠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에 이런 행동을 잘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래. 들어보자.”
우리는 교실 뒤쪽 창가에 앉아서 2분 정도 되는 녹음을 함께 들었다.
마지막 문장에서 그녀가 살짝 떨리는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저, 할 수 있을까요?”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할 수 있어.
그리고… 내가 있을 거야.
끝까지.”
그 말은 학생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정오가 지나고, 햇빛이 교실 가득 들어올 무렵, 나는 조용히 복도를 걸었다. 창문 너머로 광장이 보였고, 먼지처럼 작은 햇빛 조각들이 교실 바닥을 흩날리고 있었다.
그 순간, 문득 10년 전 처음 왔던 칭다오의 냄새가 떠올랐다. 익숙함과 낯섦이 묘하게 섞여 있던 거리, 좁은 골목, 아무도 모르는 이름이 적힌 한자 간판, 그리고 이 빌딩으로 이사오기 전 어학원의 건물 2층의 비좁은 강의실. 그곳에서 나는 몇 줄도 안 되는 처음 수업을 만들어 놓고 떨면서 학생들을 기다렸었다.
그때 버티지 않았으면, 지금 여기 없었겠지.
그 생각이 들자 어딘가 뜨겁고 묵직한 공기가 가슴 안쪽에서 올라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어제 리란이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어차피 어디에 있어도 후회할 거면,
네가 감당할 수 있는 후회를 선택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 말은 하루가 지나도 여전히 심장 아래쪽에서 기척을 하고 있었다.
퇴근 무렵,
가게로 가기 전에 잠시 태평각 근처를 걸었다.
바람은 차갑지 않았지만, 바다 냄새가 약하게 섞여 있었다.
석양 속에서 어제의 결정이 다시 한 번 떠올랐고, 그 결정을 한 ‘나’라는 사람이 이전보다 조금은 단단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가게에 도착했을 때, 리란은 계산대 앞에서 매출 정리를 하고 있었다.
쇼윈도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옆모습이 지나치게 평온해 보여서인지,
나는 괜히 마음속이 울컥해졌다.
문을 열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왔어?”
“응.”
“밥 먹었어?”
“아직.”
“그럼 이따가 같이 먹자.”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장부를 넘겼다.
나는 마네킹 옆에 기대어 서서 그녀가 장부를 정리하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슬며시 말을 꺼냈다.
“나 오늘…”
“응.”
“애들한테 말했어. 한국 안 가는 거.”
“뭐래?”
“다들 좋아하더라.”
“그렇겠지.”
“너는?”
그 질문에 그녀 손이 잠시 멈췄다.
“나?”
“응.”
그녀는 고개를 든 채 나를 바라보더니
말끝을 아주 조금 떨며 대답했다.
“좋지…
좋지, 당연히.”
말투는 조용했지만,
두 번 반복한 ‘좋지’에는 여러 감정이 겹쳐 있었다.
기쁨, 안도, 약간의 불안,
그리고 분명한 애정.
나는 괜히 발끝으로 바닥을 쿵 눌렀다.
“리란아.”
“응?”
“나 잘한 거 맞지?”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며 말했다.
“응.
잘했어.”
그 말은 어제보다 더 따뜻했다.
어제는 ‘결정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 같았다면,
오늘은 ‘같이 가자는 사람에게 보내는 확신’ 같았다.
우리는 밥을 먹고, 문을 닫은 상가를 같이 걸어 나왔다.
저녁바람이 천천히 불었고, 상가 유리창들에 비치는 우리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란히 흔들렸다.
“근데…”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너, 내일은 좀 쉬어도 돼.”
“왜? 피곤해 보여?”
“그렇다기보단…” 그녀는 눈을 돌렸다.
“어제는 네가 ‘결정하는 날’이었고, 오늘은 ‘시작하는 날’이잖아.
이틀 연속으로 마음 쓰면… 좀 지칠 수도 있지.”
“괜찮아.”
“괜찮기는. 너 얼굴 다 들켰어.”
“내 얼굴이 어때서.”
“오늘 너… 나 보자마자 숨 조금 떨렸어.”
나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알지.
사귀기로 했는데… 그런 것도 모르면 이상하지.”
그녀의 말은 평범한 문장인데도,
내 마음에 나직하게 스며들었다.
“내일은…”
그녀가 살짝 걸음을 늦추며 말했다.
“점심때 잠깐 시간 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돼.”
“그럼 애들 점심시간에 잠깐 나와.
할 말 있어.”
“뭔데?”
“내일 말할래.”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특별한 느낌을 남겼다.
무언가 시작되기 전,
아주 작은 균열과 설렘이 동시에 일어나는 미소였다.
집에 돌아오는 길,
문득 마음 한쪽에서 또 다른 파문이 일었다.
‘할 말’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자꾸 굴러다녔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짧게 메시지를 보냈다.
“무슨 말인데? 힌트라도 줘.”
그녀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5분 뒤에 도착한 메시지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알면 잠 못 자.
내일 말할게.”
문장을 읽는 순간,
심장이 조용히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 말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어제와 오늘, 마음은 안정되었지만
인생은 항상 다음 페이지에서 새로운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칭다오에 남기로 한 결정은
단지 과거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이제 시작될 ‘또 다른 무언가’를 위한 선택이라는 것.
그리고 내일,
리란이 하려는 그 말이
아마 그 시작의 첫 단서가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