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늘 학생들에게 주던 시간이었다.
“이번 일주일 안에 자기소개 문장 완성해 오세요.”,
“이번 주 안에 듣기 스크립트 세 번은 더 읽어 와요.”
같은 말들을 하며, 나는 아이들에게 늘 작은 데드라인을 던졌다. 그런데 이제, 누군가가 나에게 일주일짜리 숙제를 내준 셈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올 것인가, 이 도시에 남을 것인가. 정답은 없는데, 결과는 분명하게 갈라지는 문제.
노트북을 덮고 가방을 들었다. 학교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창밖을 멍하니 보다가, 불쑥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친구들 단체톡방은 열지 못하고, 몇 년 동안 꾸준히 연락을 이어 오던 한 친구에게만 메시지를 보냈다.
“야, 그때 말했던 데서 진짜 연락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답이 돌아왔다.
“그 학교?”
“응.”
또다시 몇 초 뒤,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버스 안이라 받지 않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대신,
“지금 버스. 저녁에 전화할게.”
라고 보내고 화면을 껐다.
하지만 그때부터였다. 머릿속에서 온갖 문장들이 다시 달리기 시작한 건.
수업이 있는 오전 내내 아이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면서도, 그 얼굴들 뒤에 한국이라는 단어가 희미하게 겹쳐졌다. 말하기 질문을 읽어 주다가도, 문득 ‘이 질문을 한국 대학 강의실에서 읽고 있으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생각이 스쳤고, 아이들이 “선생님, 이 표현 자연스러워요?” 하고 물을 때마다 ‘내가 여기 없는 날이 온다면, 이 질문은 누구에게 가게 될까’ 하는 생뚱맞은 문장이 끼어들었다. 칠판에 글씨를 쓰면서 내 글씨를 유심히 보게 된 것도 오랜만이었다.
정말, 떠날 수도 있는 건가?
점심시간이 되자, 나는 일부러 사람들 많은 식당 대신 1층의 편의점 옆에서 산 삼각김밥과 따뜻한 캔커피로 대충 끼니를 때웠다. 김밥을 반쯤 먹었을 때, 주머니 안 휴대폰이 진동했다. 한국 친구였다.
“태겸, 진짜냐? 한국에서?”
“응, 국제교육원.”
“와… 이건 그냥 가야 되는 거 아니냐?”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는 숨을 고를 겨를도 없이 말을 쏟아냈다.
“야, 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비자 연장 걱정하면서 살고 있어. 4대 보험, 연금, 의료보험, 대학 이름. 이 정도 조건 나오면, 그냥 고맙습니다 하고 가는 거지. 거기서 십 년 넘게 버텼으면 할 만큼 했다.”
나는 캔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가, 조용히 물었다.
“근데… 나 여기 떠나면, 애들은 누가 봐?”
“애들? 새로운 선생님 오겠지. 걔네도 금방 적응해. 너도 알잖아. 너도 옛날에 다른 데서 애들 두고 나왔잖아. 그 애들 지금 뭐 하고 사는지 다 알지도 못하면서.”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이번에 떠난다면, 단지 직장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쌓아온 십 년짜리 공기, 알게 모르게 나를 만들어 준 얼굴들을 한꺼번에 떼어내는 일이 될 것 같았다.
“집이랑 연금이… 중요한 건 알겠는데 말이지.”
내가 한숨 섞인 소리로 말을 흐리자, 친구가 단호하게 잘랐다.
“중요한 게 아니라, 필수야. 우리는 이제 예쁘게 사는 나이가 아니라, 버틸 준비하는 나이라고. 형, 나도 네가 여기 오면 솔직히 이야기할 친구가 있어서 재미있을 것 같고. 이 정도 기회 또 안 올 수도 있다.”
전화는 그렇게 끝났다. 머리로만 생각하면, 그의 말이 백 번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은 고개를 쉽게 끄덕이지 않았다.
오후 수업이 끝나고 나서야 잠깐 숨 돌릴 틈이 생겼다. 교실 창가에 기대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체육복 같은 교복을 입고 까르르 웃으며 지나가는 학생들, 맞은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는지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들. 하찮은 장면이었는데, 이상하게 그 상황이 나와 같았다. 갑자기 일어나 마음을 흔드는... 그 무언가. 난 지금 어느 쪽으로 가는 것일까.
그렇게 하루를 버티고 나니,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상가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리란의 옷가게가 있는 복도는 저녁이면 늘 비슷한 빛을 띠었다. 매장 안 형광등과 쇼윈도 밖 네온사인이 섞여, 하얗지도 노랗지도 않은 어중간한 색의 공기가 떠다녔다.
가게 앞에 도착했을 때, 옷걸이 사이로 리란의 뒷모습이 보였다. 새로 들어온 봄 코트를 증기에 쐬며 다림질하고 있었다. 옷걸이에 걸린 트렌치코트와 블라우스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마네킹은 오늘도 무표정한 얼굴로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란!”
리란이 고개를 돌렸다.
“왔어?”
그 말투에는 예전의 낯섦과, 요즘의 친밀함이 함께 섞여 있었다.
“응.”
“오늘 수업은?”
“똑같지 뭐.”
나는 대답하면서도,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가게 안을 한 바퀴 둘러보는 척했다. 새로 입혀진 마네킹 옷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 새로 들어온 거야?”
“응. 봄이니까. 밝은 색 좀 넣어 보려고.”
대답을 끝낸 그녀가 내 표정을 한 번 훑어보더니 다림질을 멈췄다. 스팀 다리미에서 피어오르던 김이 잠시 허공에서 흔들리다가 사라졌다.
“너, 얼굴 왜 그래?”
“내 얼굴이 어때서.”
“뭔가… 괜히 착한 척하다가 혼자 손해 본 사람 얼굴?”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늘 이렇게 말했다. 농담 같은 말로 정곡을 찌르는 버릇.
“한국에서 메일 온 거 말이야...”
내가 조용히 말하자, 그녀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결과?”
“응. 계속 생각 중인데 말이야...”
“그렇구나…”
거기까지 말하고,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마네킹 옆 스툴에 앉았다. 옷걸이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어디서 오는지 모르게 나오는 약한 바람 소리만 가게 안을 채우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리란이 입을 열었다.
“기분은?”
“몰라. 그냥… 속이 조금 비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무게가 확 실린 것 같기도 하고. 둘 다.”
“한국 친구들은 뭐래?”
“다 가래. 지금 안 가면 바본가 이런 느낌으로.”
리란이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그럴 수 있겠다.”
그녀는 내 쪽으로 걸어와 옆에 앉지 않고, 매대 앞에 팔짱을 낀 채 서서 나를 내려다봤다. 매장 조명이 위에서 떨어져 그녀의 머리카락이 부분적으로 밝게 빛났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어?”
입 밖으로 그 말이 나온 순간, 내가 내 말에 놀랐다. 답을 정해 달라 는 뜻으로 들릴까 봐, 원래라면 삼켰을 문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에게만큼은 그 약한 목소리를 숨기고 싶지 않았다.
“진짜로 내가 대답해?”
“응.”
리란이 잠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꾸밈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면, 네가 편해질 것 같기는 해. 비자도 그렇고, 나중에 연금이나 집이나… 그런 거 생각하면.
근데…”
그녀는 조금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네가 가는 게, ‘네가 원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느낌’이라기보다는… 그냥 ‘여기 힘드니까 나가야겠다’에 조금 더 가까운 것처럼 보여.”
그 말은, 아프게 정확했다. 부산이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에 떠오를 때, 그곳이 꿈꾸던 도시라기보다는 ‘여기가 너무 버거울 때 도착할 수 있는 안전지대’처럼 느껴졌으니까.
“근데 내가 제일 신경 쓰이는 건 그거야.”
“뭔데?”
“네가 나중에 한국 가서, 거기 대학 복도 걸어 다니면서, 내내 ‘그때 그냥 한 번 더 버텨볼 걸’ 이런 생각하면서 살까 봐. 그건… 조금 슬프다.”
“그럼… 남으라는 거야?”
내가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나 때문에 남으면 안 돼. 그건 더 최악이야. 나중에 뭐라도 안 풀리면, 마음속에서 날 조금씩 탓하게 돼.”
“내가 언제 그래.”
“사람은 다 그래.”
리란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솔직해질게.
나는 네가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
근데 그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
여기서 네가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네가 만들고 싶은 게 있어서 남는 거라면, 그때는… 옆에서 그냥 같이 버텨 줄 수 있을 것 같아.”
그 말을 듣는 동안, 내 안에서 뭔가가 조금씩 제 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이기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잡지도 않았고, 밀어내지도 않았다. 대신, 내가 내 발로 설 수 있는 자리를 가리켜 주고 있었다.
“나, 요즘 그런 생각했어.”
내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 유학 준비하는 애들 있잖아. H대 시험 준비하는 애들도 그렇고.
지금은 그냥 시험 앞두고 말하기 질문 외우고, 자기소개서 문장 다듬고… 거기까지만 도와주고 있잖아.
근데 이걸 조금 더 넓힐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냥 점수 따는 수업 말고, 한국 가서 대학 강의 듣기 전에 미리 리허설하는 프로그램 같은 거.
입학 전 기초 세미나처럼. 생활 한국어 말고, 학과 수업에서 쓰는 표현, 교수 메일 쓰는 법, 발표 연습, 이런 거.”
말을 하다 보니, 며칠 전부터 머릿속에서만 빙빙 돌던 그림들이 입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노트북을 두들기며 발표 스크립트를 만들고, 친구 앞에서 발표하고, 나는 뒤에서 발음과 표현, 구조를 함께 잡아 주는 모습. 지금 하고 있는 수업들을 하나로 묶어 한 단계 더 밀어 올리는 느낌.
“그런 거… 여기서 네가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리란이 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한국으로 가면 더 쉽게 만들 수 있을 거야.
이름 있는 대학이고, 공간도 있고, 동료도 있고.
근데 그러면 그건 ‘그 학교 프로그램’이 되는 거지,
내가 여기서 십 년 동안 애들 붙잡고 버티면서 느꼈던 것들이 녹아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말하기는… 잘 모르겠더라고.”
“그러니까,
여기서 해보고 싶다?”
내가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리란이 아주 미세하게 웃음을 지었다.
“이제 좀 네 말 같네.”
“무슨 말?”
“조금 전까지는…
한국 얘기하면서도 계속 여기 애들 이야기만 했잖아.
근데 지금은, 조금…
‘내가 뭘 만들고 싶은지’ 이야기 같아서.”
그녀는 옷걸이에 걸린 셔츠 하나를 슬쩍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그거면 된 거 같아.
그 정도 말이 나왔으면,
네 마음은 아직 여기인 거지.”
나는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꼭 쥐었다 폈다.
“그래도… 겁나긴 해.”
“뭐가?”
“나중에 진짜 힘들어졌을 때, 그때 이 결정 후회하면 어떡하나.
한국 갔으면, 최소한 비자 걱정은 안 했을 거 아니야.
병원 가는 거, 늙어서 뭐 먹고 사는 거. 그런 거.”
리란이 내 옆으로 걸어와, 이번에는 애매하게 거리를 두지 않고 내 옆에 툭 앉았다. 옷걸이에 걸린 코트들이 우리 위로 작은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그건…
한국 가도 똑같을걸?”
“뭐가?”
“거기서도 힘들 거야.
그냥 힘든 모양이 조금 다른 거지.
여기서는 비자랑 돈이 걱정이고,
거기 가면 또 거기 나름의 걱정이 생겨.
어디 가도 완벽한 데는 없잖아.”
그녀는 내 팔꿈치에 살짝 어깨를 기대며, 목소리를 낮췄다.
“어차피 어디에 있어도 후회할 거면,
네가 ‘그래도 잘했다’고 말해 줄 수 있는 후회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건… 네가 제일 잘 알겠지만.”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어젯밤 노트에 적은 문장이 떠올랐다.
떠나도 후회, 남아도 후회라면, 어느 쪽 후회를 내가 더 감당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의 답이 천천히 형태를 갖추는 느낌이었다. 한국으로 떠났을 때의 후회와, 여기 남았을 때의 후회를 하나씩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부산의 겨울 바다를 보며, “그때 조금만 더 버텨볼 걸” 하고 중얼거리는 내 모습과, 칭다오의 바람을 맞으며, “그때 한국 갔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는 내 모습. 둘 다 씁쓸했지만, 앞쪽 그림이 조금 더 찬 기운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나…”
나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이번에는,
여기 남는 후회를 해보고 싶어.”
리란이 따로 놀던 시선을 돌려 내 얼굴을 봤다.
“진짜?”
“응.
한국 가는 건,
나중에라도… 완전히 막히진 않을지도 모르잖아.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는 아닐 수도 있고.
근데, 여기는…
지금 이 시기 말고는 못 만들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나는 가게 유리 너머로 보이는 다 닫힌 셔터들, 밤마다 불이 꺼졌다 켜지는 상가의 공기, 학교 복도 끝 창문으로 보이던 겨울바다까지 한꺼번에 떠올렸다
“여기서 십 년 버틴 게…
그냥 괜찮은 외국인 강사로 남는 걸로 끝나는 건 싫어.
적어도 ‘이 사람 때문에 뭔가가 좀 달라졌다’는 것 하나는 만들고 싶어.
그게 애들이든, 커리큘럼이든, 유학 준비 시스템이든.”
말을 다 하고 나니, 숨이 조금 가빴다.
리란은 한참을 나를 보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 말이면…
나는 충분한 이유 같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너 답잖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거리에 사람 발소리가 지나갔다가 멀어졌다. 쇼핑몰 천장 스피커에서 흐릿한 음악이 흘러나왔다가, 찢어진 듯 끊기고, 다시 이어졌다. 가게 밖 풍경은 늘 그렇듯 별일 없는 저녁이었는데, 나에게는 오래 머뭇거리던 문 하나가 조금씩 열리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럼… 나, 한국 안 갈게.”
내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이상하게도 뇌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어깨에서 힘이 빠지고, 허벅지 근육이 느슨해지고, 그동안 알게 모르게 위로 치켜들려 있던 가슴이 조금 아래로 내려앉았다. 단단하게 죄어 있던 끈을 하나 풀어 놓은 느낌.
“그래?”
리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떨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번에는…
남기로 했어.”
그녀는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숨을 한 번 내쉬더니, 고개를 떨구었다가 다시 들고 말했다.
“고마워.”
“뭐가.”
“그냥…
고마워.”
그 말에는 여러 개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나를 위해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한 고마움, 이 도시를 쉽게 버리지 않는 것에 대한 안도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채 떠나지 않은 사람으로 남지 않는 것에 대한 안도. 그 모든 게 묵직하게 와닿았다.
“근데 있잖아.”
리란이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이제부터 힘들다고 맨날 한국 생각하면 안 돼.”
“왜.”
“그러면 그때부터는 도망이거든.”
나는 웃었다.
“알겠어.
한국은…
나중에 여행으로 함 가보지 뭐.”
“그래.
장 이링 데리고. 그 대학교 가서
‘여기가 선생님이 갈 뻔했던 대학교다’ 이렇게 설명해 주면 되겠다.”
“그때 넌?”
“나도 가야지.
애들 둘 데리고.”
“둘?”
“장이링이랑… 너.”
그녀는 그 말만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은 평소처럼 덤덤한데, 귀 끝이 조금 빨개져 있는 건 내 눈에도 보였다. 나는 괜히 구두 끝을 쳐다보며 입가를 다물었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는 듯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알았어.
그럼…
한국은 우리 가족 여행지로 남겨 두자.”
그 말은, 우리 둘 모두에게 조금 이른 말이었지만, 그만큼 오래 함께 가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리란은 따로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옷걸이에 걸린 원피스를 괜히 한 번 더 매만지는 손끝에 힘이 들어가는 모습이 내게는 충분한 답처럼 보였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방 안 공기가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노트북을 다시 켰다. 한국에서 온 메일이 여전히 받은 편지함 맨 위에 떠 있었다. 손가락으로 그 줄을 클릭하자, 아까 읽었던 내용이 그대로 다시 펼쳐졌다.
이번에는 오래 읽지 않았다. 문장 몇 줄만 훑고, 바로 ‘답장’ 버튼을 눌렀다. 새 메일 창이 뜨고, 상단에 “To: ○○대학교 국제교육원”이라는 주소가 자동으로 채워졌다. 커서가 흰 화면 위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타이핑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칭다오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이태겸입니다.”
첫 문장을 적고 나서, 손목을 한 번 돌렸다. 그다음에는 생각을 멈추지 않고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먼저, 바쁘신 중에도 제 경력과 상황을 검토하시고, 인터뷰를 통해 긍정적인 제안을 보내주신 점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국으로 돌아가 조금 더 안정적인 조건에서 한국어 교육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점은 분명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인터뷰 이후 여러 날 동안 신중히 고민하였습니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다만, 지금 이 시점에서 제가 이 제안을 수락하는 것이 ‘새로운 도전을 향한 선택’이라기보다는, 현재의 어려움으로부터 잠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조금 더 가깝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나는 잠시 손을 멈추고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도망’이라는 단어를 적을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공식적인 메일에는 그대로 쓰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이 정도 표현이면 내 마음은 충분히 담긴 것 같았다.
“현재 저는 칭다오에서 유학 준비반과 교내 한국어 시험 준비 수업을 맡고 있으며, 이 과정 속에서 중국 학생들이 한국 유학을 준비하면서 겪는 여러 시행착오와 어려움들을 조금 더 체계적으로 돕는 프로그램을 만들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제안을 통해 오히려, 제가 지금 있는 자리에서 무엇을 더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문장을 이어 쓰면서,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조금씩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머릿속에 흐릿하게 떠 있던 지도가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는 것 같았다.
“그런 이유로 인해, 여러모로 아까운 기회임을 알면서도 이번에는 귀교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들께서 제 경력을 신뢰해 주시고 소중한 자리를 제안해 주신 점에 대해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언젠가 제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시점에 다시 한번 인연이 닿을 수 있기를 조심스럽게 바라봅니다.”
마지막 인사를 적고, 이름을 쓰기 직전에 나는 손을 멈추었다.
정말 이대로 보내도 될까.
그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부산의 겨울 바다, 안정적인 월급, 건강보험, 연구실, 그런 단어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가, 곧장 상가 복도, 리란의 가게, 아이들이 떠드는 교실, H대 인터뷰에 떨던 학생들의 얼굴이 겹쳐 올라왔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내 삶의 사진첩은 전혀 다른 이미지들로 채워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어떤 사진이 더 화려한가 보다 ‘어떤 사진을 보면서 내가 덜 우울하고 덜 비겁해질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고 싶었다.
나는 마지막 줄을 덧붙였다.
“칭다오에서,
이태겸 드림.”
커서를 ‘보내기’ 버튼 위로 가져갔다. 손가락이 아주 조금 떨렸다.
“이번엔… 도망 아니야.”
나에게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해 주고, 버튼을 눌렀다. 하얀 화살표가 짧은 선을 그리며 오른쪽으로 사라졌다. 메일함 화면이 다시 정지된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방 안은 샤워 후 남은 약간의 습기와, 오래된 나무 바닥 냄새, 그리고 이제 막 하나의 가능성을 날려 보낸 사람의 숨소리로 가득했다.
휴대폰을 집어 들어, 리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아까 말한 대로… 진짜로 메일 보냈어.”
답장은 금방 왔다.
“잘했어.”
딱 두 글자짜리 반말이었다.
그런데 그 두 글자가, 아무 설명도 없이 내 선택을 통째로 안아 주는 느낌이 들었다.
“너한테 자꾸 확인받으려고 해서 미안하다.”
내가 그렇게 보내자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인 뒤에 답장을 보냈다.
“괜찮아.
같이 살아보자고 했으면,
이런 얘기도 같이 하는 거지.”
‘같이 살아보자’라는 단어가 화면 위에서 작게 반짝였다. 우리는 아직 결혼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적도 없지만, 이미 서로의 하루와 고민을 나누는 일이 자연스러워진 사람들처럼 그렇게 문장을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불을 껐다. 방 안이 금세 어두워졌다. 하지만 어둠이 무섭지 않았다. 창틀 사이로 아주 희미한 도시 불빛이 들어와 방 안 윤곽을 살짝 드러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자, 문득 태평각에서 보던 바다가 떠올랐다. 한국의 바다가 아니라, 이 도시의 바다였다.
언젠가, 정말 언젠가, 다른 제안이 또 올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지금보다 나를 조금 더 잘 아는 사람이 되어 있기를 바랐다. 어디로 가든, 남든 떠나든, 그때는 더 이상 도망치는 사람의 표정으로 결정하지 않기를.
오늘 하루의 결론은 단순했다.
나는, 남기로 했다.
이 도시와, 이 거리와, 이 옷가게와, 이 교실들과, 그리고 이 사람과 함께.
그 생각을 가슴 깊이 밀어 넣고 나니, 오랜만에 잠이 빨리 왔다.
결정을 내린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단단하고도 조용한 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