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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결심

by leolee


잠들지 못한 밤이 끝나갈 무렵, 창문 틈으로 아주 얇은 빛이 들어왔다.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차라리 다행으로 느껴졌다.
밤엔 생각이 나를 물었지만, 아침엔 내가 생각을 움직일 수 있었다.


물 끓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컵에 뜨거운 물을 붓고 티백을 넣었다가, 다시 빼고, 찻물 위로 김이 올라가는 걸 한참 바라봤다.
휴대폰 화면은 새벽 6시 12분. 메시지 앱을 열었다가 닫았다.
한국 친구들의 “집 샀다, 승진했다, 차 바꾼다”는 어젯밤 문장들이 아직 알림창 근처에 맴돌았다.
나는 그 창을 왼쪽으로 밀어 임시로 가려두고, 대신 메모장을 열었다.


제목: 오늘의 결심.


멈추지만 않기.

남에게 주는 시간과 나에게 주는 시간을 분리하기.

돈: 오늘부터 ‘나를 위한 1’ 봉투 시작.

수업: 아이들(장이링/리우위쉬엔) ㄹ-ㄴ 경계, 놀이 2개만.

리란: 어젯밤의 마음, 말로 옮길 수 있을 만큼만.


글머리표를 다섯 개 적는 데 3분, 마지막 점을 찍는 데 1분이 더 걸렸다.
컵을 들어 첫 모금을 넘길 때, 비로소 속이 따뜻해졌다. 어젯밤의 공허가 물처럼 천천히 가라앉았다.


책상으로 돌아와 노트를 펼쳤다. 맨 앞 장에 굵게 썼다.


“모두가 같은 길을 걷지 않아도 된다. 다만, 멈추지 말 것.”


그 아래에 오늘의 스케줄을 적었다. 오전 9시 H대 면접반, 11시 발음 클리닉, 오후 3시 두 아이 수업(카페), 저녁엔 수업 준비 겸 개인 시간 1시간.
“개인 시간” 네 글자를 한 번 더 동그라미 쳐두었다. 주황색 펜으로.


학교로 가는 길, 태평각 언덕 아래로 조용한 바람이 흘렀다.
슈퍼 앞에서 쩐빙궈즈를 굽는 사장님이 익숙하게 눈인사를 건넸다.

“선생님, 오늘은 달걀 두 개?”
“오늘은 하나만요. 대신 파 조금 더.”
사장님이 웃었다. “파는 서비스.”
받은 종이봉투를 들고 천천히 걸었다. 아주 오래전, 여행비자 한 장으로 버티던 시절이 순간 번졌다가 사라졌다.
그때의 허기와 지금의 허기는 종류가 달랐다.
예전엔 배가 고팠고, 지금은 마음이 고팠다.
그래도 둘 다, 따뜻한 무언가를 입에 넣으면 잠시 조용해졌다.


교실 문을 열자, 면접반 아이들이 소음 같은 웃음을 멈추고 일어섰다.
“선생님, 오늘 질문 어려워요?”
“어제보다 조금 어렵고, 내일보다 쉽다.”
익숙한 농담으로 긴장을 풀고, 칠판에 크게 세 단어를 썼다.


“죄송하지만 한 번만 더 말씀해 주세요.”


“조금 천천히 부탁합니다.”


“제가 이해한 게 맞는지 확인해도 될까요?”



오늘의 승리 문장들이야. 이 세 문장만 정확히 말해도 절반은 이겨.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누군가 작은 소리로 따라 했다. “죄송하지만… 한 번만 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의 리듬이 잡히면, 마음의 호흡도 따라온다.


수업이 끝나고, 복도 끝 창틀에 팔꿈치를 걸고 잠시 바깥을 봤다.
‘남에게 퍼주기만 한 건 아닐까’ 어젯밤의 질문이 다시 떠올라, 그대로 입술을 깨물었다.
“퍼준다”는 말은 쉽게 비극으로 미끄러지지만, 내가 실제로 한 일들의 얼굴을 가만히 떠올려 보면 그건 꼭 ‘퍼줌’만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문장 하나가 다듬어질 때, 누군가의 표정 하나가 바뀔 때, 내 안에서도 조용히 무언가가 채워졌다.
문제는 ‘계속 주기만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줄 것인가’였다.
그리고 ‘나에게도 줄 것인가’.


나는 재빨리 메모장에 작은 규칙을 추가했다.


1:1 시간 규칙 — 남에게 1시간 주면, 나에게도 1시간 준다.
(밤 10시 이후엔 메시지 답장 금지.)


적고 나니 숨이 조금 더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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