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못해도 말해야 했던 하루

by leolee

D대학 면접 메일은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다.

면접 3일 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면접 안내’라기보다는 ‘면접 준비 지침’에 가까운 메일이었다. 전공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질문 스무 개가 정리된 PDF 파일이 첨부되어 있었고, 면접 당일에는 이 질문들 중 일부가 무작위로 선택되어 나온다는 설명이 덧붙어 있었다. 형식만 놓고 보면 친절한 방식이었다. 미리 범위를 알려주고, 준비할 시간을 주는 구조. 하지만 그 메일을 열어본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학생에게는 이 친절함이 오히려 더 잔인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걸.


학생은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우스를 쥔 손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질문 하나를 읽으려다 말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입술이 조금씩 움직였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속으로 읽고 있는 게 아니라, 소리를 내지 못해 멈춰 있는 모습에 가까웠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역시 쉽지 않겠구나’라는 생각과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질문은 어렵지 않았다. 전공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묻는 질문, 고등학교 시절의 활동, 관심 있는 분야, 앞으로의 계획. 어느 하나 터무니없는 건 없었다. 문제는 질문의 내용이 아니라, 질문이 문장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학생에게 문장은 늘 벽처럼 서 있었다. 단어 하나하나는 아는데, 그것들이 이어지는 순간 길을 잃었다.


우리는 일단 질문과 답을 같이 만들어보기로 했다. 질문 하나를 놓고, “이건 이런 걸 묻는 거야”라고 설명하고, 학생이 이해했는지 확인한 뒤 대답을 정리했다. 학생은 이해했다. 정말로 이해했다. 고개도 끄덕였고, 자기 말로도 설명했다. 그런데 그걸 글로 적어 놓고 다시 보자, 상황은 달라졌다. 읽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고, 중간중간 멈췄다. 문장을 끝까지 읽고 나면, 앞부분의 의미가 이미 흐려져 있었다.


그날 우리는 질문 스무 개 중 세 개밖에 넘기지 못했다. 수업이 끝났을 때, 학생의 표정에는 피로보다 좌절이 더 많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 표정을 보고, 이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문제는,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남아 있느냐였다.

학교의 다른 선생님들이 했던 말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이건 너무 힘들다.” “지금 단계가 아니다.” “괜히 상처만 받을 수 있다.” 그 말들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말들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못했다. 이 학생은 대답을 못 하는 게 아니라, 대답을 꺼내는 통로가 막혀 있는 상태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계속 같은 질문을 되뇌었다.
‘이 학생은 정말 안 되는 걸까, 아니면 아직 맞는 방법을 못 찾은 걸까.’

그 질문을 붙잡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어의 성질로 생각이 옮겨갔다. 한국어는 소리글자다. 뜻을 몰라도, 소리만 맞으면 어느 정도 전달된다. 반면 중국어는 뜻글자다. 글자를 모르면 아예 접근이 안 된다. 이 학생은 한국어를 중국어처럼 접근하려다 계속 막히고 있었다. 그렇다면 완전히 반대로 가야 하지 않을까. 뜻을 버리고, 소리만 붙잡는 방식으로.

그때 떠오른 게 谐音 표기법이었다. 뜻은 전혀 맞지 않지만, 소리가 비슷한 한자를 가져와 발음을 기록하는 방식. 보통은 농담처럼 쓰이거나, 장난스러운 표현으로 사용되지만, 발음을 기억하는 데에는 탁월하다. 이상하고, 정석도 아니고, 시험 준비 방법으로는 추천받기 어려운 방식. 하지만 이 학생에게는, 그 이상함이 오히려 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수업 시간, 나는 학생에게 그 방법을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학생은 처음엔 웃었다. “이상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상해.” 그러고 나서 덧붙였다. “근데 읽을 수는 있어.” 그 말에 학생의 표정이 바뀌었다. ‘읽을 수 있다’는 말은, 그에게 거의 희망에 가까운 말이었다.

우리는 질문을 다시 꺼냈다. 이번에는 답을 먼저 내가 천천히 읽어주었다. 학생은 그 소리를 듣고, 뜻은 생각하지 않고 소리만 따라 한자를 적었다. 문장은 점점 기묘해졌다. 뜻도 없고, 문법도 없고, 한자를 아는 사람이 보면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는 문장들. 하지만 그걸 소리 내어 읽으면, 분명히 한국어였다.

질문은 전부 외우지 않기로 했다. 대신 질문마다 핵심 단어 하나만 정했다. 그 단어를 谐音 표기법으로 적어 외우고, 그 소리가 들리면 준비한 답 전체를 꺼내는 방식. 질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질문을 알아차릴 수만 있으면 대답할 수 있는 구조였다.

연습을 반복할수록, 학생의 반응 속도는 눈에 띄게 빨라졌다. 읽지 않아도 됐고, 뜻을 해석하지 않아도 됐다. 들리는 소리를 바로 기억과 연결하면 됐다. 대신 억양은 조금 이상했다. 성조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발음은 맞는데, 리듬이 낯설었다. 나는 그걸 고치려다 멈췄다. 지금은 완벽함보다, 끊기지 않는 대답이 더 중요했다.

면접은 일요일이었다. 장소는 학교의 빈 교실. 평소에는 아무도 쓰지 않는 공간이었다. 책상 몇 개, 노트북 하나, 이어폰 하나. 온라인 ZOOM 면접이라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이 학생에게는 다행처럼 느껴졌다. 큰 공간, 많은 사람들, 시선들. 그런 것들이 모두 사라진 상태였으니까.

면접이 시작되고, 질문이 나왔다. 다행히 준비했던 질문들이었다. 학생은 핵심 단어를 놓치지 않았다. 그 단어가 들리자마자, 준비한 답을 바로 꺼냈다. 억양은 여전히 조금 어색했지만, 문장은 끊기지 않았다. 반응 속도는 빠르다 못해 놀라울 정도였다. 면접관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장면이 화면 너머로 보였다.

면접이 끝났을 때, 학생은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의자에 몸을 깊게 기대고, 숨을 고르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다 말했어요.”


그 말에는 안도와 믿기지 않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모든 선생님이 포기했던 학생.
글자를 읽지 못해, 시험 자체가 무리라고 평가받았던 학생.
그 학생은 그날, 자기 방식으로 끝까지 말했다.

이제 남은 건 결과였다.
합격인지, 불합격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날 빈 교실에서, 나는 분명히 느꼈다.
이상해 보이더라도, 정석이 아니더라도,
말할 수 있는 길을 끝까지 같이 찾았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의 결과라는 걸.

결과는 곧 나온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이든,
나는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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