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하다는 핑계, 익명이라는 면허

by leolee

나는 “한국인의 본성”이라는 말을 쉽게 꺼내는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단어는 너무 큰 칼이라서, 한 번 휘두르면 사람을 설명하기보다 판결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칼을 손에 쥐고 싶어진다. 이유는 단순하다. 어떤 장면들이 너무 자주 반복되기 때문이다. 너무 자주 반복되면, 사람들은 습관을 본성으로 착각한다. 그리고 그 착각은 결국,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만들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게 만들고, 내가 책임지고 싶지 않은 것까지 “원래 그렇다”로 밀어붙이게 만든다. 나는 그 위험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글을 쓰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한국인이고, 그 반복되는 장면들 속에서 가끔씩 내 얼굴을 보기 때문이다. 남의 성공을 보며 진심으로 기뻐하기 전에 먼저 올라오는 불편함, 누군가가 주목받는 순간 그것이 과장인지 허세인지 꼬투리를 찾고 싶은 마음, 누군가가 실수하는 순간 “거 봐”라는 말을 속으로 먼저 떠올리는 마음. 그런 마음이 올라올 때, 나는 나 자신에게 묻게 된다. 이게 정말 피의 문제인가, 아니면 내가 길들여진 방식의 문제인가.

우리는 한때 스스로를 단결하는 민족이라고 믿었던 적이 있다. 그 믿음은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다. 실제로 한국 사회는 어떤 국면에서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효율적으로 움직였고, 외부의 기준으로도 짧은 시간 안에 성취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그 순간들을 다시 들여다보면, 그것이 진짜 화합이었는지 의심이 든다. 화합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상태에서, 서로가 합의한 규칙 안에서 공존하는 능력에 가깝다. 그런데 우리가 자주 경험했던 것은 이해관계가 사라진 화합이 아니라, 이해관계가 잠시 같은 방향으로 정렬되어 갈등이 보류된 상태였다. 외부의 위협이 크고, 생존의 압박이 강하고, 사회가 한 방향을 향해 달릴 때 사람들은 갈등을 드러내는 대신 속도를 선택한다. 속도는 강력하고, 속도는 성과를 만들어 낸다. 성과가 만들어지면 사람들은 그 성과의 원인을 “우리가 하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때 우리가 하나였던 게 아니라, 그때 우리가 같은 목표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기분이 나빠진다. 기분이 나쁘면 사람들은 사실을 싫어한다. 그래서 성과의 기억은 신화로 굳고, 신화는 다음 갈등이 올라올 때 더 큰 배신감을 만든다.

안정이 오면 목표는 분화한다. 평화로운 시기, 외부의 위협이 줄어드는 시기, 먹고사는 문제가 조금 완충되는 시기에는 사람들의 욕망이 다시 각자의 환경과 조건으로 돌아간다. 지역에 따라, 계층에 따라, 세대에 따라, 직업에 따라, 학력과 자산과 인맥에 따라 목표가 달라진다. 이것은 자연스럽다. 문제는 분화가 아니라 분화를 대하는 태도다. 우리는 분화를 협상으로 다루기보다 배신으로 읽는 경우가 잦다. 목표가 달라졌다는 말이 곧 “너는 우리 편이 아니야”로 번역되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그 속도가 빠를수록 우리는 대화를 하기 전에 적을 만들고, 조정하기 전에 공격을 선택한다. 공격은 쉽고 빠르다. 조정은 느리고 불편하다. 불편을 견디는 법을 충분히 배우지 못한 사회에서, 불편은 곧 적개심으로 변한다. 불편을 해결하는 가장 빠른 방식은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낮추는 것이다. 상대가 내려오면 내 마음이 편해진다. 상대가 실수하면 내 불안이 줄어든다. 상대가 망하면 내 열등감이 잠시 멈춘다. 이 기묘한 안도감이 한국 사회의 어두운 추진력으로 작동하는 순간이 있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냄비근성”이라고 부르며 개인의 성격 탓으로 돌리곤 한다. 금방 끓고, 금방 식고, 열광했다가 돌아서며, 다음 이슈로 달려가는 마음. 그런데 냄비근성은 개인의 기질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한국 사회는 속도에 보상을 주는 구조가 너무 많다. 더 빨리 말하는 사람이 이기고, 더 강하게 확신하는 사람이 주목받고, 더 자극적으로 단정하는 사람이 더 멀리 퍼진다. 플랫폼은 분노와 확신을 보상하고, 집단은 강한 목소리를 정의감으로 포장해 준다. 유보하는 사람은 “눈치 본다”는 말을 듣고, 맥락을 말하는 사람은 “실드 친다”는 공격을 받는다. 조용히 생각하는 사람은 뒤쳐진다. 그러니 사람들은 훈련된다. 단순한 서사에 기대는 법, 편을 고르는 법, 상대를 재단하는 법, 그리고 그 재단을 “팩트”나 “상식”이라는 말로 포장하는 법으로.

여기서 선동은 힘을 얻는다. 선동은 대개 거짓말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선동은 사람들 안에 이미 존재하는 욕구를 정확히 찌르면서 성립한다. 복잡한 현실은 불안하다. 단순한 구도는 편안하다.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지, 누가 우리 편이고 누가 적인지가 정리되면 마음이 즉시 정돈된다. 그런데 마음이 정돈되는 감각을 우리는 자주 진실로 착각한다. 편안함을 진실이라고 믿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이 정의의 편에 섰다고 생각한다. 정의의 편에 서면 죄책감이 줄어든다. 죄책감이 줄어들면 더 쉽게 공격한다. 공격이 쉬워지면 더 자주 공격한다. 그렇게 공격은 문화가 된다. 이 문화가 가장 교묘해지는 지점에서 “공감”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공감은 원래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함께 책임을 나누는 행위여야 한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공감은 종종 동조로 바뀐다. “그럴 수 있어”가 “그러니까 네가 옳아”로 변하는 순간, 공감은 돌봄이 아니라 결속의 신호가 된다. 결속이 강화되면 경계가 생기고, 경계가 생기면 적이 생기고, 적이 생기면 공격이 정당화된다. 공감이 따뜻함으로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공감이 칼날을 가진다. 공감으로 뭉친 집단은 공감이 깨지는 순간을 가장 견디지 못한다.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이 등장하면 그를 설득하기보다 몰아내는 쪽이 더 쉽기 때문이다. 몰아내기는 잔인하지만 편하다. 편한 잔인함은 중독성이 있다. 중독은 반복을 만들고, 반복은 본성처럼 보인다.

나는 지금 중국에 있다. 이곳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가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감각이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자주 깨닫는다. 누군가의 말실수, 누군가의 작은 논란, 누군가의 댓글 싸움, 누군가의 가벼운 허세를 두고 내가 긴장하고 흥분할 때, 누군가는 묻는다. 왜 남의 일에 그렇게 신경을 쓰냐고. 처음에는 그 질문이 무책임처럼 들리기도 한다. 무관심보다 관심이 낫다는 말이 세상에 널려 있고, 관심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분위기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는 그 질문을 다시 씹는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에서 ‘관심’은 종종 ‘감시’로 변하고, ‘참여’는 종종 ‘판정’으로 변하며, ‘의견’은 종종 ‘처벌’로 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가진다기보다 서로의 삶을 재단한다. 그리고 재단의 목표는 대개 타인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데에 있다. 내가 불편하지 않기 위해 상대가 불편해져야 한다면, 우리는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선택을 너무 쉽게 한다.

그 선택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악플이다. 악플은 단지 성격 나쁜 몇 사람의 일탈이 아니다. 악플은 보상 체계에 적응한 행동이다. 익명은 비용을 낮추고, 반응은 보상을 주고, 군중은 책임을 분산한다. 누군가가 한마디 던지면 다른 누군가가 붙고, 더 날카로운 말이 더 많은 박수를 받는다. 그렇게 말의 수준은 낮아지고 공격의 강도는 올라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악플은 “원래 인터넷이 그런 곳”이라는 말로 정당화된다. 나는 그 정당화를 가장 혐오한다. 왜냐하면 그 말은 변명이 아니라 책임 회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임 회피는 곧 폭력의 면허가 되기 때문이다. 익명성은 원래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다. 권력을 가진 자가 보복을 휘두를 때, 이름을 숨길 수 있게 해서 말할 권리를 지키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익명성을 보호가 아니라 허가증으로 써먹는다. 내가 누구인지 들키지 않으니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허가증. 말이 칼이 되어도, 상대의 하루를 망쳐도, 상대의 자존감을 꺾어도, 끝에 남는 건 “어차피 인터넷인데”라는 한마디다. 익명은 나를 숨겨 주지만, 동시에 나를 풀어준다. 풀려난 사람은 더 쉽게 잔인해진다. 그 잔인함은 어느새 “솔직함”이라는 말로 포장된다. 솔직함은 진실을 말하는 태도이지, 타인을 훼손하는 기술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훼손을 솔직함이라고 우기며 스스로를 세탁한다. 그러니 악플은 악플에서 끝나지 않는다. 악플은 나쁜 말이 아니라 나쁜 말이 정당화되는 문화가 된다.

더 기가 막힌 건, 그 정당화의 핑계가 늘 비슷하다는 점이다. 익명성, 그리고 불편함. “불편해서 한마디 한다”는 말은 얼핏 정의감처럼 들리지만, 대부분은 정의감이 아니라 불편을 상대에게 떠넘기는 행위다. 내가 불편하면 내가 처리해야 하는데, 우리는 불편을 처리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으니 상대를 때려서 불편을 없앤다. “내가 불편하니까 네가 틀렸다”는 논리. “내가 불편하니까 네가 사라져야 한다”는 결론. 이것은 의견이 아니라 감정 폭력이다. 그리고 감정 폭력이 가장 교묘한 이유는 폭력의 얼굴이 늘 합리와 상식의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조롱하고, 내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상대를 비난하고, 솔직하다는 이유로 상대를 깎아내린다. 그 순간 우리는 착각한다. 내가 지금 하는 건 악플이 아니라 평가라고. 그런데 평가에는 최소한의 책임이 따른다. 근거가 있어야 하고, 대상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고, 나의 말이 남의 삶에 닿을 수 있다는 감각이 있어야 한다. 익명 뒤에서 던지는 말에는 그런 책임이 없다. 책임이 없으니 그건 평가가 아니라 투척이다. 우리는 사람을 향해 돌을 던지면서 표현의 자유라고 말한다. 표현의 자유는 권리지만, 권리가 타인의 존엄을 짓밟는 도구가 되는 순간 권리는 곧 폭력이 된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악플러가 정말 원하는 건 진실이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상대가 긁히는 것”이다. 내 말 한 줄에 상대가 흔들리면, 그 흔들림이 내 존재감이 된다. 내 삶이 불안할수록 남의 흔들림은 더 달콤해진다. 그러니까 악플은 의견이 아니라 거래다. 내 불안을 상대의 불행과 바꾸는 거래. 이 거래가 싸구려인 이유는 비용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익명이라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니까.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그 거래를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사회 전체가 그 거래를 당연한 문화로 받아들인다. “어차피 원래 그렇지”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 사회는 이미 한 단계 떨어진 것이다. 악플이 일상이 된 사회는 결국 누구도 안전하게 말할 수 없게 만들고, 안전하게 말할 수 없는 사회는 진짜 문제를 말하지 못한 채 더 분열된다. 악플은 누군가의 마음을 긁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악플은 공동체 자체를 조금씩 썩게 만드는 습관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나 자신을 끌어들여야 한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글은 쉽다. 악플러를 악마로 만들어 버리면 내 책임은 사라진다. 그런데 나는 알고 있다. 나도 어떤 순간에는 그 달콤함을 느낀다. 댓글을 달고, 상대가 반응하고, 그 반응을 확인하며 묘한 쾌감이 올라오는 순간. 내가 건드렸다는 감각, 내 말이 먹혔다는 감각, 상대가 흔들린다는 감각. 이런 감각은 왜 달콤할까. 많은 사람들은 그 이유를 “피”로 돌리고 싶어 한다. 원래 그렇다고 말하면 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래 그렇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변화의 가능성도 함께 버린다. 나는 이 달콤함이 유전적 본성이라기보다 구조적 보상에 가깝다고 본다. 안정감이 부족할수록 남의 성공은 위협이 되고, 남의 실수는 안도가 되고, 남의 흔들림은 위로가 된다. 타인의 성공을 깎아내리는 말은 상대를 분석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내 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한 말이다. 그래서 그 말은 정확하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건 사실이 아니라 내 감정이기 때문이다. 내 감정을 편하게 해 주면 그 말은 성공이다. 온라인에서는 이 성공이 너무 쉽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요즘 내가 하고 있는 유튜브에서 바로 그것을 보여 준다. 제목에도 AI라고 쓰여 있고 워터마크도 찍혀 있는데, 굳이 “AI네 이거”라는 댓글을 달고, 심지어 “댓글도 AI 아냐?”라고 비꼬는 사람들. 그 말은 정보 전달이 아니다. 이미 정보는 공개되어 있다. 그 말의 목적은 다른 데 있다. 상대를 판정하는 자리로 올라가고 싶은 욕망이다. “나는 너를 간파했다”는 권력의 감각. “너는 별거 아니다”라는 위계의 확인. 그리고 그 위계는 상대가 긁힐 때 완성된다. 긁히면 내가 이긴다. 내가 이기면 내 불편이 줄어든다. 그러니 그 댓글은 사실 확인이 아니라 불편을 해소하는 의식이다. “네가 잘나 보이는 게 불편하다”는 감정을 “AI네”라는 말로 세탁하는 의식. 악플은 늘 이런 식으로 등장한다. 감정이 먼저 있고, 그 감정을 합리화하는 말이 뒤따른다. 사람들은 자신이 감정적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한다. 그래서 말을 사실처럼 꾸민다. “팩트잖아”라고 말하며 타인을 깎아내릴 권리를 얻는다. 하지만 팩트는 칼이 아니다. 팩트는 설명의 재료다. 팩트를 칼로 쓰는 순간, 그건 팩트가 아니라 폭력이다.

나는 여기서 한국 사회의 오래된 문장을 떠올린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이 문장은 단지 소심함을 풍자하는 속담이 아니다. 가까운 사람의 성취는 내 위치를 더 적나라하게 비춘다. 비교가 촘촘한 사회일수록 가까운 비교대상은 곧 거울이 되고, 거울이 불편하면 사람들은 거울을 깨고 싶어진다. 거울을 깨는 방식은 상대를 깎아내리는 것이다. “운이 좋았겠지.” “뒤가 있겠지.” “곧 망하겠지.” 이런 말들은 정보가 아니라 주문이다. 상대가 내려오면 내 마음이 편해질 거라는 주문. 그런데 주문은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주문은 잠깐 내 마음만 바꾼다. 마음이 잠깐 바뀌면, 다음에도 또 주문을 외우고 싶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말을 반복한다. 반복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문화가 되고, 문화는 본성처럼 보인다.

여기에 “정”이라는 단어가 붙을 때, 우리는 더 혼란스러워진다. 한국 사회는 종종 정이 많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은 따뜻함일 수도 있고, 동시에 빚일 수도 있다. 받았으니 갚아야 하고, 갚지 않으면 불편해지고, 불편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면 관계는 통제로 변한다. 통제는 미소를 띠고 다가와 “너를 위해”라고 말한다. 그리고 통제는 속삭인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그 순간 정은 사랑이 아니라 압박이 된다. 관계를 유지한다는 명분 아래, 우리는 상대의 선택을 불편해하고, 상대의 독립을 배신으로 읽고, 상대가 내 기대에 맞지 않으면 실망하며, 실망을 비난으로 바꾼다. 이 비난은 “정”이라는 말로 포장되기도 한다. 내가 너를 아껴서 하는 말이라는 포장. 하지만 정말 아끼는 마음이라면 상대를 살리는 방향으로 말해야 한다. 상대를 살리는 말은 느리고 불편하다. 상대를 죽이는 말은 빠르고 편하다. 우리는 자주 빠르고 편한 쪽을 선택한다. 그래서 정은 미덕이면서 동시에 위험하다. 따뜻함을 만들기도 하고, 통제를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이 아니라, 정을 도덕의 절대값처럼 숭배하면서 그 안에 섞인 거래와 통제를 보지 않으려 하는 태도다.

이쯤에서 나는 “한국인은 하나로 뭉칠 수 없다”는 말을 다시 해석하고 싶어진다. 뭉칠 수 없다는 말은 사실상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진 채 공존하는 법을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는 말에 가깝다. 목표가 같으면 뭉친 것처럼 보인다. 목표가 갈라지면 바로 찢어진다. 찢어질 때 우리는 대화보다 판정을 선택한다. 판정은 빠르고, 판정은 쉬우며, 판정은 나를 안전하게 만든다고 느끼게 해 준다. 그리고 판정이 반복되면, 우리는 상대를 내리는 일에 능숙해진다. 상대를 내리는 능숙함은 결국 악플 문화와 연결된다. 악플은 댓글창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악플은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대상으로 취급하는 습관이다. 대상은 감정이 없어도 된다. 대상은 상처받아도 된다. 대상은 망가져도 된다. 대상이 망가질수록 나는 더 안전해진다. 이 안전감이야말로 가장 비열한 안전감이다.

그런데 나는 한 가지를 분명히 하고 싶다. 이것을 “모든 한국인이 그렇다”로 결론 내리는 순간, 글은 쉬워지지만 설득력은 약해진다. 왜냐하면 독자는 예외를 떠올릴 수 있고, 예외를 떠올리는 순간 글은 감정의 분출로 보이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본성”으로 결론 내리면 해결이 끝난다. 해결이 끝나면 남는 것은 체념뿐이다. 체념은 또 다른 폭력의 면허가 된다. “원래 다 그래”라는 말은 사람을 편하게 하지만, 그 편안함은 결국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자리다. 그래서 나는 이 글에서 본성을 말하되, 그 본성이 실제로는 어떻게 길들여지는지를 끝까지 추적하고 싶다. 그래야 우리가 적어도 빠져나올 문틈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틈은 크지 않다. 문틈은 거창한 도덕 선언에서 생기지 않는다. 문틈은 아주 짧은 지연에서 생긴다. 악플을 달고 싶은 충동이 올라오는 순간, 그 충동은 대개 길지 않다. 충동은 순간이고, 후회는 오래간다. 그런데 충동의 순간에는 후회를 상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필요한 건 ‘성품’이 아니라 ‘시간’이다. 시간을 벌면 충동은 약해진다. 충동이 약해지면 내 감정이 보인다. 내가 정말 화가 난 건 상대의 잘못 때문인지, 아니면 상대가 잘나 보이는 게 불편해서인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 사실 확인인지, 아니면 판정인지. 내가 원하는 건 대화인지, 아니면 승리인지. 이 질문을 하는 동안, 내 손은 잠깐 멈춘다. 멈춤이 생기면 공격이 늦어진다. 공격이 늦어지면, 공격이 더 이상 자동반사로 나오지 않는다. 자동반사가 멈추는 순간, 인간은 다시 선택할 수 있게 된다. 그 선택이 늘 옳을 필요는 없다. 다만 선택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본성은 선택이 없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중국에서 “왜 남일에 신경을 쓰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질문이 단지 문화 차이의 표현이 아니라 내게 던지는 경고처럼 느껴진다. 남일에 신경을 쓰는 것이 늘 관심과 배려로 이어진다면 그건 좋은 사회다. 하지만 남일에 신경을 쓰는 것이 감시와 판정으로 이어지고, 판정이 조롱과 악플로 이어지며, 악플이 사회 전체의 말문을 막아버린다면 그건 병든 사회다. 병든 사회는 더 불안해진다. 불안해진 사회는 더 많이 공격한다. 더 많이 공격하면 더 불안해진다. 이 악순환은 생각보다 빠르게 심화된다. 그래서 악플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악플은 사회의 신경계가 손상되고 있다는 신호다. 신경계가 손상되면 작은 자극에도 과잉 반응한다. 과잉 반응이 일상이 되면, 사람들은 늘 전투 상태로 산다. 전투 상태에서는 누구도 여유롭지 않다. 여유가 없으면 축하는 어렵고, 축하가 어려우면 질투가 쉬워진다. 질투가 쉬워지면 타인의 성공은 위협이 된다. 위협을 제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상대를 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악플로 돌아온다.

이 글의 결론은 비관도 낙관도 아니다. 결론은 책임이다. 한국 사회에는 비교와 서열과 속도와 평판이 촘촘하게 얽힌 구조가 있고, 그 구조는 사람들로 하여금 불편을 견디기보다 상대를 재단하게 만들며, 재단을 대화로 풀기보다 공격으로 해소하게 만든다. 익명성은 그 공격의 비용을 낮추고, 플랫폼은 그 공격의 보상을 키우고, 집단은 그 공격을 정의와 솔직함과 상식이라는 말로 포장해 준다. 그 결과 악플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집단의 습관이 되고, 습관은 문화가 되고, 문화는 본성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성이라고 결론 내리는 순간 우리는 변화의 가능성을 버린다. 나는 그 가능성을 버리고 싶지 않다. 내가 악플의 쾌감을 느낀 적이 있다는 사실은 나를 면죄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나에게 더 큰 책임을 준다. 나는 내가 어떤 보상 구조에 길들여져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반복한다면, 그때는 본성이 아니라 선택이 된다. 선택은 변명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한국인을 단죄하기 위해 쓰지 않는다. 나는 이 글을,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어떤 회로를 폭로하기 위해 쓴다. 그리고 그 회로가 내 안에서도 돌아가고 있음을 인정하기 위해 쓴다. 인정은 불편하다. 그러나 불편을 견디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회에서, 불편을 견디겠다고 결심하는 개인은 그 자체로 균열이 된다. 균열이 많아지면 구조는 조금씩 흔들린다. 구조가 흔들리면, 본성처럼 보였던 것들이 사실은 환경이 만든 그림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원래 잔인한 민족이어서 그런 게 아니라, 잔인함이 너무 쉽게 보상받는 환경 속에서 오래 살아왔을 뿐이라고. 그리고 그 환경은 바뀔 수 있다고. 느리겠지만, 적어도 내가 던지는 돌 하나는 멈출 수 있다고. 나는 한국인이다. 그래서 나는 안다. 우리는 빠르고, 잘하고, 결과를 만든다. 동시에 우리는 너무 쉽게 비교하고, 너무 쉽게 판정하며, 너무 쉽게 공격한다. 이 동시에를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한쪽만 보고 한쪽만 부정할 것이다. 그리고 그 부정은 늘 같은 형태로 되돌아온다. 댓글창에서, 조롱에서, “불편하다”는 핑계에서, “솔직하다”는 포장에서, “상식이다”라는 폭력에서. 나는 그 되돌아옴을 멈추고 싶다. 적어도 내 안에서부터. 내가 누군가를 긁고 싶어지는 순간, 그 욕망을 본성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본성이라고 부르는 순간 나는 나를 놓아버린다. 나는 나를 놓지 않겠다. 내 불안을 남의 불행으로 달래지 않겠다는 결심은 멋있지 않다. 오히려 초라해 보일 때가 많다. 하지만 초라함을 견디는 사람만이, 그 사회의 잔인함에서 조금씩 빠져나올 수 있다. 그리고 그 빠져나옴이야말로, 우리가 정말로 뭉쳐야 할 유일한 지점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무너뜨려서 편해지는 방식이 아니라, 누구도 무너지지 않아도 내가 편해질 수 있는 방식으로 살겠다는, 조용한 연대. 그 연대는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은 악플로 사회를 썩게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익명성을 핑계로 책임을 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불편하다”는 말을 타인을 찌르는 칼로 쓰지 않는다. 그리고 그 작은 선택들이 쌓이는 순간, 우리는 마침내 본성이라는 단어를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본성은 못 바꾸지만, 습관은 바꿀 수 있다. 우리가 바꾸지 못할 것 같아 보였던 것들 중 상당수는, 사실 오랫동안 반복해 온 습관일 뿐이다. 그 습관을 끊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끊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같은 장면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장면은 점점 더 지겨워질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그 지겨움을 당연한 풍경으로 살고 싶지 않다. 나부터, 이 회로의 전원을 조금씩 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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