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학교 3학년이던 1968년, 일반사회(그 당시에는 '공민(公民)'이라고 했다) 담당 인능식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나라 1년 전기사용량이 미국 MIT 1년 전기사용량보다 적다.’ 이 말의 정확한 근거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한국전쟁 후 낙후된 우리의 경제 사정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리라. 어찌어찌하여 우연하지 않게 14년 뒤 MIT에서 수학하면서 나는 MIT 어디에서 그 많은 전기를 사용할까 생각해 보았다. 제일 먼저 연구용 원자로, 그리고 이곳저곳의 실험 장치에 눈이 갔다. 이렇듯 한 나라와 맞먹는 전기량을 소모하는 실험 장치를 활용하여 실제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데에 MIT의 저력이 있었으리라. 지금 돌아보면 중3인 이때부터 나는 공학도를 꿈꾸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중고교 다닐 때 신문을 두 개 정도 샅샅이 정독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때 포항제철에 관한 기사가 가끔 나왔다. 어느 날인가에 공장을 준공하고 고로(용광로)에 불을 붙인다는 기사를 보고 나는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전까지는 신문기자를 꿈꾸었던 소년이었고, 고3 담임선생님이신 송재건 선생님은 물리학과를 추천했고, 나를 아끼셨던 생물 과목의 이형구 선생님은 ‘너는 성격이 차분해 내과 의사가 딱 맞으니 의과대학엘 가라’고 하셨지만, 나는 공대를 고집했다.
# 직접 가 본 포항제철 공장에서 좌절하다.
그렇게 그 학생은 1972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들어갔다. 원래 문과 학생이었던 탓에 저학년 때, 국어, 영어, 철학 과목에 흥미를 더 느꼈다. 지금도 담당 교수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고 일부 수업 시간 장면도 생각난다. 서울로 상경하여 여러 하숙집을 전전하며 힘들게 수험 생활을 했던 나는 대학 입학 후에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러던 대학 3학년이던 1974년, 여름방학 동안에 포항제철에 4주 동안 현장실습을 가게 되었다. 회사 유니폼을 입고 군화를 신고 독신 기숙사에서 자며 아침 일찍 조회와 점호를 하고 현장을 견학하는 일정이었다. 전체 공정을 둘러보고 후판(厚板) 공장에서 2주 정도 실습을 했다. 그런데 단위 공장 사이의 거리가 꽤 되어 이동하기가 어려웠고, 돌아와서 집에서 한동안 앓아야 했다.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공대에 입학했던 이유였던 '포항제철', 그렇게 동경하던 곳이 내 성격이나 체력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고민하던 나는 학업을 이어가 보고자 했다. 당시 병역특례 혜택이 있던 한국과학원(KAIS, 현 KAIST의 전신) 석사과정 입학시험 준비를 하였다. 나는 4기 입학생이었다. 이때 재료공학 전공에 관해 심도 있는 공부를 한 것 같다. 후에 MIT 졸업 시 출간한 박사논문 뒤에 실린 연구자 이력서에는 이 시절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MIT 박사논문에는 이렇게 연구자가 스스로 쓴 자신의 자전적 전기를 싣는다.
그림 1. MIT 박사논문 뒤에 실린 연구자 이력서.
"필자는 1954년 10월 한 농부의 아들로 한국의 서울과 휴전선 사이에 있는 파주에서 태어났다. 거기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상급학교 공부를 위하여 서울로 계속하여 보스턴으로 갔다. 그는 1972년 한성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한국이 포항제철 회사를 가동하기 시작할 즈음에 국립서울대학교 금속공학과에 입학하였다. 1976년 공학사 학위를 우등으로 받은 후에 한국과학원에 들어갔다. 윤덕용 교수님의 지도로, ‘액상 구리 기지 상에서 코발트 입자의 성장’이라는 제목의 석사 학위 논문을 썼는데, 내용 중의 일부는 뒤에 미국 금속 학회지(Met. Trans. 12A, 65, 1981)에 출판되었다. 1978년 3월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이즈음에 그의 나라는 자동차산업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그는 강철의 물리 야금에 관해서 몇 개의 국가 연구과제를 수행하였다. 재료에 관한 선진 기술에 대한 욕구에 강력하게 이끌리어 그는 세계적인 선도 기관에서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한국 정부의 장학금을 갖고 1982년 8월에 MIT로 왔는데, 그때는 한국이 다음 세대에 중요한 반도체 생산자와 개발자가 되려는 계획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1982년 12월에 Harry C. Gatos 교수와 Jacek Lagowski 박사가 이끄는 전자재료연구실에 합류하여 GaAs의 열처리 분야에서 선도적인 개발에 관한 공부를 하였다. 그는 연구실의 일원으로 있으면서 7개의 기술 논문을 쓰거나 공동으로 집필하였다."
# 컴퓨터가 없던 시절의 논문 쓰기, MIT 대학 서점의 능력자 Joe
내가 석사나 박사학위 과정에 있을 때,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개인용 컴퓨터(personal computer, PC)가 없었다.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쯤에 실험실에 PC가 들어왔다. 그때에는 실험 데이터를 얻으면, 모눈종이에 그려 넣고, 지도교수님의 확인을 받고, 그 원고를 들고 학교 앞의 서점에 있는 조(Joe)에게 가서 부탁하여 먹물로 선명하게 트레이싱을 해서 논문에 실었다. 지금에야 플로팅(plotting) 소프트웨어가 있어서 쉽게 데이터를 작성하고 수정도 쉽게 할 수 있나 본데 '라뗴'는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그렸다. 학술지 투고도 우편으로 실시하고 평가위원의 평도 편지로 받을 때이니까, 출간까지 기간이 참 오래 걸렸다. 우리나라에서 영어로 해외에 SCI(Science Citation Index)급 논문을 투고하여 게재한 초창기 사람의 하나였던 필자도 학술지에 논문 투고부터 게재까지 1년은 족히 걸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림 2. JOE가 그려준 내 박사논문의 데이터.
박사학위 취득 후에 학교나 연구소에서 일하기보다는 기업 현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대기업에 들어가서 세계적인 기업과 교류하여 외국과의 합작회사를 설립하고 대표이사도 되어 보았다. 대기업의 몰락도 지켜보았고, 벤처기업을 설립하여 회사 경영의 어려움도 맛보았다. 말년에는 대학교수가 되어 16년간 후학을 가르치다가 정년퇴직하였다.
# 내가 살아온 50년 과학 기술 이야기를 들려주고픈, 포레스트 강
한동안 유행하는 말에 실업자를 뜻하는 백수가 있다. 백수건달(白手乾達)에서 유래한 말일 게다. 그런데 백수에 관련된 유머가 여러 가지 있다. 동네만 어슬렁거리는 ‘동백’, 가정에만 박혀있는 ‘가백’, 누군가 불러 줘야 외출하는 불쌍한 ‘불백’, 마누라도 포기한 불쌍한 ‘마포 불백’ 등이 있다. 화려한 백수, ‘화백’이나 골프 좀 치느라 왼손이 하얀 ‘좌백’도 엄연한 백수다. 필자도 몇 년 전에 정년퇴직하면서 평생 모아 둔 책들을 모두 학교 도서관에 기증하거나 휴지통에 버렸다. 완전한 백수로 노년을 보내리라고 마음먹었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고 보니 ‘완백’으로 살기도 쉽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과거의 기억이 아직도 살아 있고 머리가 돌아갈 때 내 지식과 경험을 글로 남겨두는 게 유익할 것 같은 생각에 컴퓨터를 새로 구입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러한 내 일생의 과정을 막내딸 같은 나의 글쓰기 선생님께 얘기했더니 대뜸 ‘한국 과학기술계의 포레스트 검프’라고 말하는 거였다. 나름 똑똑한 공학도로 평생을 살아왔는데 그 순진무구한 포레스트 검프와 나를 동일시하는 것에 순간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적절한 비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레스트 검프가 사람들에게 주는 감동과 성찰을 내 글을 통해서도 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그런 마음을 담아 브런치란 글쓰기 사이트에 포레스트 강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올리고 있다.
위에도 간단하게 언급되었지만, 필자는 한국전쟁 이후인 1954년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무건리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말기에 징집되어 중부 전선에서 부상으로 후송된 후 귀가한 아버지를 할아버지가 반갑게 맞이하여 바로 장가를 들게 하여 출생하였다. 필자는 만으로 다섯 살 오 개월쯤 되었을 때 할아버지를 따라 학교에 갔다가 신입생 줄에 서는 바람에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3학년 때까지 뭐가 뭔지 모르고 학교에 다녔다. 시험 볼 때, 어떻게 하는지 모르고 답을 엉뚱하게 써서 빵점도 많이 맞았다. 줄 긋기 문제에 양쪽 번호 옆에 O, X 표시를 하는 식이었다. 4학년 때부터 문리에 눈을 떴었는지, 주위에서 공부 좀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1966년 적남국민학교(현 웅담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 와서 한성중학교와 한성고등학교에 다녔다. 1972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하고, 1976년에 한국과학원(현 KAIST) 재료공학과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1978년 공학석사를 받은 후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에 들어가 재료시험실, 철강재료연구실에서 일하였다. 1982년 가을 미국의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MIT) 재료공학과에 입학하여 ‘반도체 재료의 열처리와 결함 연구’로 1988년 2월 전자재료 분야의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87년 12월 대우통신에 입사하여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투자법인인 ZyMOS 회사에 파견되었다가 1988년 5월 귀국하였다. 대우그룹 반도체사업부문에서 근무하다가 2000년 유럽의 반도체 회사 STMicroelectronics와 대우전자의 합작회사인 대우에스티반도체설계주식회사의 대표이사에 취임하여 2002년까지 근무하였다. 그 후 정부가 KIST에 설립한 나노소재기술개발사업단의 기술기획팀장으로 일하다가 2004년에 한국산업기술대학교(현 한국공학대학교) 신소재공학과로 옮겨 교수로 있었다. 2020년 2월에 정년퇴직하여 현재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신소재공학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