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미드(Pyramid)는 보통 정사각형의 바닥 위에 옆면이 네 개의 삼각형으로 된 뿔 모양의 고대 유적을 말한다. 고대 중국, 이집트, 수단, 메소포타미아, 중앙아메리카 등에서 피라미드 형태의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피라미드는 국왕, 왕비 등 지배계층의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피라미드에서 미라가 여럿 발굴되었을 뿐 아니라 미라가 안치되었던 방에서 매장에 필요한 석관, 항아리 등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북쪽으로 카이로 북부에서 남쪽으로 수단까지, 나일강을 따라 약 1,500km가 넘는 지역에 흩어져 있다. 대략 3000년에 걸쳐 300개 이상 지어졌다. 현재까지 발굴된 피라미드는 138개이고, 이들은 대부분 나일강 서안 사막에 흩어져 있다.
특히 카이로에서 남서쪽으로 약 12km 떨어진 기자(Giza) 지역에 있는 세 개의 큰 피라미드가 유명하다. 피라미드의 높이는 약 147m이며, 밑변의 길이는 약 230m이다. 원래 꼭대기에는 금으로 된 피라미드석이 있었는데 도난당해 지금은 마치 윗면이 작은 사다리꼴의 모습을 하고 있다. 피라미드는 약 230만 개에 이르는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바위들은 인근 채석장에서 끌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피라미드의 외벽용 석회암은 나일강을 통해 멀리서부터 운반해 왔을 것으로 알려졌다. 피라미드에서 가장 큰 바위는 왕의 방을 이루는 바위인데, 약 80톤에 이르며 800km나 떨어져 있는 나일강 상류의 채석장에서부터 운반되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바위의 가공을 금속 끌과 나무쐐기로만 진행했다. 끌로 나무쐐기를 바위에 박은 후, 물을 부으면 쐐기가 이를 흡수하여 팽창하게 되는데, 이 힘으로 바위를 쪼갠 것으로 생각된다. 바위를 쪼개낸 이후에는, 나일강을 통하여 피라미드까지 운반하였을 것이다. 대피라미드를 짓는 데 들어간 석재들의 전체 무게는 약 5,900만 톤으로 추정되며, 약 230만 개의 석회암과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은 돌은 2톤 정도이지만 큰 돌은 한 개의 무게가 무려 50톤에 달한다. 그리고 평균 돌의 무게는 2.5톤이다.
피라미드는 갑자기 나타난 건축 양식이 아니라 처음에는 벽돌식 단층 무덤에서 시작하였다. 이를 더 높고 웅장한 형태로 변형하여 계단식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이후 현재의 피라미드 형태의 건축물을 건설하려 시도했으나 당대의 건축 기술이나 경험의 부족으로 인하여 붕괴하였다. 이집트인들은 이에 포기하지 않고 다시 피라미드를 지었는데 피라미드 각이 너무 예각이었던 탓에 다시 붕괴 위험에 시달렸다. 어쩔 수 없이 공사 중 각도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굴절 피라미드라고 한다.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더욱 미적으로 완성된 피라미드를 짓기 위해 노력했으며, 현재 우리가 보는 이미지의 피라미드가 완성되었다. 거대한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건축 기술의 개량과 발전이 바탕이 된 것이며 단시간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이후 평민들까지 피라미드를 세울 수 있게 되면서 사람 크기 정도의 작은 피라미드도 만들어졌다.
대규모 피라미드를 완성하는데 연인원 약 10만 명의 인부들이 강제 노역을 통해 20여 년에 걸쳐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최근의 발굴 조사로 피라미드 근처에서 마을이 발견된 후 사람들 인식이 바뀌었다. 마을에는 인부들이 살았던 숙소, 공방, 저장고, 자재 관리소, 관리들의 저택과 인부들이 만든 낙서 등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곳 묘지의 벽화를 보면 사람들이 빵, 고기, 채소를 먹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발견된 유물과 상형문자는 마을 사람들이 노예처럼 착취당한 것이 아니라 생활 조건에 만족하며 일했음을 보여 준다. 아마도 나일강의 범람이나 가뭄으로 할 일이 없어진 농한기에 농부들이 급료를 받고 일했다고 추정된다. 당시 위정자들이 일종의 공공 근로를 통해 농민들의 소득을 보전해 주었다고 생각된다.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 숫자도 2만 명 내외였다고 추정된다.
기자 지역에 있는 규모가 가장 큰 세 개의 피라미드는 쿠후(Khufu), 카프레(Khafre), 멘쿠레(Menkure) 파라오에 의해 세워졌다. 당시 이집트의 파라오(Pharaoh)는 최고통치자인 왕이면서 또한 신이었다. 쿠후의 피라미드 남서쪽에는 이보다 약간 작은 제프렌의 피라미드가 있다. 이 피라미드의 동쪽에 돌덩이 하나에 조각된 스핑크스가 세워져 있다. 스핑크스(Sphinx)는 그리스어로 사자의 몸에 사람의 머리가 달린 상상 속의 동물이다. 제프렌의 스핑크스는 몸체 길이가 70m이고 높이는 21m이다. 사자 모양의 앞발 길이는 15m가 되며, 사람 모양인 얼굴의 폭은 4m이다. 얼굴의 코 등은 나중에 우상이라고 낙인 되어 훼손되었다. 세계 곳곳에 스핑크스 모양의 조각상이 전시되어 있는데, 관광객들이 접근할 수 있으면, 대부분 스핑크스의 발 부위를 만지고 지나가서 그 부분이 반들반들하다.
세계 7대 불가사의(世界七大不可思議)는 사람이 만들어 낸 경이로운 건축물 일곱 가지를 일컫는다. 고대 그리스인이 생각해 낸 목록이며. 중국의 만리장성, 인도의 타지마할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면, ‘세계’라는 말은 헬레니즘 문명권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명칭은 BC 약 3세기부터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당시의 그리스인들이 보고 들어서 알던, 주변의 웅대한 건축 및 예술 작품을 일컫는다.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이집트의 피라미드, 바빌론의 공중 정원,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 올림피아의 제우스 상, 로도스의 거상을 꼽는데, 이들 중 피라미드가 가장 오래된 건조물로서 유일하게 지금까지 건재하다.
이러한 피라미드는 세월이 흐르면서 재정 악화나 다른 건축물인 장제전 등의 건축 증가로 인하여 규모가 축소되었고, 건축 기법도 내부를 작은 돌로 채우고 바깥쪽에만 큰 돌을 쓰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런 구조는 붕괴에 취약하여 후세에 보존 상태가 좋지 않다. 그 뒤 고왕국이 멸망하면서 ‘귀족의 자식이 노예가 되고 노예의 자식이 귀족이 되는 세상’이 되는 등 엄청난 정치 및 사회적인 혼란기가 있었다. 이러한 혼란의 시대가 근 2백 년간 있었다. 이 때문에 피라미드 같은 거대하고 복잡한 건축물을 축조할 수가 없었고, 건축 자재로 쓰기 위하여 기존의 피라미드를 훼손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중왕국 시대에 이르면 진흙으로 속을 채우고 외벽은 석회암으로 마감한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중왕국 후기에 이르러서는 외부의 침입으로 피라미드를 만들 시간도 없어서 그냥 바위산에 굴을 파고 시신을 매장했다.
이집트가 다시 국력을 회복한 신왕국 시대에 와서 수도를 멤피스에서 남부의 룩소르로 옮기면서 최고신도 태양신 ‘레(Re)’에서 창조신 ‘아문(Amun)’으로 바뀌게 되는 등 피라미드를 건축할 이유도 사라지고, 왕의 시신은 주로 나일강 건너편의 ‘왕가의 계곡’에 매장했다. 피라미드는 사람들 눈에 쉽게 띄어 수천 년간 도굴꾼들에게 시달렸다. 그래서 사막 속 암반 계곡에 굴을 파고 왕족의 미라와 부장품을 안장한 것이다. 당시 왕족들도 피라미드 건축법을 재건하여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는 대신에 도굴로부터 그나마 더 안전한 장례지 선정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왕가의 계곡은 오랫동안 비밀 장소였다가 19세기 들어서 발견되었는데, 무덤은 대부분 이미 도굴당한 상태였다.
룩소르(Luxor)는 이집트의 남부에 있는 도시로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존재해 왔으며 옛날에는 테베(Thebes)라고 불렸고 구약성서에는 ‘노’로 언급되어 있다. 매년 수천 명의 관광객들이 룩소르를 찾고 있다. 주민들은 주로 사탕수수 농사에 종사하며, 경제는 주로 관광업에 의존하고 있다. 나일강 동쪽이 도시의 중심으로 왕궁, 신전, 행정관청, 주거가 밀집되어 있었는데 석조로 이루어진 룩소르와 카르나크 두 신전을 제외하면 모두가 벽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나일강 서쪽은 죽은 자들의 도시로써 왕묘, 왕의 장제전, 귀족의 묘들이 집중되어 있었다. 나일강을 사이에 두고 이렇게 판이하게 도시를 배치하기는 당시 이집트인의 세계관과 종교관을 따랐기 때문이다. 신전은 상당히 오랫동안 모래에 파묻혀 있었다. 모래 위로 드러나 있는 부분은 도굴꾼들의 좋은 먹이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이집트 당국은 유적의 발굴과 보존에 나섰다. 유적의 넓이가 엄청나고, 기타 사정으로 인해 전체의 10%밖에 발굴되지 않은 상태다. 신전 지하에 큰 수맥이 흐르고 있어서 아무리 노력해도 신전은 저절로 무너져 가고 있었다.
룩소르 신전은 룩소르 도시의 나일강 동쪽 둑에 있는 대형 신전이다. 대략 BC 1400년경에 건립되었다. 제18왕조의 아멘호테프 3세가 건립하고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가 중축하였다. 꽃이 피어 있는 파피루스와 피지 않은 파피루스 기둥이 특이하다. 높이 16m의 원주열(圓柱列)은 주랑 측벽(側壁)에 있는 투탕카멘왕의 축제 내용을 새긴 얕은 부조와 함께 신전 중에서 가장 뛰어난 부분이다. 대탑문, 람세스 2세의 뜰, 제2 탑문, 열주실 등으로 이어져 있다. 위 사진은 야간에 찍은 룩소르 신전의 앞모습이다.
카르나크(Karnak) 신전은 룩소르 신전 북쪽 3km 지점에 있다. 두 신전은 스핑크스들이 도열한 스핑크스 대로로 연결되어 있다. 현존하는 신전 가운데 최대 규모인 카르나크 신전은 BC 2000년경부터 건립되기 시작했는데, 역대 왕에 의해 증축과 개축이 되풀이되었다. 현재의 신전은 신왕국 시대부터 1500년 뒤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이르는 긴 시간에 걸쳐 건립된 10개의 탑문, 람세스 1세로부터 3대에 걸쳐 건설된 대열주실, 제18왕조의 투트모세 1세와 그의 딸로 여왕이 된 핫셉수트가 세운 오벨리스크, 투트모세 3세 신전, 람세스 3세 신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높이 약 23m의 석주 134개가 늘어선 대열주실은 너비 약 100m, 안쪽 깊이 53m로 안쪽의 오벨리스크와 함께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후세에 오벨리스크 중 한 개가 프랑스에 기증되어 파리의 콩코드광장에 세워져 있다. 오래된 이집트의 유적은 로마를 비롯한 후세의 유럽인들에게 경이와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오벨리스크 같은 건조물이 미국의 수도와 오래된 도시에 존재한다.
나일강의 건너편에 있는 ‘왕가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은 제18왕조부터 제20 왕조까지 약 500년에 달하는 신왕국 시대의 파라오와 귀족들이 묻힌 곳이다. ‘왕가의 계곡’은 고대도시 테베의 나일강 건너 서안의 와디(Wadi) 지형을 기반으로 암반을 깎아 조성되었다. 18세기말부터 고고학자들의 탐사가 시작되었으며 현재까지도 무덤 연구가 지속되고 있다. 특히 1922년 투탕카멘의 무덤 발견 이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고고학 유적지로 남게 되었다. 왕릉의 경우 이집트 신화의 전통 벽화로 장식되어 있으며 그 시대의 장례 절차와 사후 세계관을 보여 주는 생생한 증거가 되고 있다. 대다수 무덤이 고대부터 노출되어 도굴된 것으로 추정되나, 이집트 파라오가 지녔던 부와 권력을 가늠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테베 고원에는 알코른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이 산은 피라미드 모양을 하고 있다. ‘왕가의 계곡’이 처음 조성되기 천여 년 전에 있었던 고왕국 시대의 피라미드를 닮았다고 여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계곡 자체가 고립되어 있어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았고, 무덤 파수꾼이 묘지 지역을 지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신왕국의 아흐모세 1세가 힉소스를 물리치고 이집트를 다시 통일한 이후 제18왕조의 파라오들은 되찾은 새로운 권력을 통해 정교한 무덤을 건설하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제18왕조의 초대 국왕인 아흐모세 1세는 제17왕조 때에 조성된 무덤에 안장되었고, ‘왕가의 계곡’에 처음으로 안장된 국왕은 아멘호테프 1세와 투트모세 1세였다. 이렇게 만들어지게 된 ‘왕가의 계곡’은 BC 1539년부터 BC 1075년까지 역대 파라오의 공동묘지로 사용되었다. 투트모세 1세부터 람세스 11세에 이르기까지 이곳에 조성된 무덤의 수는 총 63곳에 달한다.
‘왕가의 계곡’에는 이름과 달리 귀족들이 이 지역에 묻히기도 하였다. 국왕에게 촉망받았던 귀족은 물론 그 가족까지 묻히는 경우가 있었으며, 이는 파라오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왕가의 계곡’ 내에서 '왕릉'이라 부를 만한 곳은 20여 기에 불과하다. BC 1301년 람세스 1세 시기에는 여왕을 위한 공동묘지로서 ‘여왕의 계곡’이 조성되기도 했다. ‘왕가의 계곡’에 조성된 왕릉은 도굴 방지를 위해 수직 갱도를 만들고 관을 숨기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썼지만, 도굴꾼들을 막을 수 없었다. ‘왕가의 계곡’에서 도굴당하지 않은 묘는 투탕카멘 묘밖에 없었다.
18세기 이전에는 이 지역은 관광지에 불과했으며 특히 로마제국이 이집트를 점령할 당시 외부인의 방문이 잦았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외부인이 ‘왕가의 계곡’을 자주 방문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로 계곡 내 무덤 곳곳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낙서가 있다.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낙서의 수가 2,100건 이상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페니키아어, 콥트어 등의 소수 언어로 적힌 낙서도 심심찮게 발견되었다. 어떤 한 무덤에서 고대인의 낙서가 천여 개 남짓 발견되어, 전체 낙서 중에서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가장 오래된 낙서의 연대는 BC 2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왕가의 계곡’은 18세기말부터 근대 이집트학 연구의 총본산으로 변모해 왔다.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당시 동행한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왕가의 계곡’을 방문하여, 계곡 전체 지도와 당시 외부에 노출되어 있던 무덤의 평면도를 처음으로 작성하였으며, 서쪽 계곡의 아멘호테프 3세 무덤에 대해서 처음으로 기록을 남겼다. 19세기 중반부터 유럽인의 테베 유적 탐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때마침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이 처음 이뤄지면서, 계곡의 무덤 내에 있는 글귀를 완전히 해독할 수는 없어도 신왕국 시대 파라오들의 무덤임을 알아내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왕가의 계곡’에 있는 각 무덤에 순번을 매기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지켜지고 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왕가의 계곡’을 방문한 유럽 고고학자들은 단순한 유물의 수집보다 무덤 보존을 위한 노력을 더 많이 기울였다.
20세기 들어 영국의 고고학자가 여러 개의 무덤을 새로 발견하고, 일부 무덤의 내부를 발굴하였다. 20세기에 접어들 무렵에는 미국의 탐험가가 발굴 허가를 받아 여러 개의 왕족 무덤과 일반 무덤을 발굴하였다. 이후 ‘왕가의 계곡’ 전역의 탐사를 완료하였으며, 더는 무덤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발표하였다. 그 뒤 ‘왕가의 계곡’의 발굴 허가는 영국의 학자들에게 넘어갔다. 영국의 발굴단은 계곡 전체에 대한 체계적인 수색 끝에 1922년 11월 투탕카멘의 실제 무덤을 발견하는 데 성공한다. 현재도 '왕가의 계곡'에서는 새로운 무덤이 발견되고 있으며, 기존에 발굴된 무덤에 대한 재조사와 더불어 테베 유적지 연구에도 보탬이 되고 있다.
무덤 대부분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동쪽 계곡의 무덤 중에서 18곳은 일반에 개방되어 있으나 이마저도 모든 무덤이 동시에 개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관계자의 복원 작업을 위해 폐쇄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투탕카멘의 무덤을 방문하는 관광객에게는 별도 입장료가 부과된다. 서쪽 계곡에는 개방된 무덤이 단 한 곳뿐이며 이곳 역시 별도 입장료가 부과된다. 예전에는 무덤 내 가이드의 설명이 가능했으나 현재는 불허되어 무덤 입장 시 일렬로 조용히 줄 서서 통과해야 한다. 이 같은 조치는 외부인이 무덤에 머무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장식으로 가득한 무덤 내부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1997년에는 ‘왕가의 계곡’ 인근 유적지에서 이슬람 무장세력이 테러를 일으켜 관광객과 현지인 여럿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왕가의 계곡’을 방문하는 관광객 규모가 감소하는 일이 있었다.
나일강의 서편에는 ‘왕가의 계곡’의 무덤군 이외에 장제전이 유명하다. 가장 잘 알려진 장제전은 핫셉수트 장제전이다. 이는 18 왕조의 핫셉수트 여왕이 8년에 걸쳐 건축한 장제전으로 ‘왕가의 계곡’ 뒤편에 있다. 여왕 자신과 여왕의 부친인 투트모세 1세를 기념하기 위한 신전으로 이 신전 지하에 여왕의 시신이 매장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신전 3층에는 과거에 콥트교 수도원이 들어서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모두 철거되었다.
멤논의 거상은 룩소르의 나일강 서쪽에서 제일 처음으로 만나는 두 개의 석상을 말한다. 원래 아멘호텝 3세의 신전 입구에 있었는데, 신전은 범람이 잦은 평지에 가까이 세워져 이제는 자취를 감추고 두 개의 석상만이 길옆에 남아 있다. 높이가 17.9m인 이 석상은 파라오가 옥좌에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린 모습을 하고 있다. 석상 중 하나는 거대한 바위 하나를 조각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개의 바위를 쌓아가며 조각한 것이다. 석상은 BC 27년에 지진으로 금이 생겼다. 그즈음에 그리스 여행객들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멤논을 닮았다고 여겨서 ‘멤논의 거상’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