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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트 강 May 18. 2024

E20. 고래논과 천수답

 필자가 어려서 농사짓기에 좋은 논을 고래논이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 당시에 농사짓기에 좋은 논은 물이 있는 논을 의미하였다. 모내기 때부터 어느 정도 벼가 익을 때까지 논에 물이 있으려면 주위에 반드시 샘이 있어야 했다. 왜 그런 논을 고래논이라고 했을까? 의문이 들었었는데 50여 년 전에 채록한 바에 따르면 울산시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기인한다고 한다. 옛날에 울산에 살던 어부가 고기잡이를 하러 바다에 나갔는데, 갑자기 큰 물결이 일어나더니 고래에게 먹히고 말았다. 고래의 배 안에서 깨어난 어부는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던 중 가지고 있던 낫으로 고래의 뱃가죽을 찔렀다. 고래 뱃가죽이 찢어지면서 그는 고래 밖으로 구사일생으로 나올 수 있었다. 육지로 살아 돌아온 어부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큰 고깃배를 타고 고래를 찾아 나서서 핏빛으로 물들어 있는 바다에서 죽어 있는 고래를 발견하였다. 죽은 고래는 초가삼간 다섯 채를 합한 만큼 컸다. 그는 배로 고래를 육지에 끌고 와 팔아서 그 돈으로 물이 넉넉해 농사짓기에 좋은 논 세 마지기를 샀다. 그 후 그가 산 논을 ‘고래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와는 반대되는 말로 천수답(天水畓)이라 있었는데, 벼농사에 필요한 물을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에만 의존하는 논을 말한다. 저수지나 강으로부터 물을 끌어 대거나 지하수를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전혀 없는 지역의 논으로서, 근래 한국은 수리개발사업(水利開發事業)을 꾸준히 추진하여 천수답의 면적이 크게 줄었다. 천수답은 모내기 철에 충분한 비가 오지 않으면 모내기가 늦어지기 때문에 늦심기가 되기 쉽고, 모를 낸 후에도 가뭄에 의한 피해가 있어서 안정된 수확량을 기대하기 어렵다. 수리시설을 확충하거나 논 이외의 다른 용도 즉 밭벼를 심거나 비닐하우스를 이용하여 채소나 과일을 재배함으로써 천수답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려고 노력하였다.

      

 영어로 논을 paddy field라고 하는데, paddy는 ‘벼’를 뜻하는 말레이어 padi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논은 물에 잠긴 채로 있는 농경지로, 한자로 ‘물 아래에 있는 밭’이라는 뜻으로 답(畓)이라고 쓴다. 논에서는 주로 벼 같은 수생식물을 재배한다. 밭벼의 경우처럼, 벼는 원래 건조한 땅에서도 재배할 수 있었지만, 20세기부터 논에서 재배하는 것이 벼농사에서 우위를 차지하였다. 논은 주로 벼를 재배하는 아시아 지역의 국가에서 많이 볼 수 있지만, 이 지역 외에도 벼를 재배하는 지역인 이탈리아의 피에몬테주, 프랑스의 카마르그, 미국의 캘리포니아주에서도 볼 수 있다.


 논은 주로 하천이나 늪지대에 만들어진다. 흔히 가파른 산허리에서는 많은 노동력과 자원이 필요하며, 들판을 관개하는 데에는 물이 많이 필요하다. 범람하는 물의 공급이 벼의 성장에 가장 중요하며, 물이 여러 잡초의 성장을 억제하는 것도 벼의 성장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한다. 벼농사는 대량의 메탄가스(CH4) 발생으로 인해 환경에 악영향을 준다. 메탄가스로 인한 온실가스의 발생 수준은 지구 온난화라는 위협을 가져올 정도의 수준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논은 중간에 물 대기를 떼는 물때기를 통해 농작물의 생산성이 향상되는 동시에 메탄 발생량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옛날에는 논이었을 서울 성동구의 왕십리(往十里)와 동대문구 답십리(踏十里) 일대가 오늘날에는 모두 주택가나 상가로 바뀌고 지하철이나 전철이 다닌다. 신답(新踏)이니 용답(龍踏)이라는 역명이 존재한다. 답(踏) 자는 다리 족(足) 변에 논 답(畓)인데 논이 있는 벌을 직접 다리로 걸어서 돌아본다는 뜻이다. 오늘날도 각종 모임에서 어디를 가게 되면 실무진들이 미리 해당 지역을 답사(踏査)한다.

      

 필자의 고향인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무건리는 산골로서 마을에서 사용하는 우물물을 댈 수 있는 논이나 샘물이 솟아나는 논배미 근처의 논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천수답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농사를 지어온 필자의 부친이나 조부는 모낼 때가 되면 논에 물을 끌어오는 일이 큰일이었다. 개울에 보를 막아 물을 모으고 우리 땅까지 수로를 뚫어야 했고, 가뭄이 깊어지면 양동이를 들고 들에 나가 물을 퍼서 논에다 부어야 했다. 그런 고향이 군부대에 훈련장으로 수용되고 떠나 외가와 연고가 있는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로 이주하였다. 옛날에 살던 곳보다 더 넓은 지역으로 옮겨오게 되었고, 적은 정부의 토지보상금으로는 동네 산 밑에 있는 천수답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 이사 온 지역에는 벌에 수리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부친은 수리조합이 있는 지역에서 천수답 농사를 지어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필자가 6년여 만에 미국 유학에서 돌아오니까 산 밑에 있던 논이 모두 수리조합 물이 들어오는 들판의 논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뒤에 마을 뒷산에는 대기업의 디스플레이 제조공장이 들어서고 포장된 진입로가 넓게 뚫렸다. 개발 소식을 미리 입수한 사람들이 가격을 잘 쳐줘서 천수답을 몽땅 사들이고 그 대금으로 천생 농사꾼이셨던 부친은 절대농지인 수리조합 논을 샀다.

     

 경작지로 물을 끌어 농사를 짓는 수리 사업 혹은 치수 사업은 인류의 문명을 바꾸어 놓는 일대 사건이었다. 미국의 서부 캘리포니아 지역에서는 로키산맥의 얼음 녹은 물을 관개하여 사막과 같은 캘리포니아 분지를 옥토로 만들었다. 이스라엘은 요단강 물을 상류에서 끌어드리고 별도의 수로를 통하여 하류 지역에 물을 공급하여 사막 지역에서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남부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가 보면 옛날에 건설한 수도교(水導橋) 유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이는 로마제국 시절에 건설했다고 한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수평으로 퍼져 나간다. 만약 수로(水路)가 수평(水平)이 맞지 않으면 물은 더 이상 흐르지 못한다. 수로는 약간의 내리막 경사를 갖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중간에 에너지를 들여 펌프로 물을 높은 곳으로 퍼 올려야 한다. 그리고 중간에 누수가 되지 않아야 목표 지점까지 물이 전달된다. 누수를 막기 위한 별도의 공사도 해야 한다.

     

 우리나라도 까마득한 옛 왕조 시절부터 저수지와 수로 건설에 노력하였다. 수원 지역에 있는 만석거(萬石渠)도 그 한 예이다. 일제 시절에 수원군(水原郡) 일형면(日荊面)과 의왕면(儀旺面)을 합쳐서 일왕면(日旺面)으로 행정 구역이 개편되면서 ‘일왕저수지’로 부르기도 했다. 현재는 의왕시(義王市)에 있다. 만석거는 30여 년 전에 만석공원 조성으로 저수지 일부가 매립되어 원래의 규모보다 많이 축소되었지만, 현재는 만석공원으로서 시민들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만석거는 조선 정조 때 축조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용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축성하면서 이 성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네 개의 저수지를 축조하였는데, 북쪽에 조성한 것이 만석거이다. 이 저수지들은 수원성인 화성(華城)을 수축(修築)하면서 장용위(壯勇衛)를 설치하게 되자 사관 병졸들의 급료나 기타의 경비에 충당하기 위한 화성둔전(華城屯田)에 물을 대려고 판 것이었다.     

 수원화성 축성 도중에 극심한 가뭄이 들자, 정조는 화성 공사를 중지하고 가뭄에 대비한 구휼(救恤) 대책과 농가의 이로움, 수원화성 운영 재원 마련을 위해 황무지 위에 만석거를 조성하였다. 만석거는 당대 최신식 수문과 수갑을 설치하였으며, 여기에 모인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하여 대규모 농장인 북돈(北屯)을 설치하였다. 저수지 가운데에 작은 섬을 두어 꽃과 나무를 조화롭게 심었고 호수에는 연꽃을 심었으며, 호수 남단의 약간 높은 곳에는 영화정(迎華亭)을 세워 만석거 부근을 조망할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누렇게 익은 벼가 황금물결을 이루는 풍경은 ‘석거황운(石渠黃雲)’이라 하여 수원 추팔경(秋八景)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한편 정조의 네 개의 저수지 중에서 동쪽에 축조한 저수지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남쪽에 축조한 저수지는 사도세자 묘역인 화산(花山) 현륭원(顯隆園) 앞의 만년제(萬年堤)이고, 서쪽에 축조한 저수지가 축만제(祝萬堤)인데 오늘날 서호(西湖)라고 불린다. 이 저수지들은 수원성인 화성(華城)을 수축하면서 장용위(壯勇衛)를 설치하게 되자 사관 병졸들의 급료나 기타의 경비에 충당하기 위한 화성둔전(華城屯田)에 물을 대려고 판 것이었다.     

 왕송(旺松) 호수는 의왕시 남쪽에 있는 호수로서 의왕(儀旺)과 화성시 매송면(梅松面)에서 한 글자씩 따 와서 작명하였다고 한다. 해방 후인 1948년 황구지천 하천 유역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하류의 지역들이 모두 도시화 되면서 농업용으로는 덜 쓰이게 되고 주로 관광지로 역할하고 있다. 한때 주변에서 폐수가 많이 유입되어 농업용수로서 기능을 상실했고, 정수 시설이 갖추어지면서 맑은 수질을 되찾았다. 호수를 찾는 주민이 늘어나면서 의왕시(義王市)는 이 일대를 환경생태공원으로 꾸며 토종 꽃과 식물을 심어 자연학습공원을 조성하였다. 주변에 철도박물관, 백운호수, 청계사 등의 관광지가 있고, 지하철 1호선 의왕역에서 편리한 교통 때문에 관광객이 늘고 있다. 수면이 넓어 호반의 정취를 느낄 수 있으며, 붕어나 잉어 등이 많이 잡혀 낚시터로도 널리 알려졌으나, 지금은 낚시 금지구역으로 지정되었다. 하수종말처리장이 가동되면서 수질개선이 이루어져 여러 종류의 철새들이 많이 찾아 철새들의 낙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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