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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트 강 May 19. 2024

E21. 예루살렘

 예루살렘(Jerusalem)은 팔레스타인 지방의 중심부로 지중해 연안 평야와 요단강 계곡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사해의 북쪽에서 약 28km 떨어져 있고 유대 산맥 언저리에 해발 780m에 위치하며, 동쪽으로는 기드론 골짜기와 남쪽으로는 힌놈 골짜기의 가운데 솟은 구릉에 있다. BC 약 3,000년 이후로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다고 추정된다. 예루살렘은 산악 지형이 가진 장점을 살려 외부 침입을 쉽게 막을 수 있는 성채를 중심으로 서서히 도시의 윤곽이 잡혀갔다. 예루살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생겨난 세 가지 종교인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성지이다. 이 도시를 두고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국가와 민족 분쟁이 있다. 예루살렘은 동서로 나뉘어 있는 상태이다. 이스라엘의 경우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고 있으나, 국제 사회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텔아비브가 사실상 수도 역할을 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히브리어로 ‘평화의 마을’을 뜻한다. 예루살렘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고대 가나안 신앙에 등장하는 평화의 신인 살렘을 모시는 사원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경 창세기 14장에 보면 하란 지방에서 이주해서 가나안 지방에 정착하려는 아브라함에게 살렘 왕 멜기세덱이 축복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예루살렘의 아랍어 이름인 알꾸드스는 아랍어로 ‘신성한 도시’를 뜻한다. 알꾸드스라는 지명은 9세기에 모슬렘 세력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옛날부터 예루살렘 주민들은 가나안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에게 일신교 신앙이 있었고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통하여 여호와 중심의 독특한 신앙으로 발전했다고 보고 있다. 성경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의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러 모리아 산으로 가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모리아 산 자리가 오늘날 예루살렘이라고 보고 있다. 또 창세기 23장에 따르면, 하란 땅에서 와서 가나안 지방에 정착한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가 죽자, 헤브론의 굴을 매장지로 샀다고 나온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이 지역을 중요한 자리로 생각하였다.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여호수아에 이르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 이스라엘 백성의 중심 세력이었던 갈렙은 헤브론을 우선 할양받고 그가 속한 유다 지파는 이 근방을 기업으로 배분받았다. 성경 사무엘하 5장 6~10절 등에 의하면, 유다 지파인 다윗 왕이 구릉에 있는 '시온성'이라 불리던 도시를 정복하고 유대인들은 이곳을 '다윗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때가 대략 BC 10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다윗의 영도 아래 예루살렘은 통일왕국의 수도가 되고 역사의 중심 무대로 등장한다. 다윗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에 왕궁과 신전 및 성채를 새로이 건설하고 언약궤를 신전 안에 보관하였다고 열왕기상 6장~8장에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솔로몬이 세상을 떠나자,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리고, 예루살렘은 남조(南朝) 유다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예루살렘이 있는 산지는 여호수아 18장 11~20절에 의하면 원래 베냐민 지파에게 분배된 지역이었다. 중앙산지를 남북으로 가로 지나가는 ‘분수령 길’의 동편에 있는 예루살렘에서 가장 모자라는 요소는 비옥한 농경이다. 다윗이 이러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택한 배경은 다음의 네 가지 요소로 지적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제1의 조건은 예루살렘의 급수원이다. 예루살렘은 기드론 골짜기 안에 있는 기혼샘과 엔로겔이라는 두 수원에서 식수를 공급받았다. 예루살렘이 확장되고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빗물을 모아 저장하는 저수조 시설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두 번째 요인은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쉬운 전략적 측면이다. 예루살렘의 북쪽을 제외한 세 방면은 자연 방어선 역할을 하는 계곡들로 둘러싸여 있다. 북쪽은 계곡과 같은 자연적인 방어선이 없이 직접 산지와 연결되어 있다. 세 번째 요소는 편리한 교통로이다. 이스라엘 내의 중요한 남북 간선도로와 동서 간선도로가 이 지역에서 교차한다. 이런 간선도로의 교차점이라는 이점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다른 불리한 지리적 여건을 극복하고 정치, 행정, 종교의 중심적 도시로 성장하였다. 네 번째 요소는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지파 간의 이해관계가 없는 중심적 도시라는 점이다. 다윗이 점령할 당시 예루살렘은 가나안의 여부스가 차지하고 있었다. 곧 이곳은 이스라엘의 지파에게 분배되지 않은 중립적 성격의 도시였다, 다윗이 이 지역을 수도로 정한 것은 이스라엘 여러 지파 간에 생길 수 있는 갈등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도시의 이름이 초기에는 ‘다윗성’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이 도시가 다윗 개인 소유임을 강조한 명칭이었다. 다윗의 정치적 입지가 공고해진 이후 ‘예루살렘’이라는 공식적인 이름으로 바뀌었다.

     

 예루살렘은 사면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예루살렘 주변에 있는 산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원래의 예루살렘이 있었던 곳은 660m 정도 높이의 ‘시온산성’이다. 이곳은 아브라함에게 빵과 포도주를 제공하였던 살렘왕 멜기세덱의 거처였으며 다윗이 점령하여 ‘다윗성’이라고 개명한 여부스의 요새였다. 시온산 북쪽에 모리아 산이 있다. 다윗이 통치하던 시대에 이곳은 여부스 사람의 타작마당이 있었는데 다윗이 이를 사서 번제 제단으로 삼았다. 솔로몬은 이곳에 장엄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였다. 시온산의 서쪽에는 ‘서산’이라는 765m 높이의 언덕이 있다. 예루살렘 동편의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에는 810m 높이의 ‘감람산’이 있다. 예수는 생애의 마지막 주간을 예루살렘에서 보냈는데 그동안 감람산을 자주 찾았다. 감람산 밑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은 십자가를 지기 전 마지막 기도 장소였다. 부활하신 예수는 감람산 정상에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였다. 오늘날 감람산과 그 주변에는 예수의 마지막 생애와 관련된 기념교회들이 여럿 있어서 관광객을 끌고 있다.

     

 예루살렘 주변에는 삼면으로 마치 삼지창 모양의 세 개의 골짜기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다. 세 골짜기의 물은 다윗성 남쪽 부분에서 만나 유다 광야 쪽으로 흘러 내려가 사해로 유입된다. 예루살렘 서쪽에는 L자 모양으로 휘어져 있는 ‘힌놈의 골짜기’가 있다. 이곳에서 예루살렘에서 버려진 쓰레기를 태워서 항상 불과 연기로 가득 차 있어서 힌놈의 골짜기는 사람들에게 지옥의 모습으로 인식되었다. 삼지창 모양에서 가운데에 해당하는 골짜기는 서편산과 시온산 사이를 가로지르는 남동 방향의 골짜기이다. 삼지창 모양에서 가장 오른쪽에 있는 골짜기는 ‘기드론 골짜기’이다. 예수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제자들과 함께 이 골짜기를 건너 겟세마네로 가서 기도하였다.

     

 예루살렘의 급수 문제는 샘과 물 저장 시설과 인공 연못 등으로 해결하였다. 다윗성 아래의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샘’은 예루살렘의 급수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기드론 골짜기와 힌놈의 골짜기가 만나는 지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남쪽에 ‘엘로겔’ 샘이 있다. 앗수르의 공격을 방비하기 위한 준비로 히스기아 왕은 기드론 골짜기의 기혼샘 입구를 막고 다윗성 바로 밑을 통과하여 예루살렘 성내에 이르는 약 480m 길이의 지하수로를 건설하였다. 이 지하수로를 오늘날 ‘히스기야의 수로’라고 부른다. 역대하 32장에 의하면 이 수로의 완성으로 유다는 앗수르 군대의 침입과 예루살렘 포위 공격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으로 식수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이 수로의 마지막 부분에 마련된 인공연못이 ‘실로암’이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실로암은 예수가 눈먼 자의 눈에 진흙을 바르고 그를 보내어 이 물에 눈을 씻게 함으로써 그의 눈을 고쳐 준 곳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이 있는 유다 산지는 일종의 '닫힌 지역'이다. 산지의 서쪽은 다섯 개의 계곡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지역은 비옥한 지역이다. 해안에 사는 강한 블레셋 민족은 항상 이 지역을 장악하려 했으나 고도가 800m나 되는 유다 산지에서 블레셋의 철병거(鐵兵車)는 힘을 쓰지 못하였다. 유다 산지의 동쪽은 막막한 유다 광야와 가파른 요단강 계곡이 있어 천연요새 역할을 한다. 그리고 남쪽에는 네게브 광야가 있다. 네게브 쪽의 유다 산지도 고도 800m가 넘고 네게브의 산지들이 만만치 않게 높다. 유다 산지 북쪽은 사마리아 산지와 갈릴리 산지가 있다. 남북으로 분리된 후 유대 왕국은 동족인 이스라엘 왕국과 국경 분쟁을 자주 했지만, 북방 이스라엘 왕국은 남방 유다 왕국을 위해 일종의 방파제 역할을 했다. 외부 적의 공격은 먼저 그리고 늘 북방 이스라엘 왕국에 향했고, 그다음이 남방 유다 왕국이었다. 결국 이스라엘 북부의 개방 지역과 이스라엘 남부의 닫힌 지역은 이스라엘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북방 이스라엘 왕국은 열린 지역을, 남방 유다 왕국은 닫힌 지역을 각각 통치했다. 이 덕분에 유다는 에브라임 또는 이스라엘보다 약 140년 늦게 멸망당했다. 요한복음 4장 22절에 의하면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나오므로 메시아가 나오기까지 유다 지파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다. 이것은 야곱이 창세기 49장 10절에서 예언하였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治理者)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야곱의 이 예언을 다르게 분석하면, 실로가 오면 유다의 홀은 끝난다. 여기서 실로는 메시아 곧 예수를 뜻한다. 유다 지파에서 예수의 출생은 유다 지파의 주된 사명이 끝났음을 암시한다. 이때까지 유다 지파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보존되었다. 그러나 이사야 6장의 예언처럼 유대인의 목이 굳어져서 마음이 둔하게 되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된다. 메시아를 부정한다면 유대인은 하나님 앞에서 존재의 의미를 잃는다. BC 587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정복되어 유다 백성들은 노예로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1970년대 후반쯤에 팝송 가수 보니엠(Boney M)이 부른 ‘바빌론의 강가에서(Rivers of Babylon)’ 노래는 그 당시 유대인들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주로 성경 시편 137편에서 따온 것이다. BC 537년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유화책으로 석방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였다. BC 63년 팔레스타인 지역이 로마에 정복된 이래로 원래의 하스몬 왕조와 일진일퇴 끝에 BC 37년 로마의 지원을 받은 헤롯이 분봉왕 즉위와 동시에 성전을 개축하였다. AD 70년에 있었던 성전의 파괴는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작정에 따랐다. AD 70년, 135년 두 차례의 유대인의 봉기가 있자 로마는 이 반란을 무자비하게 제압하고 모든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하고 예루살렘을 '이방인의 도시'라 했다. 이로써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가 되어 전 세계에 흩어졌다.

     

 세월이 흘러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됨에 따라 교회가 많이 세워졌다. 예루살렘 지역이 성지순례 등으로 다시 활기를 띠고, 로마 지역이었던 유럽을 비롯한 지역에 예수를 믿는 사람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638년 아랍의 이슬람교도들이 예루살렘을 정복했으나, 그들은 기독교의 성지를 존중하였다. 이때 이슬람 사원이 솔로몬의 성전 터에 세워졌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을 무차별 학살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다. 이때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들의 기독교인에 대한 적대감이 생겼다고 보고 있다. 1187년 이집트의 모슬렘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1260년 몽골군이 예루살렘 근방까지 육박했으나 모슬렘이 이들을 몰아냄으로써 마므륙 왕조의 성지 관할권이 확립되었다. 1516년 티르키에 모슬렘인 오스만 제국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400년 내내 지배하였다. 1538년에 마지막으로 성벽이 재건되었다. 이 성벽은 예루살렘 구시가를 형성했는데 19세기 초반에는 유대인, 기독교도, 모슬렘, 아르메니아인 구역으로 나뉘었다. 1853~1856년에 있었던 크림 전쟁 중에 러시아, 영국, 프랑스 사이에 예루살렘 관리권이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1차 대전 중인 1917년 예루살렘은 영국에 점령되어 위임통치령으로 확정되었다. 이후 러시아와 동유럽에 있는 유대인들이 대대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돌아왔다.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예루살렘은 동(요르단령)과 서(이스라엘령)로 분리되었다. 1967년 6월 제3차 중동 전쟁 당시에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전체를 점령하였다. 1980년 이스라엘 국회인 크네세트는 예루살렘 전체를 ‘분리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수도’로 규정한 법률을 통과시켰지만,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에 있는 각국의 대사관과 대표부는 예루살렘 대신 텔아비브에 있으며 사실상 텔아비브가 이스라엘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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