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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트 강 May 20. 2024

E22. 천로역정

 천로역정(天路歷程, Pilgrim‘s Progress)은 17세기 영국의 작가이자 침례교 설교가인 번연(John Bunyan, 1628~1688)의 작품이다. 당시 독실한 청교도들의 신앙과 신학을 비유 형식의 소설로 설명하고 있다. 목사인 작가 번연이 일반인에게 기독교의 원리를 교육하려고 쓴 일종의 계몽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주인공 그리스도인(Christian)이 ‘멸망의 도시(City of Destruction)’ 곧 멸망을 앞둔 장망성(長亡城)을 떠나서 하늘나라(Celestial City), 곧 천성(天城)을 향하여 여행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등장인물의 이름을 고집불통(Obstinate), 변덕쟁이(Pliable), 친절(Goodwill), 절망(Despair), 어수룩(Simple), 분별(Discretion), 잔혹(Cruelty), 무신론자(Atheist) 등으로 짓는 등 우화 형식으로 작가는 소설을 쓰고 있다. 그리고 본문에 등장인물을 묘사하는 삽화를 그려 넣었다. 주인공이 장망성을 떠나 천성(천국)에 이르기까지 겪게 되는 고난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저자의 생전에 이미 11판까지 나왔고 판마다 1만 부씩이나 인쇄되었다고 한다, 이 부수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숫자였다. 역대 신앙 서적 중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천로역정’은 종교, 우화, 문학을 널리 아우른 역사적인 고전이자 가장 널리 번역된 작품이다. '천로역정’은 작가 번연의 일생을 불살은 책으로서, 사람들에게 뜨거운 감동을 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 은혜의 개념이 무엇인지 드러내고자 쓴 책이며,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준다.

     

 ‘천로역정’은 원래 상하권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그리스도인의 모험’, 2부는 ‘아내와 자녀들의 모험’으로 되어 있다. 상권은 1678년에 런던에서 출판되었으며, 하권은 1684년에 출판되었다. 작가 번연이 영국 국교회파의 탄압으로 처음 투옥되어 12년 동안 감옥에 있었는데, 두 번째 투옥된 1675년에 ‘천로역정’ 원고를 집필하여 완성하였다. 상하권 합본은 1728년에 처음 출판되었다. 또한 1693년에 출판된 ‘순례자의 길(The Pilgrim's Progress from This World to That Which Is to Come)’은 1852년 재판(再版)되었다. 책이 1678년 처음 출간된 지 350년을 바라보는데 영어 문체가 오래전 것이라 그동안 나중 세대의 쉬운 영어로 편집되어 독자들에게 읽혔다.

      

 이 소설은 최소한 100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우리나라에는 1895년 캐나다 선교사이자 장로교 목사인 게일(James S. Gale, 1863~1937)이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당시 외래 문학책들이 대부분 중국어나 일본어 원고를 번역하여 소개되었지만, ‘천로역정’은 원본인 영어 원고를 번역했으며, 한국 근대의 첫 번역 소설이다. 한글 ‘천로역정’에는 영문판과 유사하게 본문 옆에 삽화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글 번역 원본의 서명인 ‘천로역정’을 비롯하여 사용한 인명들이 대부분 한자에 익숙한 세대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 책의 이름이 요즘 말로는 ‘순례자의 길’이 적절하겠으나 지금도 이 책은 처음 소개된 ‘천로역정’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는 고등학교 시절에 작가와 책 이름은 배워서 암기하고 있었으나 막상 평생 그 책을 읽어 보지 않았음을 알고, 이번 기회에 중고 서점에서 책을 사서 읽어 보았다.

      

 ‘멸망의 도시’에 사는 한 남자인 크리스천이 무거운 짐을 지고 ‘멸망의 도시’에서 나와 ‘천성’으로 가려고 길을 나선다. 그의 아내는 크리스티나(Christiana)인데 그의 이름 크리스천(Christian) 뒤에 a 자를 하나 덧붙이면 된다. 그의 큰아들은 야고보(James)이고 막내아들은 다윗(David)이다. 그의 딸들 이름은 캐서린(Kathleen)과 레베카(Rebecca)이다. 그는 집을 나선 후 복음전도자(Evangelist)에게 길을 묻지만, 곧 절망의 수렁에 빠지고 도움(Help)을 만나 두려움의 장소인 수렁에서 빠져나온다. 그는 ‘율법의 언덕’을 지나 문지기인 친절(Goodwill)의 안내를 받아 ‘빛나는 문’에 들어서고 해설자(Interpreter)를 만난다. 해설자의 집에서 율법의 비질과 은혜의 비질을 경험하고, 물을 붓는 사람과 기름을 붓는 사람을 본다. 마귀는 물을 부어 불 곧 은혜의 역사를 끄려고 애쓰지만, 그리스도는 불 뒤에서 사람들 마음 안에 이미 시작된 은혜의 역사를 더욱 불붙게 하려고 조용하게 기름을 부으며 일하고 있다. 거기서 그는 절망(Despair)을 만나고 가파른 ‘십자가의 언덕’을 오르면서 등에 진 무거운 짐이 벗겨진다.

     

 그 뒤 크리스천은 ‘백리향 풀밭’을 지나 두루마리를 받고 ‘고난의 산’을 힘겹게 통과해서 ‘아름다운 궁전’에 들어간다. 거기서 분별(Discretion), 신중(Prudence), 자비(Charity), 경건(Piety)이라는 네 아가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격려를 받는다. 네 아가씨로부터 방패, 흉패, 투구, 장갑 등의 무기를 선물로 받고 궁전의 높은 망루에 올라가 임마누엘의 땅 ‘기쁨의 산(Delectable Mountain)을 바라본다. 네 아가씨와 작별한 크리스천은 믿음(Faithful)이라는 멸망의 도시에 살 때의 이웃을 만나 함께 '겸손의 계곡(Valley of Humiliation)' 안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아볼루온(Apollyon)과 혈투를 벌여 임마누엘의 섭리에 따라 이기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Valley of the Shadow of Death)'를 지난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한 후 고향의 이웃이었던 믿음(Faithful)을 다시 만나 각자의 여행 동안에 경험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크리스천과 믿음은 ‘허영의 시장(Vanity Fair)’으로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물건 사기를 거부하여 억울하게 철창에 갇히고 결국 재판에 회부되고, 믿음은 유죄를 받는다. 크리스천은 법정이 소란한 틈에 소망(Hope)이라는 청년과 함께 ‘허영의 시장’을 탈출한다. 크리스천과 소망은 탈출 후에 이기심(By-ends)이라는 신사를 만나는데 그는 중간에 둘을 따라가지 않고 세 명의 다른 길동무와 같이한다. 둘은 ‘광산언덕’으로 가는 도중에 재물(Lucre)이라는 노인을 만나 부에 대한 유혹을 받는다. 소망은 재물의 유혹에 잠깐 솔깃하나, 크리스천의 유도로 재물의 유혹을 벗어난다. 두 사람은 롯의 아내를 연상시키는 여인의 동상을 지나 강가에 이르러 복숭아와 배를 따서 먹고 ‘아담한 풀밭’에 누워 잠을 청하게 된다.

      

 다음 날 아침에 다시 길을 떠난 두 사람은 아담한 ‘풀밭의 유혹’을 받았으나 결국 뿌리치고 풀밭을 헤매다가 비를 만나 길을 잃고 결국은 잠이 깊이 들고 만다. 두 순례자는 자다가 절망 거인(Giant Despair)에게 붙잡혀 지하감옥에 갇히게 된다. 지하감옥에서 절망 거인에게 매일 아침 구타를 당하던 두 순례자는 천성 길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가지고 있던 두루마리를 읽어서 나온 열쇠로 감옥을 탈출해서 의심의 성을 빠져나와 곧은길로 들어선다. 두 사람은 ‘기쁨의 산’에 당도하여 지식(Knowledge), 정직(Sincere), 경험(Experience), 주의(Watchful)라는 네 명의 목동의 안내를 받아 산 정상에 올라서 ‘실수의 벼랑(Cliff of Error)’을 조심스럽게 구경한다. 두 사람이 이곳을 떠나 천성으로 가는 길에 ‘속이는 자(Deceiver)’를 조심할 것과 ‘마법에 걸린 땅(Enchanted Ground)’에서 절대 잠들지 말라는 조언을 목동 경험으로부터 듣는다.

      

 천성으로 가는 도중에 두 사람은 두루마리가 없는 사람의 종말을 보고, ‘속이는 자’의 속임에 말려드나, ‘빛나는 존재(Shining One)’에게 구출되어 곧은길로 들어선다. 두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다가 잠에 들고, 다음날 무신론자(Atheist) 교수 노인을 만나 유혹을 받고 마법에 걸린 땅에서 졸렸으나 참고 마침내 쁄라(Beulah) 나라에 도달한다. 그리고 사망의 강(River of Death)을 건너 크리스천과 소망은 마침내 천성에 들어간다. 천성문으로 들어가는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의 모습이 변한다. 그들은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밝은 옷을 입고, 새로운 찬양을 노래한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님은 거룩하다. 크리스천은 황금빛 거리를 걸어 보았다. 그가 도시로 들어가니 누군가가 그의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려주었다. 그는 찬양하며 그 땅의 주인인 임마누엘을 만나러 갔다. 그는 천성문이 닫히기 전에 그곳의 거리를 힐끗 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 모든 게 꿈이었다.

     

 천로역정은 꿈에 보는 천국에 이르는 길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유럽 기독교인의 성지순례에 대한 열망을 밑바탕에 두고 있다. AD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의 정식 국교로 선포된 후에 당시 황제의 모친은 친히 예루살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러보았다. 이를 통해 팔레스타인 지역이 유럽인들의 성지순례 장소로 부상하였다. 역사적으로 '성지의 소유권 혹은 정당성'을 두고 관계되는 세력 간에 반목을 거듭하다가 AD 10세기경에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다. 예루살렘 성지 관할 문제는 중세 시대에서 끝난 게 아니라 근현대까지도 계속 이어져 왔다. 대표적으로 19세기 유럽 열강인 프랑스나 러시아 제국은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예루살렘 성지의 관리 문제에 개입하려 했다. 지금도 아랍 세력과 유대 세력 간에 싸움이 치열하다. 서양 중세의 성지순례를 관광 산업의 초기 형태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옛날에는 배로 이동하고 직접 걸어야 했으므로 몇 달이 소요되었다. 세력자가 여행을 계획하고 비용을 충당하면 그 수행자들은 노력으로 봉사하고 더불어 구경하는 방식이다. 오늘날에는 여행자가 여행사에 정해진 비용을 지출하면 여행사는 관광단을 구성하고 비행기와 버스로 이동하여 며칠이면 성지순례가 끝난다.

     

 성지순례(聖地巡禮, Pilgrimage)란 성지를 차례로 찾아가 참배하는 것으로, 종교적 의무 또는 신앙심 고취를 목적으로 하는 여행이다. 순례라는 말은 '먼 곳을 방랑함'을 의미하는데 힌두교와 남방불교의 순례 개념을 천착해 보면, 성지순례란 성지를 향해 '건너가는' 행위와 그 성지에 대해 '예경'(禮敬)을 표하는 행위이다. 어느 종교냐에 따라, 가는 곳이 다르다. 가장 유명한 성지로 예루살렘이 있으며, 이곳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3개 종교의 성지로, 같은 도시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형을 당한 성묘 교회도 있고, 유대교의 예루살렘 성전을 로마제국이 파괴한 뒤 그 자리 위에 이슬람이 세운 바위의 돔, 그리고 성전의 남은 흔적인 통곡의 벽 등이 뒤섞여 있다. 그로 인해 각종 종교적, 정치적 분쟁을 유발하기도 했다.

     

 천주교 혹은 구교에서는 예루살렘 이외에 교황청이 있는 로마를 성지순례 장소로 친다. 천주교에서는 기독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유명한 장소와 인물을 성자와 성지로 크게 기념하고 있다. 이런 곳을 여행하는 일정도 성지순례라고 한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이 유명한데 정식 명칭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서 예로부터 유명한 가톨릭 성지이다. 오래전부터 순례자들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걷던 길은 현재도 그대로 쓰이고 있으며 지금은 순례자 이외에도 배낭여행자들의 명소가 되었다. 가톨릭에서 근현대에 생긴 새로운 성지로 프랑스에 있는 루르드(Lourdes), 포르투갈에 있는 파티마(Fátima) 등이 있다.

     

 우리나라 기독교의 경우 기독교의 전래와 이러한 과정에서 일어난 순교 장소에 성지순례지가 집중되어 있다. 한국 천주교의 경우 새남터를 비롯한 성지들이 여러 곳 있다. 천주교 순교 성지로 조선시대의 관아나 읍성 부근에 많다. 서울대교구 성지순례 길은 교황청이 승인한 정식 순례지가 되었다. 한국 개신교 교회의 해외 성지순례로는 신약성경의 배경이 되는 곳을 찾아가는 이스라엘, 그리스, 터키 성지순례가 있고, 독일, 스위스 등의 종교개혁 장소를 찾아가기도 한다. 국내로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많이 찾아가고 그 외에도 순교 성지나 초기 교회 유적지를 찾아가기도 한다.

    

 이슬람의 경우 성지순례는 신자로서 해야 할 의무 중 하나로, 일생에 한 번 정도는 메카에서 성지순례 의식을 치러야 한다. 다른 종교에서는 성지순례가 하면 좋다는 식으로 선택사항이지만 이슬람교에서는 교리상 의무로 규정한다. 주변 사정 때문에 할 수 없다면 이 의무는 굳이 수행하지 않아도 된다. 메카는 모슬렘 외에는 출입 금지 도시이다. 모슬렘 여부는 국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니라서 한국인이라도 개종했다고 선언하면 사우디아라비아 비자를 받고 갈 수 있다. 메카 순례용 비자를 발급받은 순례자는 제다 공항 등 제한적인 입국 장소를 통해 사우디에 입국하여 사우디 당국이 제공하는 교통편을 통해 메카를 순례한 후 바로 출국해야 한다.

     

 불교에서는 4대 성지인 마야데비 사원, 마하보디 사원, 사르나트, 쿠시나가르를 순례하기도 한다. 그 외에 앙코르 와트 같은 불교 유적을 순례하기도 한다. 일본 불교 종파 중에는 시코쿠에 있는 88개 사찰을 찾아가는 통칭 오헨로라는 순례길이 있다. 시코쿠 88개 사찰을 모두 들른 뒤 와카야마현에 있는 고야산을 참배함으로써 순례를 마친다. 오헨로를 돌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소규모 대리순례길을 만들기도 하는데, 일제강점기에 전라남도 목포시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으므로 일본인들이 유달산(儒達山)에 대리순례길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일본 각지에는 불교와 관련된 순례길이 여러 군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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