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 노을, 븕은꽃, 단풍
저게 저절로 붉어 질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 장석주(1955~ ), <대추 한 알>
위 시는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의 일부이다. 작은 대추 한 알에 모든 걸 담아낸 시인의 관찰력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겠다. 아주 작고 흔한 과일인 대추는 과일 중에서도 별로 사랑받지 못하는 과일이다. 기껏 제사상이나 삼계탕에서 대접받을까? 그런 대추를 가만히 따져보면 너무나 좋은 것이 많은 과일이다. 제사상은 물론 혼인날 폐백상에도 빠질 수 없다. 또 약방에 감초처럼 한약을 지을 때 꼭 들어간다. 시인이 대추를 보고 느낀 점은 참 남다르다. 작고 보잘 데 없는 과일이지만 대추가 그냥 저절로 붉어질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작은 대추 한 알도 태풍, 천둥, 벼락과 번개를 다 맛봐야 붉게 익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서리 맞은 대추나무라는 말이 있다. 아마도 무슨 바이러스에 전염되어 그렇게 변했을 터인데, 대추나무가 서리를 맞으면 이파리가 이상해지고, 대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무가 저절로 자라는 것처럼 보여도 비와 공기와 햇볕의 도움이 없으면 자랄 수 없다. 식물이 열매를 어찌 저절로 열리고 익을 수 있게 하겠는가? 벌과 나비 또 바람의 도움으로 수정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대추로 유명한 충청북도 보은 지방에 ‘삼복에 비가 오면 시집갈 처녀의 눈물이 비 오듯이 쏟아진다'라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대추꽃은 대략 7~8월에 피기 시작해서 삼복과 개화 시기가 겹치는데, 이때 비가 오면 제대로 수분을 맺지 못해 결국 그해 대추 농사는 흉년이 들기 때문이다. 그해 대추 농사가 흉년이 들면 처녀의 시집갈 시기가 늦춰질 수도 있다.
초여름에 열린 대추는 초록색 껍질에 속은 하얗다. 가을이 되면서 초록색 껍질은 붉은색을 띠기 시작하고 단맛이 든다. 가을에 비와 바람이 세차게 오면 견디다 못해 그만 떨어지기도 한다. 붉은색을 띠는 것은 표면을 이루는 물질이 변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 물질 이름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햇빛의 스펙트럼에서 다른 성분들은 잘 흡수하나 붉은색은 별로 흡수하지 않고 그대로 반사되어 우리 눈에 붉게 보인다.
우리는 대표적인 붉은 채소로 당근, 일명 홍당무를 꼽는다. 여기서는 카로틴이라는 색소가 당근에 합성되어 축적되는데, 이 물질이 붉은색을 잘 흡수하지 않고 반사하여 당근이 붉은색으로 보인다고 해석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여름에 초록색이던 나뭇잎이 가을이 되어 일조량이 줄면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데, 이 중에서 붉은색 단풍은 엽록소가 변하여 카로틴이 합성되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차운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七百里)
나그네 긴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 조지훈(1920~1968), <완화삼(玩花衫) - 목월에게>
이 시는 청록파로 알려진 조지훈이 박목월에게 써 보낸 시이다. 제목에도 <완화삼 - 목월에게>라고 되어 있다. 어느 날 박목월이 자신의 고향인 경주로 조지훈을 초대하였다. 목월의 초대를 받은 지훈은 경주로 갔고, 그곳에서 두 사람은 문학과 사상과 시국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이때 경험했던 목월의 인정과 경주의 풍물이 지훈의 기억에 감명 깊게 남았던지 조지훈은 목월에게 보내는 편지로 완화삼이란 시를 짓게 된다. 이후 박목월은 조지훈의 시에서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라는 대목을 따 답장으로 ‘나그네’라는 시를 써 보낸다.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박목월(1915~1978), <나그네> (후반부)
두 시의 대표적인 공통 구절을 박목월의 시에서 따오면,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이다. 술과 노을을 연상시키고 있다. 어느 날 ‘술 익는 마을’에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가 들어왔다. 밤을 맞대어 삼백 리 혹은 칠백 리를 걸어가야 하는 나그네는 낮에 곤한 잠을 자고 저녁노을이 질 즈음에 일어나 다시 길을 떠날 채비를 한다. 이때 동네 사내들이 손님인 그 나그네를 그냥 보낼 수 없다. 나그네도 아침에 이 마을에 들어올 때 술이 잘 익어서 나는 냄새를 맡았을 터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을 터이다. 저녁노을 지는 마루에 주안상이 차려지고 마을 사내들과 나그네가 음식과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할 것이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나면 잘 익은 술 탓에 둘러앉아 있는 사나이들의 얼굴에 홍조(紅潮)가 띠기 시작한다.
왜 사람의 몸에 술이 들어가면 얼굴이 붉어질까? 생리적인 기제(機制)는 잘 모르겠으나 몸에 혈액 순환이 빨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 인간을 포함한 포유동물의 혈액은 붉다. 혈액이 붉게 보이는 이유는 거기에 헴(heme)이라고 하는 탄소 원자들의 육각형 고리를 갖는 유기화합물이 있기 때문이다. 헴은 헤모글로빈 분자를 이루는 일부분으로서 폐로부터 우리 몸에 산소를 전달하고 적혈구(赤血球)를 붉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헴은 녹색(G)과 청색(B) 지역의 광자는 잘 흡수하나 적색(R)을 보이는 광자는 흡수하지 못하고, 흡수되지 않은 광자들이 반사되어 우리 눈에 적색으로 감지된다. 이 헴의 분자 구조는 엽록소(chlorophyll) 분자와 원자 배열이 구조적으로 비슷하다. 결국 동물의 먹이가 되는 식물의 주성분인 엽록소가 화학적인 구조 면에서 혈액의 주성분과 비슷해서 동물들 몸에서 섭취 및 소화가 이루어진다. 한편 식물에 있는 엽록소는 우리 눈에 녹색으로 보인다.
일출이나 일몰 시 태양 근처의 하늘은 우리 눈에 붉게 보인다. 노래 ‘아침이슬’에서도 아침에 태양이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른다고 했다. 영국의 물리학자 레일리(John Rayleigh, 1842∼1919)가 이 현상을 대기 중의 분자들에 의한 빛의 산란으로 설명하였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공기 분자 중에서 특히 물방울을 기준으로 할 때 물방울의 지름이 태양 빛의 파장에 비하여 1/10보다 작으면 레일리 산란(Rayleigh scattering)이 발생하고 산란 강도는 파장의 4승에 반비례한다. 따라서 가시광선 중에서 파장이 짧은 청색광이 가장 많이 산란을 일으키고, 파장이 가장 긴 적색광이 가장 적게 산란을 일으킨다. 예를 들면 파장이 350nm인 청색광과 파장이 700nm인 적색광을 비교하면 청색광이 적색 광보다 약 16(=2의 4승) 배 더 많이 산란을 일으킨다. 일출이나 일몰 시에는 태양광선이 한낮보다 더 길게 대기층(atmosphere)을 통과한 후 우리 눈에 들어온다. 이 과정에서 산란이 많이 발생하는 청색광 등은 대기를 통과하는 중간에 대부분 공중으로 산란을 일으켜 없어지고 남은 적색광이 우리 눈에 들어와 하늘이 붉게 보인다. 맑은 하늘에서는 청색광이 적색 계통보다 산란을 더 많이 일으켜서 대기 중에 오래 떠돌다가 우리 눈에 들어온다. 그 결과 우리가 먼 하늘을 바라보면 푸르게 청색으로 보인다.
결국 조지훈과 박목월의 시에서는 저녁노을의 햇빛과 술에 벌겋게 취한 사나이들의 얼굴빛을 대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광경은 지금부터 약 1세기 전 우리나라 시골의 일반적인 풍경일 터이다. 요즘 도시에서는 낮에 열심히 일하고 기차나 전철을 타고 먼 길을 와서 친구를 만나 전등불 밑에서 고기를 굽고 소주나 맥주를 기울이는 광경이 일반화되어 있다. 이러한 광경은 50여 년 전에도 비슷했을 것이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국어 선생님이셨던 김한태 선생님이 아침 첫 시간에 들어오셔서 떠들고 있던 학생들을 조용히 하라고 하신 후 칠판에 작취미성(昨醉未醒)이라고 크게 한자로 쓰시고 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아마 어제저녁 퇴근길에 한잔하시고 아직 술이 덜 깨신 모양이려니 했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주위에서 빨간색을 많이 볼 수 있기는 아름다운 꽃으로부터다. 식물의 잎은 녹색이다. 식물은 꽃을 피우고 벌과 나비들이 모여들어야 수정(受精)이 되고 씨가 맺어져야 다음 세대를 준비하게 된다. 꽃의 색깔은 빨강, 노랑, 흰색이 주이고 간혹 청색이나 보라색도 보인다. 그러나 녹색의 꽃은 거의 없다. 아마도 녹색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수정해 줄 동물의 눈에 잘 띄기 위해서 식물은 화려한 색깔의 꽃을 피우나 보다. 붉은 계통의 꽃을 피우는 식물로는 분홍색 달리아, 빨간색이 예쁜 아네모네, 빨강뿐만 아닌 다양한 색상의 튤립(tulip), 빨간 장미, ‘접시꽃 당신’의 접시꽃, 백일홍(百日紅)이라고도 부르는 배롱나무, 쇠비름 같은 잡초 같지만 예쁜 채송화, 짙은 빨간색의 맨드라미, 손톱 물들이는 데 쓰는 ‘울 밑에 선’ 봉선화, 화려한 색감의 상사화(꽃무릇) 등이 생각난다.
식물의 녹색 잎도 여름이 한철이고, 찬 바람이 불면 단풍(丹楓)이 든다. 우리말은 단풍의 색깔을 ‘불그레하다’, ‘불그죽죽하다’, ‘울긋불긋하다’ 등 다채로운 형용사로 묘사하고 있다. 겨울철에는 온도가 낮아 광합성을 하기에 적절하지 않으므로 단풍이 드는 현상은 잎들이 알아서 나무에서 이탈하는 과정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어쨌든 RGB 세 가지 빛 중에서 G 성분을 잘 흡수하지 않는 엽록소는 분해되어, 분자 구조의 작은 변화로 R 성분을 흡수하지 않고 반사하는 안토시안(anthocyan)이 생성된다. 그래서 단풍이 우리 눈에 붉게 보인다. 안토시안은 화청소(花靑素)라고 번역하며, 식물의 꽃, 열매, 잎 등에 나타나는 수용성 색소이다. 식물의 종류마다 단풍 빛깔이 다른 것은 이 색소와 공존하고 있는 엽록소나 노란색, 갈색의 색소 성분의 양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