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13. 주황(朱, orange)

능소화, 감, 오렌지, 주홍글씨

by 포레스트 강

빨간색을 나타내는 한자를 필자가 아는 대로 적어보면, 적(赤), 홍(紅), 주(朱), 단(丹) 등이 있다. 이 중 홍(紅), 주(朱)가 참 모호하다. 필자가 색채 공부를 별도로 하지 않았고 색에 무식하기 때문이다. 분홍(粉紅)은 흰색이 가미된 옅은 빨강 같다. 주홍(朱紅)과 주황(朱黃)이란 말이 있는 것으로 봐서 주(朱)는 빛의 스펙트럼에서 빨강과 노랑의 중간쯤에 있는 오렌지색 같다. 자주(紫朱)라는 말은 우리를 더욱 헷갈리게 한다. 보라색과 주황색의 중간이라는 말인가? 그래서 요즘은 의도적으로 violet을 자주색이라고 하지 않고 보라색이라고 부르나 보다. 한편 도장을 찍는 데에 쓰는 인주(印朱)는 빨간색이다. 여기서는 먼저 꽃과 열매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여름에 큰길 옆이나 담장에 피어 있는 능소화(凌霄花)를 자주 본다. 어려운 한자어인데 하늘을 능가하는 꽃이란 뜻이다. 중국 원산으로 우리나라 전역에서 심어 기르는 덩굴나무이다. 담쟁이덩굴처럼 줄기의 마디에 생기는 흡착 뿌리를 건물의 벽이나 다른 물체에 지지하여 타고 오르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란다. 그래서 이름을 능소화라고 지었나 보다. 꽃나무이기 때문에 잘만 관리해 주면 무럭무럭 자라서 2층 양옥집 높이 혹은 그 이상까지 타고 올라간다. 가지 끝에서 넓은 깔때기 모양의 주황색 꽃이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핀다. 꽃의 색깔은 노란빛이 도는 붉은색으로 명도가 다채롭다. 꽃이 한 번에 흐드러지게 피는 게 아니라 계속 꽃이 지고 나면 또 피고, 또 피고 해서 개화기간 내내 싱싱하게 핀 꽃을 감상할 수 있다. 추위에 약해서 다른 식물보다 좀 늦게 싹이 나오는데, 이것이 양반들의 느긋한 모습과 같다고 양반 나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이 이름 때문에 옛날에는 평민들은 능소화를 함부로 기르지 못했다고 한다. 기르다가 적발되면 즉시 관아로 끌려가서 매를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래는 싱어송라이터 안예은이 능소화를 배경으로 한 노래 중 일부이다. 임금의 승은을 입은 여인이 임금이 다시 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다 죽어 능소화가 되었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해가 일백 번을 고꾸라지고

달이 일백 번을 떠오르는데

무인 동방(無人洞房) 홀로 어둠이렷다.

문득 고개를 들면 다시

해가 일천 번을 고꾸라지고

달이 일천 번을 떠오르는데

오신다던 님은 기별이 없다.

죽어서도 원망하리.

- 안예은(1992~ ), <능소화> (일부)


‘천안 삼거리’ 혹은 ‘흥타령’이라고 하는 경기민요의 한 구절에 ‘천안 삼거리 흥, 능수야 버들은 흥’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가사 중에서 능수버들이 능소화와 같은 어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버드나무는 우리나라 특산 식물로 들이나 물가에서 자라며 가로수 또는 관상수로 흔히 심는다. 버드나무는 키가 약 20m로 크고 나뭇가지가 길게 늘어져 있어서 능소(凌霄) 버들이라는 말을 붙였다가 이것이 능수버들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의 전통 과일 중에 주황색으로 으뜸가는 게 감이 아닐까 싶다. 감은 우리에게 인기 있는 과일로 배와 함께 우리 과일의 대표를 자랑한다. 감은 쌍떡잎식물로 감나무의 열매로 한자로는 '柿(시)'라고 하는데, 홍시(紅柹)라고 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영어로는 persimmon이라고 한다. 일본어로는 かき(가끼)라고 하는데 일부 서양 언어에서 일본어를 빌려서 적기도 한다. 열매는 주황색이고 껍질엔 광택이 있으며, 만지면 매끄럽다. 완전히 숙성되지 않은 열매는 다 익었어도 단단한 축에 속한다. 단감을 기준으로 해서 가공이나 숙성이 안 된 과육은 달지만 새콤한 맛은 전혀 없으며, 과육의 물기가 그렇게 많지 않아 단단하니 서걱서걱 씹힌다. 단감은 다 익은 채로 먹어도 단맛이 돌아 생으로도 먹을 수 있다. ‘떫은 감’은 생으로 먹으면 쓴맛이 올라와 숙성/가공해서 먹는다. ‘떫은 감’ 품종으로 홍시, 연시, 반건시로 만들면 내부의 과육이 촉촉하고 부드러워진다. 씨는 약간 크고 납작하며, 반으로 쪼개면 반투명한 흰색의 배젖과 불투명한 흰색의 배가 있는데 모양이 숟가락과 유사하다. 감나무는 너무 추우면 겨울에 얼어 죽으며, 너무 더우면 고열로 인해 나무가 죽을 수 있으며 높은 온도로 인해 과숙(過熟)하면 낙과 피해가 생기는 등 재배 조건이 까다로워서 우리나라에서도 재배 지역이 좁은 편이다. 김해시의 진영 단감, 하동군의 대봉감, 상주, 산청, 함양, 영동의 곶감, 청도 반시가 지리적 표시제에 등록되어 있다. 단감의 최대 생산지는 경남 창원시이고, 그 인근인 진주시, 사천시도 유명한가 보다. 사진은 필자의 사돈이 매년 보내주는 단감 상자의 내부 모습이다.


예부터 주택가에서도 감나무를 볼 수 있었다. 오성 이항복의 집에 심은 감나무 가지가 옆집 권율의 집으로 넘어갔을 때 그 감을 권율 집 하인이 못 따게 막자 어린 오성이 권율의 집 창호지 너머로 주먹을 내질러 누구 팔이냐고 한 일화가 유명하다. 도시 한복판의 주택가에서도 감나무를 볼 수 있으며, 감이 익을 무렵에 아파트 단지에서 장대를 들고 다니며 감을 따는 사람도 있었다. 요즘은 가을 되면 열매도 많으나 따 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 옛날에도 울안에 있는 감나무의 감을 몽땅 따지 않고 몇 개는 남겨 두었다고 한다. 이른바 까치밥이다. 어느 날 아침 사는 아파트를 나서는데, 감나무에 감이 달려 있고 새 한 마리가 감나무에서 놀고 있었다. 새가 가지에 앉아서 감을 쪼는데, 몇 개는 감이 그냥 땅으로 떨어졌지만, 마침내 성공하는 걸 보았다. 새가 공복에 아침을 맛있게 드셨네. 그때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까치가 감을 쪼는 장면 사진을 하나 찍는데 나도 성공하였다. 나도 좋고 새도 좋은 아침이었다. 사실 그 새는 까치가 아니라 요즘 늦은 가을에 감을 먹으러 민가로 내려온 직박구리라고 하네.


까치밥을 쪼는 직박구리


감의 종류는 단감과 ‘떫은 감’으로 두 가지다. 단감은 바로 먹어도 씹히는 맛이 있고, ‘떫은 감’은 홍시나 연시, 곶감으로 만들어 먹는다. 홍시는 이 없이도 먹을 만큼 부드러우며, 연시는 홍시보다 더 달고 덜 떫은 것이 특징이다. 모양으로 구분하면 작고 동그라니 토마토 모양의 것과 약간 길쭉하여 물방울 뒤집어놓은 모양의 것으로 나뉜다. 이중 후자가 크기가 크며 '대봉감'이라고 불린다. 홍시는 두 종류 모두로 만들 수 있다. 경북 청도군의 특산품인 '반시'는 씨가 없다는 특징이 있는데 이것을 이용해 감을 적절하게 말리는 감말랭이로 만들어 판다. 야생에는 고욤나무가 있다. 작은 감 모양의 열매가 빽빽하게 달리는데 열매인 고욤은 땡감 이상으로 떫다. 고욤나무는 감나무보다 추위에 강하고 씨앗만 뿌려도 잘 자라며 성장이 빠르다. 이 때문에 감나무를 접붙일 때 대목으로 많이 사용한다.


단감과 ‘떫은 감’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떫은 감’이 익으면 단감이 된다는 착각이다. 엄밀히 말해 단감과 ‘떫은 감’은 다른 품종이다. 열매가 숙성하는 과정에서 떫은맛을 내는 탄닌 성분에 변화가 일어나는데, 단감의 경우 본래의 탄닌 함량이 적기도 하지만 과실이 숙성함에 따라 탄닌이 산화되어 절대적인 양이 줄어들면서 떫은맛이 사라진다. ‘떫은 감’ 품종의 경우 탄닌 함량은 높으나 과실이 숙성하면서 작은 탄닌 분자들이 축합 되어 고분자 형태로 변한다. 우리 혀는 이러한 고분자 형태의 탄닌은 맛으로 인지하지 못하므로 사람이 먹을 때는 떫은맛을 느낄 수 없다. 즉 단감은 떫은맛을 내는 성분이 줄어들어 단맛이 나게 되는 것이고, ‘떫은 감’은 성분이 맛을 느끼지 못하는 형태로 바뀌기 때문에 단맛이 나게 되는 것이다. 청도 반시 같은 ‘떫은 감’의 경우 다 익어서 단맛이 날지라도 여전히 탄닌 함량은 높게 나온다. 덜 익은 감(땡감)은 소금물이나 빈 술통 등에 담가서 떫은맛을 빼낼 수 있다.


세계적으로 주황색 과일로 유명한 것이 오렌지(orange)이다. 오렌지는 감귤류에 속하는 열매의 하나로 모양이 둥글고 껍질이 두껍고 즙이 많고 당분과 산(酸)이 들어 있어 상쾌한 맛이 난다. 품종은 발렌시아 오렌지, 네이블오렌지, 블러드 오렌지로 나뉜다. 인도 원산으로서 히말라야를 거쳐 중국으로 전해져 중국 품종이 되었고, 15세기에 포르투갈로 들어가 발렌시아 오렌지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브라질에 전해진 오렌지가 아메리카 대륙 전체로 퍼져나가 네이블오렌지가 되었다. 발렌시아 오렌지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품종으로 즙이 풍부하여 주스로 가공하고, 네이블오렌지는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재배하는데, 껍질이 얇고 씨가 없으며 밑부분에 배꼽처럼 생긴 꼭지가 있다. 블러드 오렌지는 주로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재배하며 과육이 붉고 독특한 맛과 향이 난다.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오렌지 군단이라고 부른다. 현지에서는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을 ‘네덜란드의 11인’ 또는 국가의 다른 명칭에서 따 ‘홀란트’라고 부르고, 팀의 공식 코드는 ‘NED’이다. 네덜란드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오라녜-나사우(Oranje-Nasau) 가문의 이름을 따서 오라녜 군단으로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 오라녜는 영어로 오렌지(orange)이기에 오렌지 군단으로 불리며 가문의 색깔로 오렌지색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은 밝은 주황색 유니폼을 착용하고 있다. 주황색은 네덜란드의 국색이다.


‘주홍 글씨(The Scarlet Letter)’라고 미국의 소설가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이 1850년 간행한 소설이 있다. 17세기 중엽에 보스턴 근처에서 일어난 간통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호손은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북부의 세일럼에서 영국인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호손의 소설들이 대부분 뉴잉글랜드 청교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그의 ‘주홍글씨’는 청교도적인 미국의 고전적 초상화가 되었다. 이 소설은 초기 청교도 식민시대인 1650년경의 보스턴을 배경으로 도덕성, 성적인 억압, 죄의식, 고백, 정신적 구원 등에 대한 칼뱅주의적 집착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주홍글씨’는 뛰어난 구성과 함께 아름다운 문체로 이루어져 있지만 과감하고 심지어는 도발적인 작품이다. 호손은 부드러운 스타일, 현실과 거리가 있는 역사적 배경, 모호함 등을 이용해 암울한 주제를 유연하게 만듦으로써 일반 대중의 비위를 맞췄다.


소설 '주홍글씨'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영국에서 늙은 의사와 결혼한 헤스터 프린은 남편보다 먼저 미국으로 건너와 살고 있는데, 남편으로부터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고 그러는 동안 헤스터는 펄이라는 사생아를 낳는다. 헤스터는 간통한 벌로 공개된 장소에서 주홍색으로 쓰인 'A(adultery)'자를 가슴에 달고 일생을 살라는 형을 선고받는다. 그녀는 간통한 상대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그 상대는 그곳의 고독한 목사 아서 딤스데일이었다. 딤스데일은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면서도 사람들에게 죄의 두려움을 설교하는 위선적인 생활을 계속한다. 그는 양심의 가책으로 몸이 점점 쇠약해진다. 뒤늦게 미국에 온 헤스터의 남편 칠링워스는 우연한 기회에 그 상대가 딤스데일이라는 것을 알고, 그의 정신적 고통을 자극하고자 한다. 사건이 발생한 지 7년 후에 새 지사의 취임식 날, 설교를 마친 목사는 처형대에 올라, 헤스터와 펄을 가까이 불러 놓고, 자신의 가슴을 헤쳐 보인다. 그의 가슴에는 'A'자가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죄를 고백하고 쓰러져 죽는다.


그 소설의 영향으로 사회에서 범죄로 찍히는 낙인을 주홍글씨라고 부르게 되었다. 간통한 사람에게 붙이는 글씨의 색깔이 소설 제목에는 scarlet이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말에는 주홍으로 번역되어 있다. 영한사전을 찾아보면, scarlet은 진홍색 혹은 진분홍빛이라고 되어 있고 추기경(cardinal)이나 영국의 판사, 육군 장교가 입는 제복의 색깔이라고 한다. scarlet hat은 추기경의 모자나 지위를 뜻한다. scarlet이란 단어는 violet과 많이 혼동된다. violet은 제비꽃, 보라색, 청자색으로 번역된다. 심지어는 영어로 scarlet, violet을 자주색(紫朱色)으로 번역되는 purple과도 혼동되는 경우가 많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자서전적 에세이집 ‘내가 살아온 20세기 문학과 사상’에서 어려서 들녘에서 본 제비꽃의 색깔과 더 커서 본 마산의 쪽빛 바다를 같은 색깔로 인식하고 자신의 정신세계를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영어 단어 scarlet과 purple을 추기경이나 왕자적 품격을 나타내는 royal color라고 말하고 심홍빛, 자줏빛, 쪽빛을 같은 범주로 해석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논의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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