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오전 호남선 열차를 타고
창밖으로 마흔두 개의 초록을 만난다.
둥근 초록, 단단한 초록, 퍼져 있는 초록 사이,
얼굴 작은 초록, 초록 아닌 것 같은 초록,
머리 헹구는 초록과 껴안는 초록이 두루 엉겨
왁자한 햇살의 장터가 축제로 이어지고
젊은 초록은 늙은 초록을 부축하며 나온다.
그리운 내 강산에서 온 힘을 모아 통정하는
햇살 아래 모든 몸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
물 마시고도 다스려지지 않는 목마름까지
초록으로 색을 보인다. 흥청거리는 더위.
열차가 어느 역에서 잠시 머무는 사이
바깥이 궁금한 양파가 흙을 헤치고 나와
갈색 머리를 반 이상 지상에 올려놓고
다디단 초록의 색깔을 취하도록 마시고 있다.
정신 나간 양파는 제가 꽃인 줄 아는 모양이지.
이번 주일을 골라 친척이 될 수밖에 없었던
마흔두 개의 사연이 시끄러운 합창이 된다.
무겁기만 한 내 혼도 잠시 내려놓는다.
한참 부풀어 오른 땅이 눈이 부셔 옷을 벗는다.
정읍까지는 몇 정거장이나 더 남은 것일까.
- 마종기(1939~ ), <마흔두 개의 초록>
# 시인의 초록: 시인은 왜 하필 ‘마흔두 개’의 초록을 말했을까?
위에서 인용한 시 <마흔두 개의 초록>은 의사의 직업을 갖고 평생 시를 써 온 마종기 시인의 시이다. 시인이 가장 최근에 발표한 시집 <마흔두 개의 초록>의 표제시이다. 미국에서 활동해 온 시인은 오랜만에 고국을 방문하여 전라도 행 기차를 타고 가고 있다. 첫 행에 ‘초여름 오전’이라는 구절이 있고 양파를 캘 때이니까 유월 중순쯤으로 추정된다. 시인은 온통 초록으로 둘러싸인 우리 강산을 보며, 신록예찬(新綠禮饌)을 하고 있다.
마종기 시집 표지
이른 봄에 꽃부터 피고 이제 녹색으로 변해 버린 개나리, 진달래, 벚나무, 목련을 보았는지 모른다.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 꽃은 지고 이제는 짙은 녹색으로 변한 라일락을 보았을 것 같다. 농부의 구슬땀이 일궈낸 양파, 쪽파, 대파, 마늘도 눈에 띄었을 것이다. 싱그러운 고추, 상추, 쑥갓, 아욱, 미나리, 고수, 부추, 생강, 시금치, 머위, 취나물 같은 채소를 보았을 것이다. 오이, 참외, 수박, 토마토, 딸기, 복분자 같은 열매를 주는 초록 식물도 있었을 것이다. 수수, 옥수수도 있고, 강낭콩, 녹두, 동부, 팥 같은 각종 콩도 있겠고, 모내기 끝난 논에는 벼들이 잘 자라고 있을 것이다. 소나무, 이팝나무, 플라타너스, 두릅나무, 노간주나무, 밤나무, 대추나무, 엄나무, 뽕나무, 미루나무, 오리나무,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등 나름대로 키가 크다고 뽐내는 각종 나무도 초록빛의 잎들을 내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가짓수를 세어보니 유월에 초록을 자랑하는 식물이 마흔두 개를 훌쩍 넘는다. 그런데 왜 시인은 마흔두 개의 초록이라고 했을까? 이러한 의문은 워즈워스의 다음 시를 읽고서 풀어졌다.
The cock is crowing, (수탉은 꼬끼오,)
The stream is flowing, (시냇물은 졸졸 흐르고,)
The small birds twitter, (작은 새들은 짹짹거린다.)
The lake doth glitter, (호수는 번쩍거리고,)
The green field sleeps in the sun; (푸른 들판은 햇볕에 졸고;)
The oldest and youngest (늙은이와 어린아이)
Are at work with the strongest; (힘센 자와 같이 일을 하네;)
The cattle are grazing, (소들은 풀을 뜯으며,)
Their heads never raising; (고개 한 번 쳐들지 않네;)
There are forty feeding like one! (마흔 마리가 한 마리같이!)
- William Wordsworth(1770~1850), <Written in March(3월에 쓰다)>
워즈워스는 잉글랜드 호수 지방의 아름다운 코 커머스에서 다섯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시인의 누이동생 일기에 따르면 이 작품은 1802년 4월 16일에 쓰인 것이다. ‘우리가 브라더즈 워터에 당도했을 때, 나는 다리 위에 앉아 있는 윌리엄을 두고 그의 곁을 떠났다. 돌아와 보니 윌리엄은 우리가 보고 들었던 광경을 묘사하는 시를 쓰고 있었다. 시냇물이 부드럽게 흐르고 있었고, 생기 찬 호수가 반짝이고 있었다. 뒤쪽엔 평평한 목장에서 마흔두 마리의 소가 풀을 뜯고 있었다. 오빠는 커크 스톤 기슭에 당도하기 전에 작품을 끝냈다.’ 이렇게 누이동생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초봄의 전원풍경을 눈에 보이는 대로 또 귀에 들리는 대로 적고 있는 이 시는 여행 중에 다리 위에서 쉬는 동안 즉흥적으로 적은 시다. 그래서 ‘브라더즈 워터 다리 위에서 쉬는 사이에‘라고 이 시에 부제가 달려 있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스
그러나 아마도 시인은 초고에 적지 않게 손을 보았을 것이다. 그중에서 숫자에 관한 손질이 필자의 눈에 들어온다. 그의 누이동생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이 시는 표제를 ’ 4월에 쓰다 ‘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 목장에 있던 소의 숫자는 마흔두(forty two) 마리라고 누이동생은 기록했는데, 시인은 마흔(forty)이라고 했다. 아마 운이나 호흡을 맞추기 위해 고치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뒷이야기를 인지하고 있는 마종기 시인이 <마흔두 개의 초록>이라고 시제를 정하고 시집의 이름으로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가족 친지들이 있는 고국을 오래간만에 방문한 시인이 워즈워드 시인 오누이의 추억을 떠올리고 워즈워스가 고쳐 쓴 40이 아닌 여동생이 남긴 42를 살려서 시로 표현했을 듯싶다.
# 과학자의 초록: 식물의 잎은 왜 녹색으로 보일까?
필자가 처음으로 마종기 시인의 시집을 대했을 때 초록이 영어로 abstract인가 했다. 시인도 자연과학인 의학을 전공했고 미국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했으니까 자연과학 논문의 앞 부분에 나오는 요약인 초록에 관한 내용이 아닐까 생각했다. 더구나 42라는 숫자가 나오니까 학회 논문집에 42편의 논문이 있다는 얘기인가 했다. 아니면 자신이 평생 42편의 논문을 썼다는 말인가? 그러나 시를 읽으면서 그 초록이 영어로 green임을 금방 알게 되었다.
식물의 잎은 우리 눈에 왜 녹색으로 보일까 생각해 본다. 이는 식물의 엽록소가 태양으로부터 받는 빛 중에서 적색(R)과 청색(B)은 잘 흡수하는데, 녹색(G)은 흡수하지 않고 밖으로 반사하기 때문이다. 식물은 적색이나 청색 빛의 광자가 갖는 에너지를 흡수하여 탄소동화작용에 필요한 에너지로 사용한다. 적색이나 청색 계통의 빛은 좋아하지만, 녹색 빛은 싫어하는가 보다. 간혹 제비꽃 같은 몇 식물은 에너지가 큰 보라색의 빛을 별로 흡수하지 않고 그냥 반사하고 있다.
초록(草綠)은 '풀 초'에 '초록빛 녹'의 합성어이다. 초록은 동색(同色)이라는 말이 있다. 풀빛과 초록색은 같다, 혹은 어울려 같이 다니는 것들은 모두 같은 성격의 무리라는 뜻이다. 같은 녹색이라고는 해도 식물마다 우리 눈에는 조금씩 색도가 다르다. 마종기의 시에서 나오는 마흔두 개의 식물마다 느끼는 색깔이 미묘하게 다를지라도 모두 그냥 초록이라고 부르자는 말일 것이다. 시인도 마흔두 개 식물의 크기나 모양새는 자세히 묘사해도, 색깔은 모두 뭉뚱그려 초록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콩 중에 녹두(綠豆)라는 품종이 있다. 녹두는 키 30∼80cm로 꽃은 노란색으로 8월에 피며 잎겨드랑이에 3∼4쌍의 열매를 맺는다. 열매 꼬투리는 처음에는 녹색이지만 익으면 검은 갈색이다. 길이 5∼6cm의 꼬투리에 10∼15개의 녹두 알이 들어 있다. 한말의 농민운동가 전봉준의 별명이 녹두장군인 이유는 그의 작은 체구에서 유래한다는 말이 있다. 녹두 알은 대부분 녹색이고 일반 콩보다 크기가 아주 작다. 익으면 꼬투리가 벌어져 종자가 튀기 쉬우므로 녹색으로 있다가 검어지면 몇 번에 나누어서 꼬투리를 손으로 따서 햇볕에 말린다. 녹두 알은 건조에는 강하나 습기가 많은 상태에는 약하다. 수확기에 비가 오면 수확 못 한 꼬투리 속의 녹두 알이 썩어서 버려야 한다.
우리는 녹두로 만든 음식을 별미로 즐긴다. 청포(녹두묵), 빈대떡, 떡고물, 녹두차, 녹두죽, 숙주나물 등으로 먹는다. 녹두 속은 흰색인데 녹두 알이 작아서 껍질을 벗기지 않고 통째로 갈아 녹두전 등을 부쳐 먹는데 이게 신의 한 수가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 입맛에 쏙 드는 이유는 녹두 껍질이 녹색인 점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쌉싸름한 맛이 녹색의 껍질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그 덕에 광장시장의 빈대떡집에 사람들이 몰리고 주인아주머니의 장사가 잘되나 보다.
# 쿠바의 초록: 관타나메라
필자가 중고등 학생 시절에 라디오나 TV에서 자주 듣던 외국 노래 중에 '관타나메라'가 있다. 이 노래에 자주 반복되는 구절이 마치 '관 달아매라'로 들려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번 기회에 친구들과 인터넷을 통해 알아보니 '관타나메라'는 '관타나모에서 온 여인'이라는 뜻이고, 관타나모는 쿠바의 한 지방 명칭인데, 미국-에스파냐 전쟁의 결과 1903년 이래 관타나모만은 미국의 해군기지가 되어 쿠바령이면서 미국이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1928년 쿠바의 디아즈(Jose Fernandes Dias, 1908~1979)가 이 노래를 작곡했고, 가사는 저명한 쿠바의 시인인 마르티(Jose Marti, 1853~1895)의 시에서 따왔다고 한다. 마르티는 우리나라의 윤동주와 같은 저항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젊어서는 스페인의 감옥에서 다년간 고생했고 장년에는 미국 뉴욕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고 한다. 마르티의 명성으로 이 노래는 자연스레 쿠바의 민요로 자리 잡게 되었다. 쿠바 수도인 아바나(Habana)의 국제공항 명칭이 그의 이름에서 따왔을 정도로 쿠바가 아끼는 국민 영웅이다.
Guantanamera (관타나모의 아가씨여)
Guajira Guantanamera (쾌활한 관타나모의 아가씨여)
Guantanamera (관타나모의 아가씨여)
Guajira Guantanamera (쾌활한 관타나모의 아가씨여)
Mi verso es un verde claro (나의 시는 마치 엷은 녹색,)
Y de un carmin encendido (그리고 불붙은 심홍색 같아.)
Mi verso es un verde claro (나의 시는 마치 엷은 녹색,)
Y de un carmin encendido (그리고 불붙은 심홍색 같아.)
Mi verso es un ciervo herido (나의 시는 한 마리 다친 사슴이오)
Que busca en el monte amparo (산에서 피난처를 찾고 있는)
이 노래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건 1966년 미국 보컬 그룹 샌드파이퍼(sandpipers)가 리메이크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그래서 내 귀에 익었었나 보네. 'Guantanamera~'가 4번 반복되고 그 뒤에 마르티의 4개의 다른 시에서 일부분을 가져온 가사를 붙였다고 한다. 노래에 자주 나오는 구절인 Guantanamera는 중독성을 주려 한 듯하니, 이 부분은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음미하는 게 좋을 듯하다고 멕시코시티에서 다년간 거주하고 있는 내 친구는 전했다. 이 중에서 특히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2절의 가사이다.
마르티의 시상(詩想)에 따르면 자기 시는 엷은 녹색(light green)이나 수박 속처럼 시뻘건 칼민 색깔이고, 산에서 피난처를 찾고 있는 한 마리 상처 입은 사슴 같다고 한다. 이 노래의 1절에 보면 ’Yo soy un hombre sincero/ De donde crece la palma. (나는 야자수가 자라는 곳에서 온 진실한 남자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노래 뒷 절에서는 ’El arroyo de la sierra/ Me complace mas que el mar. (산의 실개천이 바다보다/ 나를 더 기쁘게 해요)‘라고 나온다. 색감으로 마르티의 정신세계를 분석해 보면, 그는 빛의 삼원색 RGB 중에서 빨강(R)과 녹색(G)은 좋아했으나 바다 색깔인 청색(B)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나 본다.
미국 동부 뉴잉글랜드 지방에 버몬트 주(State of Vermont)가 있다. 주 이름은 프랑스어로 '푸른 산'을 뜻하는 'les Verts Monts(레 베르 몽)'에서 유래하며, 버몬트 주의 가운데를 지나는 산맥 이름이 Green Mountains이다. 따라서 주의 별명도 The Green Mountain State이다. 주의 수도는 몬트필리어(Montpelier)로 프랑스의 남부에 있는 도시명인 몽펠리에와 유사하다. 주의 북쪽으로는 지금도 프랑스어를 쓴다는 캐나다의 퀘벡주와 국경을 접하며, 영국 지명 냄새가 물씬 풍기는 뉴욕(New York) 주와 뉴햄프셔(New Hampshire) 주에 동서로 끼어 있고, 남쪽으로는 인디언 부족장의 이름을 땄다는 매사추세츠 주와 접해 있다. 원래 프랑스가 먼저 개척하여 권리를 주장했지만, 영국과의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뒤 영국의 소유가 되었다가, 1791년 미국의 14번째 주로 편입되었다. 버몬트 주는 이름에 나타나듯이 여름에는 수려한 수목으로, 가을에는 멋진 단풍으로 유명하다.
녹색의 산 이름은 중국 당나라 현종 때, 더 유명하게는 양귀비 시절의 장수 안녹산(安祿山)의 이름이 생각난다. 그런데 그의 이름에 영어로 green을 뜻하는 녹(綠) 자(字)는 없다. 조금 다른 글자이다. 우리말에 상록수(常綠樹)라고 있다. 순우리말로 '늘 푸른 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심훈의 농촌계몽소설 이름이기도 하다. 소설 속 실제 주인공의 활동 무대가 지금의 경기도 안산시라고 알려져 있고, 지하철 4호선의 역 이름에 상록수역이라고 있고, 안산시에는 상록구라는 구(區)가 있다. 쿠바와 같은 열대지방에서는 초목이 사시사철 푸르지만, 우리 같은 온대지방에서는 여름에는 초목이 푸르나 겨울이 되면, 활엽수는 모두 나목(裸木)이 되고, 소나무 같은 침엽수는 엄동설한에도 푸른색을 자랑하고 있다. 심훈의 '상록수'는 우리나라의 미래가 소나무나 전나무처럼 늘 푸르기를 바라는 우리 선대의 바람이 반영된 소설이라고 생각된다.
앞에서 초목이 초록색으로 보이는 것은 빛의 삼원색인 RGB 중에서 다른 빛은 식물이 흡수하여 광합성에 이용하는데 초록색 빛은 흡수하지 않고 외부로 반사해서 우리 눈에 초록색으로 보인다고 설명하였다. 식물은 초록을 싫어해서 반사해 내는데 사람을 비롯한 동물은 식물이 싫어하는 걸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하는 철학적 생각이 들 수가 있다. 이는 자연의 설계자인 이른바 조물주의 재량이라고 생각된다. 빛의 스펙트럼 중에서 각 빛의 역할을 적절하게 할당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마치 우리의 정부가 주파수에 따라 전파를 통신과 방송 사업자들에게 할당하듯이. 녹색이 식물의 색이라고 알고 있으니까 초식동물은 녹색인 물체를 찾아 열심히 섭취하면 되고, 우리 인간은 정상적인 녹색으로 식물이 잘 자라는지 알 수 있어야 제대로 곡식 농사를 지을 것이 아닌가? 벌이나 나비들의 도움이 수정에 필요하니까 그들의 관심을 끌려고 식물은 녹색이 아닌 다른 색깔로 화려한 꽃을 피우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