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준위
자연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때 자주 쓰는 말로 상태(state, 狀態)라는 말이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상태라는 말을 종종 쓴다. ‘그 사람 정신 상태가 좀 이상해’, ‘당신은 아직도 어릴 적 상태에 머물러 있어.’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상태라는 말을 써먹고 있다. 물리학적으로 상태를 구분하는 한 가지 방법이 그 상태가 유지하고 있는 에너지 준위(energy level), 혹은 에너지의 양으로 평가한다. 한 계(system)에 속해 있는 각 상태는 특정한 에너지값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입자가 가지고 있는 특정한 에너지값을 작은 것부터 늘어놓고 이에 해당하는 상태에 일련번호를 붙여놓을 수 있는데, 그것을 양자물리학에서는 양자 번호 혹은 양자수(quantum number)라고 한다.
학교나 군대 같은 조직에서 구성원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각 구성원에게 학번이나 군번이라는 명칭의 고유한 번호를 부여한다. 옛날 교련 시간에 학생들을 운동장에 대충 키 순서대로 세워놓고 지휘자가 제일 앞의 학생을 지명하고 ‘번호!’라고 지시하면 대열에서 큰소리로 ‘하나, 둘, 셋,...’, 하고 외친다. 어떨 때는 한 학생, 예를 들어 10번을 지목하고 새 줄을 만들라고 하며 다시 ‘번호!’ 하고 지시한다. 그 많은 수의 원자들을 에너지 크기 순서대로 일렬로 세워놓고 작은 값부터 번호를 매기면 그것이 일종의 양자 번호가 된다.
입자(예를 들어 원자 혹은 전자)가 하나, 둘 정도로 몇 개 안 될 때는 양자 번호의 차이가 얼마 안 되는 상태들 사이의 에너지 차이는 그 수준에서는 꽤 커 보이고 불연속적인(discrete) 값으로 보이지만, 아보가드로 수(N = 6.02 x 10의 23승)만큼의 아주 많은 입자로 되어 있는 계에서는 이웃해 있는 상태 사이의 에너지 값의 차이는 그 수준에서는 아주 작고 에너지는 연속적인(continuous) 값으로 인식된다. 이것이 바로 보어(Niels Bohr, 1885~1962)가 처음으로 설파한 ‘양자수가 커지는 극한에서는 양자물리학이 고전물리학과 같은 결과를 보여준다’라는 대응원리라는 명제이다. 우리들의 감각이 직접 미치지 못하는 미시세계에서는 양자물리학의 예측이 맞는데, 그 양자물리학의 결과를 양자수가 큰 거시세계로 확장하면 고전물리학의 예측과 같은 결과를 보인다는 취지이다.
원자 또는 전자의 에너지 준위의 존재는 미시세계의 물리량에 대한 양자화의 한 예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물체들의 전기량이나 에너지 등은 연속적인 값을 갖는다. 이와 달리, 원자 세계에서 물질은 특정한 질량을 갖는 기본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입자가 갖는 전기량의 값인 전하(電荷)는 항상 전자 하나가 갖는 전기량인 e(1.6 x 10의 –19승 쿨롱) 값의 정수배로 나타나며, 진동수가 ν(누)인 전자기파는 각자의 에너지가 hν인 광자의 흐름으로 나타난다. 또한, 안정한 계를 이루는 물질들에 속해 있는 원자와 같은 기본 입자들은 특정한 에너지의 값 즉 양자화된 값만 가질 수 있다. 사실 자연계에서 모든 양(量)은 양자화(量子化, quantization)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물질을 포함하여 우리 주변의 모든 물질의 익숙한 성질들을 규정하는 기본 입자들인 전자, 양성자, 중성자들의 모든 상호작용 방법에도 이 양자화가 관여하고 있다.
어떤 물질 혹은 계에는 원자들이 수가 아주 많아서 각각의 원자 상태에 모두 관심을 가지고 계의 성질을 설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는 어떤 물리적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관심 있는 부분의 에너지 준위들만 생각하고 이들 에너지 준위 간의 상호 관계나 연관성을 이해하면 된다. 우리가 관심을 두고 있는 계에서 가장 낮은 에너지 상태 E1을 바닥상태(ground state) 혹은 한자어로 기저상태(基底狀態)라고 부른다. 그보다 높은 준위들인 E2, E3, E4,... 등은 들뜬상태(excited state) 혹은 한자어로 여기상태(勵起狀態)라고 말한다.
원자는 어떻게 에너지를 흡수하고 방출하는가? 원자를 바닥상태에서 위로 들뜨게 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운동에너지를 갖는 다른 입자와 충돌시키는 것으로 충돌이 일어나는 동안 입자의 운동에너지 중 일부가 원자에 의하여 흡수되어 들뜬상태로 된다. 이렇게 들뜬 원자 하나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광자를 방출하면서 바닥상태로 되돌아오게 되는데, 이때 소요 시간은 10의 –8승 초, 즉 1억 분의 1초 정도로 상당히 짧다. 가스가 들어 있는 관 안에 있는 두 개의 전극 사이에 강한 전기장을 걸었을 때 특징적인 빛이 방출되는 네온사인과 수은등이 친근한 예이다. 거의 진공인 관 안에 들어 있는 가스가 네온일 경우 붉은색을 띠고, 수은 증기일 경우 푸른색을 띤다. 또 다른 여기 방법으로는 높은 에너지 준위로 올라가는데 꼭 알맞은 에너지의 광자를 흡수시켜 그 에너지를 받은 전자가 들뜬상태로 올라가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수소 원자가 n=2인 들뜬상태에서 n=1인 바닥상태로 떨어질 때 파장이 121.7 nm인 광자를 방출하는데, 역으로 처음 n=1인 상태에 있던 수소 원자가 파장이 121.7 nm인 광자를 흡수하면 n=2 상태로 들뜨게 될 것이다. 이렇게 에너지 준위가 변천하는 개념으로 레이저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데, 이는 뒤에 자세히 설명할 예정이다.
모든 자연적인 상태는 가능하면 에너지가 낮은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들뜬상태에 있는 계는 허용만 된다면 가능한 짧은 시간 안에 바닥상태로 돌아오려고 한다. 이렇게 빠르게 원래 상태로 되돌아오는 현상은 우리 인간들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한다. 우리가 희로애락으로 흥분된 상태가 되면 얼굴에 홍조를 띠고 정신 상태의 붕괴가 일어난다. 그러면 당사자는 금방 주위를 살피고 ‘내가 왜 이러지’ 하며 정신을 차리고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오려고 노력한다. 흥분된 상태는 정상적이 아니고 건강에 해롭고 본인의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흥분된 상태는 영어로 excited state인데, 이 말을 학술적으로는 들뜬상태, 혹은 여기상태라고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흥분된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자력으로 빨리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급히 의학적인 처리를 취해야 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어떤 일에 집중하고 나면 에너지가 소진되어 바닥에 이르렀다는 표현을 쓴다. 바닥인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하여 우리는 휴식을 취하고, 영양분을 섭취한다.
여기서 잠깐 양자 세계에서 사용하는 에너지의 단위를 생각해 보자. 보통 전자 등 미세 입자들의 세계에서 에너지의 크기는 아주 작다. 에너지의 단위는 J(주울)인데 전자기학에서는 1C(쿨롱)의 전기량을 1V(볼트)의 전압 아래에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1J이다. 전자의 전기량은 e = –1.6 x (10의 –19승) C(쿨롱)이니까 전자 한 개가 1V의 전압 아래에서 갖는 에너지는 1.6 x (10의 –19승) J이 된다. 이 값은 아주 작은 값이고 지수가 있어서 사용하기에 불편하니까 1V의 전압 아래에 놓여 있는 전자 하나의 에너지를 간단하게 1eV라고 표시한다. 즉 1eV = 1.6 x (10의 –19승) J이다. 가시광선에 속해 있는 광자 하나가 갖고 있는 에너지는 수 eV이다.
원자에서 양자수가 n인 상태의 에너지(En)는 바닥상태의 에너지(E1)에 양자수의 역제곱을 곱한 값이다. 양자수 n이 증가함에 따라 그에 해당하는 에너지 En은 0에 가까워진다. 양자수가 ∞인 극한에서는 원자의 에너지가 0이고 이때 전자는 그 원자핵에 속박되지 않는다. 원자핵-전자 계에서 양의 에너지를 갖는 전자는 자유전자(free electron)라고 하며 만족시켜야 할 양자조건은 없다. 물론 이런 핵-전자 계는 원자를 이루지 못한다. 바닥상태 원자에서 전자 하나를 원자핵으로부터 떼어내는 데 필요한 일을 그 원자의 이온화 에너지(ionization energy)라고 한다. 따라서 이온화 에너지는 -E1이며, 바닥상태의 전자를 E=0인 상태로 끌어올려 원자핵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데에는 이만큼의 에너지가 공급되어야 한다. 수소 원자의 경우 바닥상태의 에너지가 -13.6 eV이므로 수소의 이온화 에너지는 13.6 eV이다. 높은 양자수를 갖는 수소 원자는 실험실에서 만들어지거나 우주공간에서 관찰된다. 만약 바닥상태(E1)의 수소 원자 내의 전자가 외부의 전자와 충돌하여 n=3인 들뜬상태(E3)로 들뜨게 한다면, 이때 외부에서 수소 원자에 주어진 에너지는 다음과 같이 구할 수 있다.
ΔE = E3 – E1 = E1/9 – E1/1 = -13.6(1/9 – 1) = 12.1 (eV)
자연에서 관찰되는 오로라(aurora)는 캐나다, 알래스카, 시베리아,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등 위도 60~80도의 북극권에서 날씨와 운이 좋은 야간에 볼 수 있다. 오로라는 지구의 성층권에서 태양으로부터 태양풍(solar wind)의 형태로 빠른 속도 즉 큰 운동에너지를 갖고 지구에 전달되는 대전입자(帶電粒子)인 양성자와 전자에 의해 대기권에 있는 산소나 질소 원자의 에너지 준위가 들떠 있다가 바로 원래의 바닥상태로 되돌아오면서 그 에너지가 광자(photon) 즉 빛으로 방출되는 현상이다. E = hν = hc/λ의 관계로부터 방출되는 각 광자에 해당하는 주파수 혹은 파장을 알 수 있는데, 우리 눈은 그 빛을 특정한 색깔로 인식하고 있다. 오로라의 빛깔에는 황록색·붉은색·황색·오렌지색·푸른색·보라색·흰색 등으로 다양하다. 비교적 저위도 지방에서 나타나는 초록색 색조는 산소 원자에서 나오는 파장 6,300 Å의 빛에 의한 것이며, 고위도 지방의 호상(弧狀) 오로라의 최하한에 나타나는 붉은색은 산소와 질소 양쪽에 기인한다고 알려져 있다. 오로라라는 말은 '새벽'이란 뜻의 라틴어에서 왔으며,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여명의 신’ 이름을 딴 것이다. 어린이 만화 영화에 나오는 오로라 공주는 이러한 신화에서 따온 듯하다. 오로라는 극광(極光)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영어로 노던 라이트(northern light), 동양에서는 한자어로 적기(赤氣)라고도 한다.
다시 정리하면, 오로라는 태양으로부터 지구에 들어오는 전하를 띤 입자가 대기 중에 있는 원자와 충돌하면서 원자의 에너지 상태가 변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빛이다. 그 과정에서 상태의 변화에 따르는 에너지값의 차이가 우리 눈에 색으로 식별된다. 앞에서 모든 복사는 스펙트럼을 이룬다고 설명한 바 있다. 가시광선이 프리즘 같은 분광기를 통과하면 에너지 혹은 파장에 따라 굴절률이 다르므로 분산을 일으켜 각 성분으로 분해되는데, 파장 혹은 에너지의 순서로 배열되면 이를 스펙트럼이라고 부른다. 스펙트럼 띠의 상태에 따라 연속ㆍ휘선(輝線)ㆍ대상(帶狀) 스펙트럼으로, 또는 방출ㆍ흡수 스펙트럼으로 분류한다. 여러 가지 원자나 분자에서 나오는 빛은 각기 고유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어서 이것을 토대로 한 연구는 원자나 분자의 구조를 밝히는 데 이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