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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4. 뉴턴과 맥스웰

역학, 광학, 그리고 전자기학

by 포레스트 강

근대과학은 유럽에서 그 기초가 세워졌는데, 영국의 과학자들이 큰 공을 세웠다. 특히 뉴턴(Isaac Newton, 1642~1727),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이 인류의 과학적 사고에 큰 족적(足跡)을 남긴 대표적인 과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뉴턴과 맥스웰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두 사람은 태어난 해로 보면 189년, 사망한 해로 보면 152년의 차이가 난다. 뉴턴은 만유인력의 발견이라고 대표되는 역학 분야와 빛의 스펙트럼을 분석한 광학 분야에서 획기적인 업적을 이루었고, 맥스웰은 전지와 자기를 통합하고 전자기파의 존재를 예측한 지대한 공로가 있다.

뉴턴은 1642년 크리스마스에 영국에서 태어났다. 그 해는 갈릴레이가 죽은 해이며, 코페르니쿠스가 죽은 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뉴턴의 집은 올즈소프의 한 농가였고, 그의 아버지는 뉴턴이 태어나기 3개월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유복자로 세상에 태어난 셈이다. 남편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뉴턴의 어머니는 그를 조산아로 낳았다. 일찍 과부가 된 뉴턴의 어머니는 뉴턴이 3살 때 재혼했다. 그래서 뉴턴은 어머니와 떨어져 할머니 밑에서 자라게 되었다. 학교에 다닐 때 뉴턴은 학교 성적은 좋았지만,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였으며 온순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말수가 적은 소년이었다. 소년 시절에 뉴턴은 혼자서 공부하기를 좋아했으며, 신기한 것을 수집하기를 좋아하는 수집가였고, 렌즈 등을 잘 연마하는 제작자이기도 했다. 어머니의 재혼한 남편이 죽자, 어머니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뉴턴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아서 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농사일을 돕게 했다. 어쩌면 그는 농사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뉴턴의 큰아버지가 끊임없이 어머니를 설득한 덕분에 학교에 복학하고 케임브리지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불운한 소년 시절을 보낸 뉴턴은 1661년 케임브리지대학(Cambridge University)의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에 입학하여, 수학자 배로의 지도를 받아 케플러의 <굴절광학>,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 윌리스의 <무한의 산수> 등을 탐독하였으며, 1664년에 학사 학위를 받았다. 학생 시절, 그는 렌즈 연마에 관심이 많았을 뿐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론>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인생의 전환을 가져온 사건이 생겼다. 1664~1666년 케임브리지시 근처에 페스트가 크게 유행하여 사람들이 도시를 떠났고, 대학도 일시적으로 폐쇄되었다. 그 기간에 뉴턴도 고향으로 돌아와서 사색과 실험으로 세월을 보냈는데 훗날 뉴턴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운 좋은 사건”이라고 회고했다.


1665~1666년에 그는 수학과 철학에 마음을 두고 중요한 발견을 했다. 이때 그가 몰두한 연구의 하나는 달이나 행성이 원 궤도로 움직이는가 하는 것이었다. 또 그가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달았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인력을 지배하는 법칙도 도출했다. 당시 케플러의 법칙은 티코의 자료에 의한 경험 법칙일 뿐, 행성이 왜 그렇게 운동하는지는 수학적으로는 밝혀지지 않았을 때이다.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과 운동에 관한 세 가지 법칙으로 행성의 모든 운동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의 생각들은 여러 곡절을 거쳐 약 20년 후에 세상에 공표된다.


뉴턴의 초기 연구는 광학 분야에서 두드러졌으며, 케임브리지대학에서의 최초의 강의도 광학이었다. 광학에 대해서는 이미 울즈소프 시절부터 스스로 수집하고 정비한 실험기구를 이용해 빛의 분산 현상을 관찰하였으며, 특히 빛의 굴절률과 분산의 관계에 대하여 세밀히 연구하였다. 한편, 소년 시절부터 렌즈 연마에 관심이 많았던 뉴턴은 망원경 제작도 연구하여 굴절 광은 스펙트럼을 만들지만, 반사광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기초로, 반사 방식의 망원경이 수차와 효율 면에서 한층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볼록렌즈 대신 오목거울을 사용하여 망원경을 제작하였다. 그는 뉴턴식 반사망원경을 만들어 1671년 국왕에게 기증하였고, 국왕은 그를 왕립학회의 회원으로 추천하였다. 1672년 뉴턴은 <빛과 빛깔의 색 이론>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왕립학회에 발표했다. 그 내용은 백색광이 7색의 복합이라는 사실, 단색이 존재한다는 사실, 생리적 색과 물리적 색의 구별, 색과 굴절률과의 관련 등을 논한 것이었다. 1675년 박막의 간섭현상인 ‘뉴턴의 원무늬’를 발견하였다. 그는 빛의 성질에 관한 연구로 광학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는데, 1704년에 <광학>을 저술하였다.

뉴턴은 수학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수학에서는 1665년 이항정리의 연구를 시작으로, 무한급수로 진전하여 1666년 유분법(fluxion)을 발견하고, 이것을 구적(求積) 및 접선(接線) 문제에 응용하였다. 이것은 오늘날의 미적분법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성과를 1669년에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1676년 독일의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와 미분법에 대한 우선권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이 무렵부터 그의 사고방식도 실험적 방법에서 수학적 방법으로 그 중점이 옮겨졌는데 스스로 수학자라고 하였다.


뉴턴이 남긴 최대의 업적은 역학(力學, mechanics)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구의 중력이 달의 궤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여 이것과 행성의 운동과의 관련을 고찰한 것은 울즈소프 체류 때 이루어졌다고 한다.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수학적 설명이 곤란해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는데, 뉴턴은 자신이 창시해 낸 미적분법을 이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확립하였다. 1687년 이 성과를 포함한 대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가 출판되었으며, 이로써 이론물리학의 기초가 쌓이고 뉴턴역학의 체계가 세워졌다. 3부로 된 이 저서는 간단한 미적분법의 설명에서 시작하여 역학의 원리, 인력의 법칙과 그 응용, 유체의 문제, 태양 행성의 운동에서 조석의 이론 등에 이르기까지 계통적으로 논술되어 있다.

이후에 뉴턴은 1688년 명예혁명 때 대학 대표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1691년 조폐국의 감사가 되었으며, 1696년 런던으로 이주하고, 1699년 조폐국 장관에 임명되어 동전 화폐 주조라는 어려운 일을 수행하였다. 1703년 왕립협회 회장으로 추천되고 1705년 기사(Knight) 칭호를 받았다. 또한, 신학에도 관심을 보여 성서의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고대사 해석을 검증하고, 천문학적 고찰을 첨가해 연대기를 작성하였다. 근대과학 성립의 최고의 공로자인 뉴턴은 평생을 독신으로 보냈으며, 1727년 런던의 교외의 켄싱턴에서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장례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고 그곳에 묻혔다. 근대과학을 완성한 당대 최고의 과학자였던 그는 겸손함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내가 이 세상에 어떻게 비칠지 모른다. 그러나 나 자신의 눈에 비친 나는 밝혀지지 않은 진리의 큰 바다가 눈앞에 가로 놓여 있는 물가에서 장난을 치며 조약돌이나 조개를 줍고 좋아하는 어린아이처럼 생각된다.”라는 말을 남겼다.


맥스웰(James Clerk Maxwell)은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태어났고 그는 변호사인 아버지의 독자였다. 아들 맥스웰은 어릴 때부터 호기심과 비범한 기억력을 가졌으며 8살이 되었을 때 위암으로 어머니를 잃었다. 이후 이모의 보살핌을 받고 성장하였다. 어릴 때 그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이 재미없다며 간단한 과학적 연구에 호기심을 발휘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맥스웰은 16세에 에든버러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과학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논문은 토성의 고리가 전적으로 고체 또는 액체일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인데 그것들은 작지만 각각 분리된 고체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판단했다. 그 결론은 100년이 더 지난 후에 첫 번째 우주탐색선인 보이저 호가 토성에 도달함으로써 확증되었다. 에든버러에서의 3년 동안에 그는 훌륭한 스승과 엄청난 양의 독서와 자유분방하게 진행한 실험 덕택에 향후 과학자로서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는 19세에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를 떠나 케임브리지대학의 세인트 피터 칼리지(St. Peter College)에 입학하였다. 한 학기 지난 후 트리니티 칼리지로 옮겨서 1854년에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한 후 1856년에 스코틀랜드 애버딘(Aberdeen)의 매리셜 칼리지(Marischal College) 교수로 부임하였고, 1860년에 런던대학(지금의 University College London)의 킹스 칼리지로 옮겼으며, 그곳에서 일생 중에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1865년 킹스 칼리지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아내와 함께 스코틀랜드의 고향 집으로 내려가 실험과 연구를 수행하였다. 이때 불후의 명저 <전기와 자기학에 관한 논고(A Treatise on Electricity and Magnetism)>를 비롯한 여러 권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한편 그는 1871년 케임브리지대학 물리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유명한 캐번디시(Cavendish) 연구소를 세우는 일에 참여하였다. 케임브리지에서 학생 지도와 연구 그리고 저술사업에 열중하던 맥스웰은 48세의 젊은 나이인 1879년 위암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해에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태어났다. 물리학에서 뉴턴과 필적할 만한 업적을 세웠으나 영국의 다른 유명한 과학자들처럼 기사 등의 작위를 받지 못하였고, 사망 후 국가 차원의 장례식 절차도 없이 고향 집 가까운 곳에 묻혔다.

맥스웰은 생전에 색채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실험과 연구를 수행했는데 그중에 전자기(electromagnetism)에 대한 업적이 괄목할 만하다. 전자기에 관한 맥스웰의 연구는 선배 물리학자인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의 연구 결과에 기초를 두고 있다. 수학에 능했던 맥스웰이 패러데이의 고전적 장이론을 수학적으로 정리한 후, 당대의 전자기 이론을 집대성하여 ‘맥스웰 방정식’으로 수식화하였다. ‘맥스웰 방정식’은 전자기파(electromagnetic wave)의 존재를 예측한 것으로 유명한 수식이며, 전자기의 기본 행동 특성을 나타낸다. 이 방정식은 전기력과 자기력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 4개의 수식으로 전기와 자기의 모든 성질이 설명된다. 이 네 개의 식은 1861~1862년에 Philosophical Magazine에 게재된 그의 논문 <On physical lines of force>에 처음 소개되었다.

적분과 미분으로 표현되는 4개의 맥스웰 방정식의 물리적인 의미를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1. 도선의 전류가 원형의 자기장을 발생시킨다.

2. 자기장을 끊고 지나가는 원형 고리 도선에 전류가 유도된다.

3. 같은 부호의 전하(電荷, electric charge)와 자극(磁極, magnetic pole) 사이는 서로 밀치고 반대 부호의 전하/자극 사이는 서로 잡아당긴다.

4. 두 전하/자극 사이의 힘은 서로 간의 거리의 역제곱(inverse square) 법칙을 따른다.

맥스웰이 만들어 낸 전자기학 이론은 뉴턴의 운동법칙 및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함께 현대물리학에 가장 근본적으로 이바지한 공로가 크다고 평가된다. 맥스웰이 전자기파의 속도를 계산했을 때, 그는 그것들의 속도가 실질적으로는 빛의 속도와 같다고 하였다. 그는 빛이 다른 형태의 전자기파라고 결론지었다. 맥스웰은 다른 파장을 갖는 전자기파도 역시 존재한다고 제안하였다. 독일의 물리학자 헤르츠(Heinrich Hertz, 1857~1894)가 1887년 최초로 인공으로 전파를 만들어 냄으로써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이 완전히 증명되었다.


더 후에 발견된 X레이는 맥스웰의 예측을 또 한 번 확인시켰다. X레이는 극 초단의 파장을 갖는 전자기파 방사선의 한 형태이다. 20세기의 통신 기술은 맥스웰의 연구에 기초한다. 라디오, 텔레비전, 레이더 및 위성통신 등 모두는 그의 전자기 이론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적분과 미분을 통해 전자기파 행동 특성을 완벽하게 수식화한 것이 ‘맥스웰 방정식’이기 때문에, 이 수식을 이용하여 각종 전자기파의 해석을 하게 된다. 실제 컴퓨터에서는 ‘맥스웰 방정식’을 그대로 풀게 되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정확도를 조금씩 양보하면서 속도를 배가시키는 시뮬레이션 법이 연구되고 있다.

맥스웰의 기체 분자운동에 관한 연구도 빛나는 업적 중 하나이다. 당시까지의 분자의 평균속도 대신 분자속도의 분포를 생각하며 속도분포법칙을 만들고, 그 확률적 개념을 시사함으로써 통계역학의 기초를 닦았다. 맥스웰은 기체의 점성을 연구하면서 분자의 평균자유행로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1840년에 영국의 물리학자 줄(James Joule, 1818~1889)은 열과 기계적 운동 사이의 관계식을 수립했다. 이 원리는 열역학(thermodynamics)이라는 과학 분야를 낳게 하였는데, 여기에는 기체 분자의 운동에 관한 연구가 포함된다.

20세기의 물리학자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던 19세기의 과학자들은 맥스웰에게 널리 감사하고 있다. 그의 전자기 이론과 그에 관련된 방정식은,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를 나타내주는 아인슈타인의 특별상대성 이론을 위한 길을 포장해 주었기 때문이다. 맥스웰의 개념은 20세기 물리학의 또 다른 주요 혁신인 양자 이론을 인도하였다. 1956년 양자전기역학을 정식화한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파인먼(Richard Feynman, 1918~1988)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세기의 가장 중대한 사건은 맥스웰이 전자기 법칙을 발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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