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그래요"라는 말 뒤에 숨겨진 무채색의 방

감정의 스위치를 ON

by 선명한 위로

퇴근길 지하철, 창에 비친 내 얼굴은 무미건조하다. 오늘 하루 어땠냐는 질문에 딱히 떠오르는 장면이 없다. 화나는 일도 없었지만, 특별히 즐거운 일도 없었다. 누군가 근황을 물으면 나도 모르게 자동반사처럼 대답하곤 한다. “응, 그냥 그래. 똑같지 뭐.”

언젠가부터 우리는 이 ‘그저 그런 상태’를 평온함이라 믿으며 살기로 했다. 하지만 정말 평온한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 고장난 것일까.


종종 세상의 채도가 0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분명 어제와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사람을 만나는데, 마음만은 마치 낡은 흑백 사진 속에 갇힌 듯 건조하기만 하다. 우리는 이 무미건조함을 ‘어른의 평온’이라 부르며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사실 그것은 평온함을 가장한 내 마음이 보내는 고요한 비명일지도 모른다.


흑백거리.png


우리는 기쁨, 슬픔, 분노, 두려움이라는 다양한 감정의 팔레트를 가지고 태어났다. 하지만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효율이라는 명목하에 이 팔레트의 색들을 하나둘씩 지워버렸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내 감정의 색을 드러내기보다, 타인의 배경색에 나를 맞추는 법을 먼저 배웠기 때문이다.


특히 남의 기분을 살피는 것이 생존 전략이었던 사람일수록 내 마음의 센서는 빨리 마모된다. 부모님의 표정과 기분이 곧 나의 생존방식이었던 시절, 우리는 '착한 아이'로 남기 위해 내면의 화려한 색들을 애써 지워가며 무채색의 옷을 꾸역꾸역 입었다. 타인의 표정 변화에는 0.1초 만에 반응하는 정교한 레이더를 가졌으면서, 정작 내 마음의 농도는 희미해진 것이다. 이것은 성숙함이 아니라, 내 감정의 주권을 타인에게 넘겨준 ‘정서적 소외’의 시작이다.


왜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이토록 낯설어하게 되었을까? 사실 무감각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마지막 방어선이다. 감당하기 힘든 상처를 입었을 때, 혹은 나보다 더 강한 감정을 쏟아내는 양육자 곁에서 내 감정을 죽여야만 했을 때, 우리는 살기 위해 감정의 스위치를 내리는 법을 배운다. 뜨거운 것에 데이지 않으려면 아예 감각을 차단하는 것이 가장 빠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통을 차단하기 위해 내린 스위치는 불행히도 삶의 활기와 환희까지 함께 꺼버린다.


슬픔이나 분노 같은 어두운 색을 보이지 않으려 마음의 문을 닫으면, 빛나는 기쁨과 설렘조차 그 문턱을 넘지 못한다. 당신의 삶이 무채색인 이유는 당신이 무뎌서가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해 너무나 철저하게 감정을 통제해온 눈물겨운 결과이다.

이제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 “왜 기쁘지 않을까?”가 아니라, “나는 언제부터 감정의 스위치를 내리고 살기로 했는가?”라고.


내 감정을 아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주권을 되찾는 일이다. 내가 무엇에 화가 나는지, 무엇에 가슴 뛰는지 모른다면 우리는 평생 타인이 칠해놓은 각본 위에서 연기하며 살 수밖에 없다.

감춰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우리의 감정 또한 제대로 알아주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든 드러날 수밖에 없다. 감정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 감정의 스위치를 켜는 연습이 필요하다.


감정스위치.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