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은 언제나 타인의 뒤에 있었다
어딜 가나 나보다 상대의 필요를 먼저 채우고, 갈등이 생길 기미가 보이면 누구보다 빨리 자신을 지우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성숙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성숙함 아래에는 자신을 지우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아이가 숨어 있다.
만약 당신이 타인의 기분은 귀신같이 읽어내면서 자신의 욕구 앞에서는 입을 떼기조차 어렵다면, 당신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누군가의 완벽한 조연'이라는 배역을 맡아왔을 가능성이 크다. 나의 삶을 살기보다, 누군가의 삶이 화창하도록 배경이 되어주는 일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아이는 본래 무대 중앙에서 큰 소리로 울고 웃으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존재이다. 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아주 일찍부터 그 무대 중앙을 누군가에게 내어주어야만 했다. 우리는 왜 내 인생의 무대에서 스스로 조연이 되기를 자처했을까? 그 무대 아래에는 사랑받기 위해, 혹은 버려지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아이의 생존 전략이 숨어 있다.
부모의 결핍을 채우는 '정서적 지지자' : 어떤 아이는 부모의 슬픔이나 우울을 대신 짊어진다. 부모가 힘들 때 웃음을 주고, 부모의 하소연을 묵묵히 들어주며 '기특한 아이'라는 칭찬을 보상으로 받는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부모를 더 힘들게 하는 이기적인 행동이라 믿게 된다.
갈등을 막기 위해 나를 지운 '평화 유지군' : 부모의 다툼이 잦거나 집안 분위기가 위태로울 때, 아이는 스스로 존재감을 지운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 눈에 띄지 않는 것, 그리고 모두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평화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주연이 되어 주목받는 것보다 조연이 되어 고요함을 유지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학습한 것이다.
자신의 꿈을 투영한 '대리 만족의 도구' : 부모가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뤄줘야 했던 아이들에게 '나의 욕구'는 중요하지 않았다. 부모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라 세뇌당하며, 타인의 박수 소리에 맞춰 춤추는 완벽한 인형이 되어야만 했다.
조연으로 사는 삶은 자신을 끊임없이 소진시키는 삶이다. 타인의 표정을 살피고, 그들의 무대 장치를 점검하느라 정작 내 무대의 조명은 다 꺼져가는 줄도 모르기 때문이다. 원인 모를 공허함과 무기력은, 주인이 떠나버린 빈 무대에서 홀로 대본에도 없는 조연의 대사를 읊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통증이다.
누군가의 결핍을 채워주기 위해, 혹은 누군가의 삶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당신의 생을 낭비하지 말자. 당신은 누군가의 찬란한 서사를 위해 존재하는 엑스트라가 아니다. 오랫동안 무대 뒤에 숨어 지냈기에, 조명 아래 서는 것이 벌거벗겨진 것처럼 두렵고 미안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기억해야 한다. 당신이 스스로를 조연으로 정의하는 한, 그 누구도 당신을 주연으로 대접해주지 않는다.
불완전해도 괜찮다. 남의 대사가 아닌 당신의 서툰 목소리로 첫 대사를 떼어보자. 당신이 주인공이 되는 순간, 당신을 억누르던 거대한 그림자들도 비로소 힘을 잃고 흩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