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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곤볼의 비밀

by 북곰

국민학교 6학년이었다. 쉬는 시간만 되면 반아이들이 한 아이 곁에서 '수근수근', '웅성웅성' 거렸다. 나는 딱히 이야기를 나눌 친구도 없고, 은근히 따돌림당하는 아이라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한데 내 짝꿍이 쉬는 시간마다 계속 그 아이에게 가서 뭔가를 부탁하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환한 웃음과 함께 뭔가를 소중히 품고 오는 것이었다. 그건 어떤 두툼한 만화책이었다. '드라곤볼의 비밀'이라는 만화책이었다. 내 짝꿍은 수업시간이든, 쉬는 시간이든 그 어떤 미동도 없이 계속 책만을 봤다. 공부와는 담을 쌓은 친구라 생각했는데 그 친구의 전혀 다른 새로운 면을 본 듯했다. "휴!" 큰 한숨과 함께 책을 다 읽었던 친구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게, 나에게 보라며 그 책을 줬다.

"내가 00에게 오늘 학교 끝나기 전까지 힘들게 빌린 책이야. 너도 한번 봐봐라. 이거 진짜 재미있다."

"어?, 응...."

많은 활자책을 읽었던 나였지만 그림이 대부분인 그림(?) 책을 보는 건 생소한 경험이라 의심반 호기심반으로 드라곤볼의 비밀을 읽게 되었다. 첫 장을 펼친 순간부터 세상은 정지되었다. 50명이 넘는 아이들이 조그마한 교실을 채웠는데, 얼마나 시끄럽고, 정신이 없을까.... 한데 아무것도 없었다. 옛 성현의 글로만 알던 물아일체

(物我一體)의 경지를 체득하고 만 것이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그때 전율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지금껏 살면서 경험하지 못했던 환희를 13살 아이가 경험해 버린 것이었다. 손은 부들부들 떨렸고, 머릿속은 현실과 환상 속을 오고 가고 있었다. 지금 존재하는 현실이 현실이 아니길 바랬고 지금의 이 기분을 더 보고 느끼고 싶었다. 책을 덮자마자 책 주인 아이에게 '월요일 가져다줄게. 제발 책 좀 빌려줘. 부탁이야.' 얼마나 간절했던지 책주인 마저 놀래서 빌려줬다. 토요일 4교시 청소를 마치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서 책을 봤다. 아까 봤던 그 환희가 또 살아나고,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그 자리에서 5번을 넘게 읽었다. 이제는 모든 장면이 생각나고 나도 모르게 절로 외워졌다. 만화책 내용이 외워져 버리니 생동감 있는 주인공을 그려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날이 내가 처음으로 그림을 그려본 날이었고, 뭔가를 간절히 원하게 된 날이었다. 계속되는 흥분과 환희로 피곤했던지 책을 머리말에 두고 그냥 자버렸다. 잠깐 잠을 자고 난 후 일어나자마자 다시 또 책을 찾았다.


'아....' 책이 찢어졌다. 내가 잠을 자고 있던 동안 나의 어린 여동생이 책을 가지고 놀다 찢어버린 것이었다. 처음으로 여동생에게 화를 내봤던 것 같다. 어머니가 없었다면 손찌검이 날 수도 있었다. 울고불고하는 날 위해 어머니가 책에 풀칠해서 겨우겨우 모양은 잡을 수 있게 해 줬다. 마음이 너무너무 아팠다. 즐거웠어야 했던 토요일과 일요일은 그 한 번의 부주의로 별로인 날이 되었다.


문제의 월요일 아침 등교 후 만난 책 주인에게 책을 줬다. 책을 받자마자

"이 XXX야! 이게 뭐야! 소중한 내 책에 뭔 짓을 한 거야!" 하며 크게 소리쳤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분을 못 참은 친구는 소중한 책을 던져버렸고, 책은 산산조각으로 나뉘어졌다.

"이 책 너 가져, 그리고 책값 2천원 보내!"라며 찢어진 책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여러 파편으로 나뉜 책을 보고, 줍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 무언가가 '쨍그랑'하고 깨졌다. 머릿속에 깨졌던 듯싶다. 가슴속에 깨졌던 듯싶다. 아니 다리에 뭔가가 깨졌던 듯싶다. 도저히 고개를 들 수없고, 가슴이 아팠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결론을 얘기하자면 나는 2천원이라는 큰돈을 가난한 우리 어머니께 이야기할 수 없었고, 국민학교 6학년 내내 그 친구의 무시와 돈 갚으라는 독촉을 당했다. 그러다 명절 때가 되어 일가친척들에게 받은 용돈으로 다른 책을 사줄 수 있었다.


찢어지고 너덜너덜 해진 책을 한 장, 한 장 붙이고, 볼품없는 모습이지만 소중한 나의 책이 되었다. 괴롭고 힘들 때마다 보고 또 봤다. 매일 보던 책은 어느 순간 만화를 그리고 싶다는 열망으로 바뀌었고, 쉬는 시간마다 멍하니 있던 나는 교과서든 공책이든 어떤 여백만 있다면 드라곤볼의 캐릭터를 그리고 또 그리기 시작했다. 드라곤볼의 '이름없는 작가'처럼 나도 그런 뛰어난 만화가가 되고 싶었다. 찢어진 만화책은 국민학교를 넘어 중학교 3년 동안 하나의 큰 이정표이자, 나침반, 그리고 보물이 되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나의 이정표였던 보물은 한순간 산산조각 나버렸다. 도시로 유학을 가, 처음 사귄 친구가 만화를 좋아하는 친구였다.

"내가 그린 그림이야 어때?"

"너 드래곤볼 보는구나. 그림체가 완전 토리야마아키라 그림체네...."

"응? 드라곤볼이라고 해야지!"

"뭔 소리야! 촌놈이라 잘 모르는구나. 인마! 드라곤볼은 드래곤볼 해적판이야~야 이제는 드래곤볼 정식판 나와!"

알듯 몰랐던 아니 그냥 모르는 척 있고 싶었던 지난 3년간의 막연한 불안함을 그 친구가 아주 쉽게 알려줬다. 내가 소중히 간직하고 계속 믿고 싶었던 그 책은 '해적판'이라고. '해적판'이라는 3글자에는 지금껏 어디가 존재했다고 믿었던 존경하고, 존경해야 했던 작가는 없었다. 그렇게 아프게 소중히 간직했던 책은 작가의 열정을, 땀을, 고통을 훔친 산물이었다. 나의 보물이 '장물'이라는 것에, 저작권에 대해 알게 된 나는 내 안에 무언가가 '쨍그랑'하고 깨졌던 것을 다시 느껴야 했다. 큰 아픔은 있었지만 만화책의 진짜 제목이 "드래곤볼"이라는 것과, 작가가 한국인이 아닌 '토리야마 아키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렸을 때 해적판으로 시작된 드라곤볼의 비밀은 나에게 진짜 '드래곤볼'을 알게 해 줬고, '토리야마 아키라'를 알게 해 줬다. 그리고 몇 년간 '만화가'라는 소중한 꿈을 꾸게 해 줬다. 물론 그 꿈은 이제 전혀 다른 직업을 가진 내가 추억이라 부르고 있다. 오랫동안 친구에게 2천원을 늦게 줬던 것처럼 작가에게 큰 빚을 졌다 생각하고 있었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나고, 아내에게 "염색 좀 해."라는 말을 듣던 어느 날 작가의 죽음을 들었다. 워낙 유명한 작가라 많은 사람이 알지만.... 나에게 그의 부재는 의미가 달랐다. 친구에게도 늦게 2천 원을 줬는데.... 작가에게는 아직도 빚을 갚지 못했다. 작가 사망 후 드래곤볼 전집을 구매했을 때, 빚을 갚았다는 기쁨보다는 반성과 죄책감이 먼저 들었다. '나는 왜 항상 늦을까....' 아내의 한 소리가 있었지만 그 친구는 모른다. 오랫동안 나는 빚을 지고 있었고, 그리고 너무나 늦게 갚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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