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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쵸로롱 Dec 18. 2024

쵸로롱 ADHD 그림일기: 내 ADHD를 말해야 할까?

우리가 건배사를 하기 전에

연말이다. 친구들과의 약속이 잡힌다. 나는 그동안 술로 이어진 만남들을 해왔다. 연말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그동안의 안부를 안주삼아 거나하게 취하는 자리다. 소맥을 말아서 원샷을 하면, 내 뇌는 도파민을 풀충전한다. 이번 연말도 그런 자리를 위해 단톡방에서 대문자 E와 J를 동시에 가진 친구들은 미리 주점을 예약한다. 여느 연말이라면 여기도 가자, 저기도 가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의 나는 달라졌다.


ADHD를 확진받은 지 몇 달이 지났다. 그간 ADHD 증상 완화의 도움을 주는 콘서타를 복용했다. 호르몬의 예민한 나라 약이 아주 잘 맞는다. 정확한 원리는 모르겠지만 그 대가로 주량이 맥주 3잔으로 줄었다. 그리고 콘서타로 충분히 사라진 줄 알았던 무기력증이 다시 나타났고, 그 원인은 우울감이었다. 고로 나는 항우울제도 같이 먹는다. 주량은 맥주 1잔으로 줄었다. 맥주 한잔을 마시면 뇌가 멈추라고 신호를 보낸다. 다년간 술을 마신 나는 알 수 있다. 이 신호는 3차는 가야 나오는 신호다. 1차로 소맥을 마시고, 2차로도 소맥을 마시고, 3차로 데낄라 샷 정도는 마셔야 뇌가 아우성치는 그런 신호다. 우리나라엔 술기운에 교통신호도 무시하는 범법자들이 우글우글한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모범시민인 나는 뇌 신호 정도는 가뿐히 무시하고 4차 노래방에서 맥주와 함께 달렸다. 새벽 3시 간신히 택시를 타고 귀가한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빠의 유전자는 나에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아빠에게서 물려받지 않은 숙취 유전자로 변기에게 아침 문안인사를 한다. 나약한 신체로 하루, 옛날 대통령 나이로 30대를 맞이 한 이 몸뚱이는 이틀은 산송장이 되어 목구멍에 헛개차만 겨우 넘겨야 하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근데 지금은 그 알코올 섭취를 그만하라는 신호를 고작 시원하고 청량한 탄산이 가득하고, 바삭바삭한 치킨이랑도 잘 어울리고, 내가 사랑하는 모둠회에도 찰떡궁합인 생맥주를 한잔 마셨다고 느낀다. 억울함 그 자체다. 게다가 더 말도 안 되는 건 생맥주 한잔 마시면 다음 잔은 별로 안 마시고 싶다. 내 10년 간 제일 취해있던 행복을 잃었다. 술이 안 마시고 싶은 나, 너무 낯설다. 마셔도 그전처럼 더 마시고 싶지도 않고, 재밌지도 않다. 콘서타가 약값을 제대로 한다. 일주일에 한 번 가는 병원에서 매번 1만 원은 넘게 비용을 치르는데, 한 달이면 6만 원이 넘는다. 6만 원이면 요즘은 합정, 망원, 성수 이런 동네에서 친구들과 하루 술 값으로도 모자라다. 아주 가성비가 좋은 인간이 되어버렸다. 좋아해야 하는 것일까? 그래도 행복했는데, 이제 그 행복은 가끔 맥주 한잔이면 충분해졌다.


이번주부터 만남이 시작된다. 첫 잔을 기울이기 전에 나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곤란하다. 내가 약 먹느라 술을 못 마신다고 하면, 내 사랑하는 동기들은 몇 년 전만 해도 술을 마셔야 감기가 낫는다고, 고춧가루를 가져오라고 했겠지. 요즘은 좀 시대가 달라져서 그런 말은 안 하지만, 왜 안 마시냐고 할 것이다.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볼 것이다. 그럼 난 아프진 않은데, 먹는 약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의문스러움을 남긴 채 술자리가 진행되겠지. 이 의문스러움을 서운해하는 친구도 있을 것이고, 내가 선을 긋는다고 생각하겠지. 사실 이제 나이가 먹어가면서, 아픈 게 대수도 아닌데 왜 숨기냐고도 생각할지도 모른다. 같은 모임이지만 적당히 친한 친구는 그냥 궁금해하다가 말겠지.


물론 말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난 내 ADHD가 너무 신기하고, 새로운 나로 태어난 게 오히려 기쁘기도 하다. 내가 갖고 있던 단점들이 고쳐지기도 했고, 내가 의심했던 장점들도 명확해진 계기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설명하기가 귀찮다. ADHD 아직 인식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다. 어렸을 때 조금만 집중 못하면, ADHD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니까. 사실 정말 친한 친구에게 말했는데, 내가 ADHD일리가 없다는 둥, 왜 네가 ADHD냐는 둥 설명해야 했다. 나도 잘 이해하지 못한 의학적 지식을 활용해서 설명하는데, 그게 전달이 잘 되지도 않는다. 게다가 단숨에 설명할 수도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ADHD의 편견, 조용한 ADHD의 문제, 몇 년 되지 않은 성인 ADHD 보험 적용 문제 등.. 정말 귀찮다. 그리고 누군가는 잘못 이해할게 뻔하다. 그리고 말이 도는 것도 너무 싫다.  ADHD는 정신의학과에서 진료받는 증상이다 보니, 편견 덩어리들에게는 문제의 빌미를 주고 싶지가 않다. 그리고 친하지만 이런 속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는 이에게는 그냥 그러려니 두고 싶다. 사실 다들 이제 남한테 관심 없을 수도 있지만 우리의 음주의 역사가 있는데 어떻게 넘어가. 그냥 술 끊었다고 해..? 아 귀찮아. 나 정신과 다니는 30대 미혼 백수 여성인데.. 어쩔래!!!


빨리 슈퍼 닥터맨들이랑 방송국 놈들이 사회 인식을 바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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