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는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분이다. 아버지 병간호를 하는 동안 아버지는 때때로 아버지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셨다. 경상북도 금릉군 봉산면 상금리 골짜기 초가집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는 가난한 집의 아들이었다. 그 당시 아버지는 차비가 없어 기차에 매달려 서울에 상경하셨다고 한다. 근면하셨던 아버지는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셔서 젊은 나이에 자수성가하신 분이다.
서울에 올라와 당시 동국대 학장님의 집에서 머슴살이와 과외공부일을 동시에 하면서 후에 양자로 들어가셨고, 고등교육을 마치고는 동국대 화학과를 나와 일본 섬유 관련 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셨다. 옷에 물감을 들이는 염료기술자셨는데 일본에서 배운 기술로 한국에서 사업을 차려 국내 최초로 염료기술을 들여오셨다. 집안 뒤뜰에서 물감을 만들어 팔아 사업을 번창시키셨고, 염료에서 군수품사업까지 사업을 확장해 가셨다. 19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 정권 당시 천만 불 수출 대통령상을 수여받기도 할 정도로 사업은 번창했다. 당시 한국 수출 1위였던 현대조선은 2억 불 수출 탑을 받았다.
아프리카와 중동 전쟁 당시 군복 수출 천만 불 수주는 한국경제에 큰 이슈로 납기를 맞추기 위해 한국정부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기도 했다. 당시 이와 관련된 공장들을 모두 아버지 사업에 동참하도록 밀어주었다. 대한항공 정규운행을 중단시키고 납품하는 화물선(Cargo) 운송기로 20여 대를 독점했다고 한다. 당시는 대한항공 화물선(Cargo)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사람만 수송했는데, 아버지가 운영하는 사업체 때문에 화물선이 생겼다는 신문기사도 있다. 이 일화는 당시 한국경제에 큰 이슈였고, 아버지는 신흥 재벌로 진입하고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우리 집은 용산구 효창동에 3천 평짜리 대저택에 테니스장과 골프장연습장이 있었다. 일본 총독이 살던 일본식 집이었는데 자가용이 차고에 3대씩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운전수가 나를 통학시켜 줄 정도였다. 그때 당시 용산구는 지금의 강남구라고 할 수 있는데 용산구에서도 아버지가 세금을 가장 많이 냈다고 한다. 집에서는 세계에서 모인 거래처들과 정치인, 경제인들이 모여 가든파티를 자주 하던 기억이 난다. 호텔에서 뷔페로 연회를 준비하였고 악사들도 있었다. 정말 호화스러운 70년대 파티였다. 집이 예뻐서 가끔 영화 촬영 장소로 빌려 주기도 하였다.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는 그 옛날에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셨는데, 일본어는 물론 영어도 하셨다. 그 때문인지 나를 대원외국어 고등학교에 보내셨다. 당시 대원외고는 설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쟁이 그리 치열하지도 않았고 등록금도 두 배로 비쌌다. 그런데도 외국어를 잘하는 것이 큰 자산이라고 여기신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외국어를 하도록 나에게 기회를 주셨다. 사업상 술자리가 많았지만 아버지는 술을 전혀 못하셨기 때문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술을 배웠고, 술을 못하는 우리 가족들과는 달리 술을 굉장히 좋아하게 되었다.
부유한 생활에도 끝은 있었다. 아버지는 사업을 계속 확장하다가 사기를 당하고 사업에 실패하기도 하셨다. 당시 한국에서 가장 큰 봉제공장을 삼성에게서 인수받아 화학, 군수, 의류 등 다양한 사업을 단기간에 확장했는데 무리하셨던 것이다. 정권 교체 시 영향을 미쳐 불리한 입장이 계속되다가 결국 부도가 나면서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게 되었다. 부유한 어린 시절을 주셨던 아버지는 나에게 가난도 역시 물려주셨다. 게다가 보너스로 빚까지 물려주셨다. 나라에 못 낸 세금 때문에 집안 식구 모두가 후에 출국 정지를 당했고, 집에서 쓰던 물건들은 모두 차압 딱지가 붙어 공매 처분 당했다. 아버지는 화병 탓인지 암에 걸리셨다. 형은 민주화 운동의 주도세력으로 감옥에 있었다. 이민을 가면 풀어 준다고 하여 결국 우리는 이민을 가기로 결정했다.
이민을 갈 곳은 브라질이었다. 외할아버지가 60여 년 전에 이민을 가셔서 외가 식구들이 자리를 잡았기에 브라질로 가기로 한 것이다. 사업 실패로 한국에서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신 아버지는 브라질에 가족들을 데려다 놓고 돌아가셔야 하겠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암을 앓고 계신 아버지는 브라질에 가족들이 온 지 6개월 후에 돌아가셨다.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아버지는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가셨다.
당시 브라질에 가져간 총재산이 100만 원 남짓 했을까? 비행기 표를 살 돈도 없어서 사촌형이 비행기 표를 사주었다. 브라질로 가는 길에 일본을 경유했는데, 아버지는 경유하는 몇 시간 동안 나에게 일본 동경을 구경시켜 주셨다. 아버지는 일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셨다. 비록 돈 한 푼 없는 신세 셨지만, 외국어를 잘하시는 아버지가 멋있어 보였다. 문득 어린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돈을 많이 벌면 좋겠지만 돈은 있다가도 없는 거야. 아버지는 그 많은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하셨을까? 건강을 잃어버리고 가정의 불화도 가져오고 이렇게 브라질까지 도망가게 되는구나. 하지만 아버지가 배우셨던 일어는 여전해. 명예와 부는 빼앗아가도 지식은 아무도 빼앗아 가진 못하는구나. 그래 나는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아야 하겠구나. 사라지지 않는 공부에 투자할 거야. 특히 외국어 공부를 많이 해야지.’
그것은 아버지의 바람이자 나의 희망 리스트가 되었다. 아버지가 나에게 남겨 준 정신적인 유산은 내가 삶의 방향을 정하고,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나한테 부탁하셨다. “내가 죽으면 내 무덤에 대학 졸업장을 가져다 주렴.”
나는 박사 졸업장을 가져다 드리면서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사업 실패는 우리 가족들에게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다. 아버지가 실패하지 않으셨다면 새로운 삶에 도전하고 자유를 누리는 맛을 몰랐을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의 재산이나 관리하며 안일한 생각에 빠진 게으름뱅이 재벌 2세가 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