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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ustavo kim 김성한 Oct 27. 2024

만두 팔이 소년이 되다

나는 가리는 음식이 거의 없다. 하지만 만두는 예외적으로 좀처럼 먹지 않는다. 여기에는 눈물겨운 이유가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 가족은 어머니, 형과 누나와 내가 남았다. 누나는 한국에 돌아가서 결혼하여 살았기 때문에 브라질에는 어머니, 형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식구가 생활하였다. 처음에는 포르투갈어도 못하고 경험도 없고 가진 것이 없어 먹고살기가 쉽지 않았다. 형은 막내 삼촌 밑에서 월급쟁이 생활을 했다. 


한국에서 가져간 돈이 없었기에 남대문시장 한복판 같은 시장에 외갓집 식구들이 집을 얻어 주고 가구 등 기본적인 것을 사 주어서 당장 큰 문제는 없었지만 앞으로 먹고 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어머니는 이북에서 내려오셨기에 만두와 빈대떡을 잘 만드셨다. 김치도 하고 식혜도 만드셔서 교회 사람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팔았다. 근처에 있는 작은 한국 식품점에 납품하기도 하셨다. 어머니가 만드신 음식들을 나는 아이스박스에 메고 배달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항상 만두 만드는 분위기였고, 만두 냄새가 났다. 당시 나의 친한 친구였던 알렉산드리 친퀘(Alexandre, 현재 브라질 여행가이드)를 만나 그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우리 집은 브라질의 중 상류층이었는데, 구스타보(나의 브라질 이름)는 참 가난한 집 아이였다. 오래된 집에 들어섰을 때 식구들이 돈을 모아서 사주었다는 헌 냉장고에 마룻바닥은 흠이 나서 움푹 파인 곳도 있었다. 작은 투 룸에 많은 가족들이 함께 살았다. 내가 방문했을 때 친구 어머니는 만두를 만들고 있었고 나에게 만두와 빈대떡을 먹으라고 잔뜩 주어서 집에도 가져갔다. 친구들끼리 회식하러 나갈 때에는 구스타보가 돈이 없는 걸 알기에 우리가 대신 내주기도 했다. 한 번은 친구들끼리 모여서 근처 이과수 폭포로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그곳은 면세점(Duty Free) 존이라 우리들은 기념품과 전자제품을 사 왔는데, 구스타보는 아르헨티나산 마늘 박스를 샀다. 구스타보 집은 만두를 만들기에 어머니기 마늘을 사 오라고 한 것 같다. 우리는 그 친구가 너무 불쌍한 생각이 들어 끙끙거리며 마늘을 들고 오는 것을 도와주었다. 구스타보의 어린 시절은 참 가난했다.” 


    하루는 같은 교회에 다니는 태정이라는 친구가 집에 놀러 온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나와는 달리 그 친구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크고 좋은 집에 살며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바이올린과 피아노 연주도 잘해서 참 부러웠다. 그럼에도 겸손하고 바른말을 잘해 나에게 항상 참 좋은 교훈을 많이 주었던 것이 기억난다. 이런 그가 우리 집에 놀러 왔던 날, 우리 집 사정을 알고는 나를 도와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가게를 하는 친척집에 만두를 팔아 줄 테니 나 보고 만두를 한가득 싸가지고 나가자는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만두 몇십 봉지를 아이스박스에 넣어 메고 태정이네 친척이 경영하는 봉헤지로(Bom Retiro)라는 곳으로 갔다. 친구를 돕기 위해 만두를 팔러 왔다고 하자 친척들은 기꺼이 만두를 사주었다. 그렇게 만두를 팔고 나니 몇 개가 남았다. 그냥 가지고 돌아갈까 생각도 했지만, 이왕이면 모두 팔고 싶어 무작정 모르는 집에 들어가서 팔아 보기로 했다. 그때 내 나이가 열여덟 살이었다. 친구가 옆에 있어서인지 창피함도 없이 한인들이 경영하는 옷 가게에 만두 박스를 메고 들어갔다. 


무작정 들어갔지만 사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희 어머니가 정성 들여 만든 만두인데 하나 드셔 보시겠어요?” 그들은 한국 남대문시장 같은 시장바닥에서 옹기종기 붙어 조그만 도∙소매업을 하는 상인으로 아주 바쁜 분 들이셨다. 하지만 한인 청년이 가게에 들어와 만두를 사 달라하니까 참 대견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는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학생, 그거 일 불 짜리 만두 팔아서 어떻게 먹고사나? 어머니가 한 음식을 팔러 다니고 참 효자구만” 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 바쁘니까 나가요!” 하고 내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지 관심을 갖기도 했다. 어떤 큰 가게를 경영하시던 한 아주머니는 내가 생활력이 좋고 근면하다고 우스개 소리로 사위 감이 될 생각이 없냐고 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만두소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렇게 만두 팔이 생활은 3년이나 계속되었다. 


새벽에 일어나 운동하고 낮에는 만두를 팔러 돌아다녔다. 그리고 밤에는 공부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야간대학을 다녔다. 낮에 팔다 남은 만두가 있으면 학교에 가져가 주위 친구들에게 팔기도 했다. 도시락을 안 가져온 친구들이나 한국음식이 먹고 싶은 학생들에게 주로 만두를 팔았다. 만두를 사주는 이들은 한국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브라질 사람들도 몇몇 있었다. 수업시간에는 공부하고 쉬는 시간이면 학교 계단에서 만두 행상을 벌이는 나를 몇몇 한국계 학생들은 뒤에서 수근 거리기도 했었다.


“쟤는 한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포르투갈어도 잘 못하면서 만두를 잔뜩 학교에 싸 가지고 와서 쉬는 시간에 팔러 다닌대” 하고 놀리는 이들도 있었고, 측은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런 내가 창피하게 느껴져서 그런지 몰라도 처음에 한국 아이들은 나와 친구가 되기를 꺼렸다. 나도 처음에는 창피했다. 하지만 만두 덕분에 공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나중에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때 당시 같은 학교 학생이었다가 지금 유명한 심장학 의사가 된 Arthur kim 박사의 말이다.  


“그때 당시 우리는 사춘기였는데 구스타보는 생활이 어려워 만두를 학교까지 가져와서 팔면서 창피해하거나 기죽지 않고 밝은 모습을 보고 나는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훌륭한 의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보통 아이들은 부모님이 주는 돈으로 공부하면서도 불평이 많았는데 그는 만두를 팔면서도 자신 만만한 걸 보면서 참 특이한 애라고 생각했다.”  


당시 집안 형편이 좋은 주위친구들은 나를 대단한 용기를 가진 아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먹고살려면 무언가를 했어야 했고 만두를 파는 것이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이었다. 한편으로 나는 나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프라이드도 있었다. 나는 지금 가정을 돕고 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이렇게 만두가방을 메고 돌아다니지만 내가 이 일을 평생 하지도 않을 것이고,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도 가지고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이 있었다.


그 일은 소심했던 내 성격을 바꾸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소극적이고 담대하지 못한 면이 많았는데 만두를 팔면서 창피한 것도 사라지고 사교성도 생기고 모든 일에 자신감이 생겼다. 모르는 사람에게 접근하는 것은 누구 한 테나 어려운 일이다. ‘비록 나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만두 박스를 메고 다녔지만, 나 스스로 성격 개조를 위해 하는 일이다’라고 생각하며 모든 일을 즐겁게 해 나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른 나라에 가서 어떻게 3년이나 아이스박스를 메고 다녔는지 모르겠다. 


하루에 50-60 군데를 들르는 일은 퍽 고된 일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힘든 것은 음식과 관련된 문제였다. 하루는 만두를 사주시던 가게의 아저씨가 나를 보더니 인상을 찌푸리면서 나에게 산 만두를 먹고 식구들이 배탈이 났다고 화를 내셨다. 나는 내가 파는 만두는 어머니가 만드신 만두이고, 만들자마자 들고 나 오는 것이라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 아저씨가 보는 앞에서 직접 만두를 먹었지만, 아저씨는 나를 원망하셨다. 


그 가게를 나온 나는 너무 힘이 빠져 그날은 더 이상 만두를 팔러 다닐 수가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만든 음식을 먹고 아팠다는 말을 용납할 수 없었고, 길모퉁이에 앉아 남은 만두를 죄다 먹어 버렸다. 그렇게 만두를 먹으면서 나는 평생 만두 파는 소년으로 만 있지는 않고, 열심히 공부해 언젠가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때는 그 시장바닥이 나의 삶의 터전이었고, 그 시장바닥을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 보이진 않았다. 너무 힘든 인생이었다. 하지만 어머니표 만두가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현재 미국에서 의류 제조업에 종사하는 알렉스(Alex)라는 친구는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가게에 앉아서 들어오는 손님에게 무언가를 파는 것과 생전 처음 보는 가게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만두를 파는 것은 굉장한 차이가 있다. 구스타보의 용기와 대담성은 그 당시 우리 주위의 친구들에게 대단한 충격이자 새로운 경험이었다. 내 성격으로는 굶어 죽으면 죽었지 구스타보처럼 만두 통을 들고 가게 아주머니에게 만두를 사 달라고 하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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