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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ustavo kim 김성한 Oct 27. 2024

스물두 살의 잡상인

 3년 간 같은 곳을 방문하며 만두를 파니 주변 상인들 과도 신용과 친분이 쌓이게 되었다. 바이아(Bahia)라고 하는 브라질 동북쪽 지역에 사는 친구 빨 야수(Palhaso)가 옷 가게가 있는데, 방학을 이용하여 친구 가게도 도와줄 겸 방문 계획이 있다고 했더니 한 옷 가게 사장님이 이렇게 말했다. “학생, 우리 공장에 오랫동안 묵은 재고가 많이 있으니 가지고 갈 수 있는 만큼 가지고 가서 한번 팔아 보게나. 여비에 보탬이 될 거야”라고 제안한 일이 있었다. 


그 많은 옷을 살 만큼 돈이 없다고 망설 이자 주인아주머니는 만두를 팔러 3년 동안 자신의 가게를 찾은 나의 성실함을 믿는다며 선금 없이 나에게 물건을 선뜻 건네주셨다. 남의 물건을 무조건 가지고 간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일단 옷을 받기로 하고 이민 가방에 짐을 싸 버스에 올라탔다. 바이아 주 페이라지 산타나(Feira de Santana)란 도시는 참 먼 시골이었다. 차 타고 24시간 이상을 가야 하는 오지에 한인 소수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가뭄과 더위가 심한 곳, 브라질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곳에서 친구는 소매 가게를 하고 있었다. 


나는 참으로 신기한 브라질 풍경에 감탄했다. 그곳은 해변가인 살바도르(Salvador)에서 10시간이나 떨어진 내륙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참 낙천적이었다. 어디를 가든지 삼바가 있고 노래를 부르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미까레타라는 시정부가 주관하는 파티가 주말마다 열려서 볼 만했다. 큰 트럭 위에 삼바밴드를 만들어 거리를 지나가며 삼바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 동네사람들은 트럭을 따라다니며 춤을 추는 일종의 삼바 나이트클럽이었다. 물론 입장료도 없는 공짜 클럽 이어서 남녀노소 누구나 할 것 없이 즐긴다. 


 봉 제주스 다 라파(Bom Jesus da Lapa)라는 시골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곳에 친구와 내가 도착하자 동네 아이들이 자뽀네스, 수네스(Japonese! Chinese!) 하면서 우리를 따라다녔다. 심지어 우리를 신기한 눈빛으로 보며 손으로 쿡쿡 찔러보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루는 동네 밴드가 공연하는 공연장으로 우리도 구경하러 갔다. 우리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우리를 하나둘씩 쳐다보기 시작하더니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 주위를 둘러쌌다. 심지어 밴드 공연도 잠시 중지되는 분위기였다. TV에서만 봤던 동양인을 처음 봤는데 얼마나 신기했을까!  


가는 곳마다 우리하고 말하고 싶고 친구하고 싶어서 참 잘해 주었다. 처음에는 관심을 많이 받아 좋았지만 나중에는 너무 피곤했다. 하도 우리를 따라다니며 물어보는 이들이 많아 장난기 많은 친구  빨랴 수가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냈다. 아이들이 우리 이름을 물어보아 한국이름을 가르쳐 주면 발음을 잘하지 못해서 브라질식 발음으로 낑(Kim) 했다. 무슨 킹콩이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여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하자 친구가 한참 생각하더니 또 코로코(Tocoroco)라고 우스운 이름을 하나 지어냈다. 그러더니 나에게는 찌끼리 끼(Tiquiriqui)라는 이름을 만들어 주었다. 난생처음 본 두 동양아이들의 장난기 섞인 이름을 순진한 그들은 진짜로 믿어서 우리는 또 코로코와 찌끼리 끼가 되었다. 이렇게 스타가 된 우리는 낮에는 시장바닥에서 일하고 밤에는 스쿠터를 타고 다니며 삼바를 추고 맥주를 마시며 열정적인 날들을 보냈다. 


내가 하는 일은 각 지역 장터에 가져간 옷을 펼쳐 놓고 “싸요 싸요”(barato barato) 소리치며 길바닥에서 옷을 파는 일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어려운 일 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손님을 찾아가 팔기 어려운 음식인 만두를 팔던 나에게 지정된 장소에서 옷을 파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 달 정도 그 일을 했을 때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 생겼다. 그때 나는 친구 빨랴 수의 집에서 한 달 동안 숙식 하면서 내 옷도 팔고 그의 일을 도와주었다. 그 친구의 가게 앞에서 당시 유행이었던 로봇 춤도 추어 가며 호객행위를 하기도 했고, 손님이 빨랴 수 가게의 옷을 사가면 돈을 대신 받아주기도 하였다. 


손님이 매우 많아 무척 바쁜 날이었다. 하루는 내가 친구 옆에서 일을 도와주며 손님이 지불한 돈을 친구에게 건네주곤 했는데, 그가 다짜고짜 “너 아까 한 손님한테 받은 돈 나한테 안 주었잖아”하고 나를 의심했다. 나는 그 친구한테 돈을 건네주기도 하고 빨라수네 가게 매니저에게 전달하기도 했는데, 정말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친구에게 사실대로 얘기했다. “나는 손님에게 돈을 받으면 너에게 항상 전달했어. 난 절대 너의 돈을 훔치지 않았어.” 


하지만 빨랴 수는 날 계속 의심했고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친한 친구인데 이런 배신을 당하다니 참으로 억울하고 원통하였다. 단돈 5천 원짜리 옷 때문에! 나는 다시 한번 결백하다고 간곡히 얘기하고 그 자리에서 엉엉 울면서 다시 내가 사는 상파울루 집으로 돌아왔다. 어린 나는 티셔츠 하나로 도둑 누명을 쓴 것이다. 그것도 가장 믿었던 친구에게서 말이다. 너무 가슴이 아팠고 막막하였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 빨랴 수와 저녁을 같이 먹을 기회가 있었다. 그 돈을 내가 훔친 것이 아니라 빨랴 수와 함께 일하던 브라질 친구가 훔친 것이 드러났다고 했다. 하지만 빨랴 수는 나에게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다. 사과하는 대신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이제까지 태어나서 누구한테 사과해 본 적이 없어. 나는 사과할 줄 몰라.” 

하지만 빨랴 수로부터 한 가지 큰 사실을 배웠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과는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과는 적시에 하면 할수록 겸손해지는 미덕이라고. 나는 그 이후로 내가 조금만 잘못한 것 같으면 사과하는 버릇을 길렀고 용서를 빌었다. 또 한 가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무리 내가 친구 일을 도와준다고 해도 나는 그 친구에게 한 달 동안 먹고 자고 숙식비를 내지 않았고, 친구에 비해 나는 너무 가난했기에 그 친구는 나를 그렇게 생각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다시는 누구한테 신세 지지 않고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되었다. 그 뒤 나는 누구한테 돈을 빌리거나 신세를 지거나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살았다. 어렸을 때부터 삶에 꼭 필요한 교훈을 얻은 것이다. 30년이 지난 후 다시 만난 친구에게 사과를 받았지만 그 당시 나에게 이 사건은 내 인생에서 매우 큰 사건 중 하나였다. 


상파울루에 돌아온 나는 옷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루는 오랫동안 내 만두를 팔아주었던 한 손님이 나에게 건의해 왔다. “학생 나는 여자 허리띠를 제조하는데 내 허리띠를 팔아 보겠니? 파는 만큼의 수수료를 줄게.” 무거운 만두 박스가 아닌 새로운 패션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참으로 신났다. 게다가 판매와 납품을 위해 스쿠터와 차도 빌려주었다. 나는 혁대를 도매 가게에 팔기도 하고,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팔기도 했다. 학교 계단에 여자치마, 혁대 그리고 만두를 차려놓고 파는 내 모습을 또래 한국 아이들이 이상하게 쳐다보기도 했지만, 나는 창피한 줄 몰랐다. 이것은 내가 홀 어머님을 모시며 월세를 내고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직업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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