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두 개짜리 시장 한복판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결혼한 형 식구와 어머니와 내가 살았다. 우리 집 건물주는 남미에서 청바지 생산을 가장 크게 하는 패밀리로 1층에는 청바지매장이 있었는데, 매장 위층에 우리가 살았다. 하루는 어머니가 “네가 언제까지 만두만 팔고 있겠니? 너는 포르투갈어도 잘하니까 건물주한테 청바지를 판매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는 것이 어떠니?”하고 제안하셨다. 마침 이모와 외삼촌들도 청바지 사업을 하고 있어 서로 아는 집이고, 우리가 세 사는 건물이니 어느 정도 신용이 있어 물어보았더니 현찰을 주고 사는 조건으로 세일즈를 해보라고 했다.
내가 하는 일은 수십 장의 청바지 샘플을 가지고 다니면서 현찰을 줄 수 있는 소매나 도매 가계들을 찾아다니면서 파는 것이었다. 브라질은 당시 신용거래를 주로 했기에 현찰 주고 사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3년 동안 만두를 팔면서 익힌 인맥으로 신용이 좀 쌓이자 30일 신용 거래도 해주어 판매가 용이 해졌다. 경제적인 형편이 좀 나아지자 어머니가 날마다 만두를 만드시느라 고생하시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그 일을 그만두시고 내가 파는 청바지의 수금을 하고 돈 계산을 하시도록 했다.
나의 아버지는 사업 수완이 굉장히 좋은 분이셨다. 나는 아버지에게 성실함을 배우기는 했지만, 결코 사업적인 능력을 물려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능력은 대단하셨다. 매장 아주머니들은 한국 사람이었지만, 물건 공급자인 공장들인 브라질인이라 포르투갈어를 능숙하게 해야 했다. 특히 수금을 맞추어 문제없이 진행하는 것과 가끔 네고(nego, negotiation)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업을 도와주실 때의 경험을 살려 이런 일을 진행하셨다. 사업 전략적인 면에서 나는 어머니에게서 참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만두를 판매할 때 옷 판매 하러 다니는 한국 아주머니를 보면 부러웠다. 나는 만두 한 판 팔아 봐야 1-2불 받아 가는데 그들은 수백 불, 수천 불을 수금을 해가는 것 같았다. 나는 아이스박스에 만두 30-40판 넣어가지고 하루 종일 무거운 아이스박스를 들고 다녀야 했는데, 그들은 나를 딱하게 생각했다. 젊은 한국학생이 고생하는 것이 안 쓰러웠나 보다.
하지만 나도 이제 만두 판매에서 청바지 판매원으로 서서히 변신해 가게 되었다. 그들은 주로 한국인 공장에서 만드는 물건을 한국인 도 소매상에 판매하는 일을 주로 했다. 그러나 나는 당시 처음으로 브라질 인들이 제조하는 의류를 브라질인과 한국인들에게 판매하는 일을 했다. 나는 포르투갈어를 할 수 있는 덕분에 현지화된 영업을 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만드신 만두를 혼자 팔아서는 겨우 집세를 내고 야간 학교에 다닐 수 있는 돈을 벌었지만, 의류 판매업을 하고 나서는 형편이 좀 더 나아졌다.
더구나 어머니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수금과 공장 사이의 회계 일을 전적으로 해주셔서 나는 판매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만두를 팔던 소년이 청바지를 들고 와서 팔아달라고 하니까 가게 아주머니들이 딱해서 조금씩 사주셨다. 그런데 점차 대규모 생산과 판매라는 경쟁력을 가지고 있던 우리 제품은 다른 판로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집주인은 욕심 많기로 소문난 스크루지 영감 같은 아랍계 상인이었다. 우리가 수금을 좀 늦게 해 가면 소리소리 지르며 자기 물건을 더 이상 팔지 말라고 호통 쳤다. 그 주인 딴 에는 판매사원인 우리를 길 들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생계가 달려 있는 문제라 다시 가서 계속해서 팔게 해달라고 용서를 빌었다. 주인에게 혼나고 들어오는 날이면 힘이 빠져 어린 사업가인 나는 집에 일찍 들어와 한참 동안 그냥 누워 있곤 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오늘은 들어가서 좀 쉬어라. 저녁에 학교 가야지” 하고 나를 위로해 주었다. 집주인의 행동은 우리에게 위협임이 틀림없었다. 주인이 만들어낸 청바지는 우리의 끼니를 해결에 주고, 내 학비를 낼 유일한 근원이기에 집주인이 물건을 못 팔게 한다면 우리는 다시 만두를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위협을 기회로 만들어 나가게 해 주셨다. 우리가 집주인의 옷을 팔다가 반응이 좋아지자 집주인 형과 사촌이 하는 브랜드도 판매하면서 영역을 넓혀 나갔다.
집주인 친척들은 매우 친절했다. 물건은 잘 팔렸다. 마침내 집주인 친척이 아는 젊은 브라질 부부가 하는 호질레니(Rosilene)라고 하는 브랜드를 판매하게 되었는데 반응이 더 좋았다. 어머니와 함께하는 청바지 판매는 어느덧 자리를 잡았다. 수수료도 더 높고 수익도 괜찮았다. 납품은 형이 일하는 회사 차를 빌려서 해야 했기에 어려움 점이 있었지만, 어머니는 만 불짜리 계를 드셔서(천만 원 상당), 그 돈으로 용달차를 구입했다. 당시 6천 불을 주고 산 그 차는 차 중에 가장 싼 재고 모델이었는데, 나는 그 차를 구입하고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만두 판매를 하다가 처음으로 청바지를 주문받아하는 일이 얼마나 신나 던 지 그 무거운 청바지를 백 장씩 손수레에 실어 수백 미터 떨어진 가게에 납품하던 생각이 난다. 어머니 고생도 덜어 드리고 3년 만에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어서 참 기뻤다. 스무 살 초반에 내가 번 돈으로 차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집세도 내고, 어머니 용돈도 드리고, 학비도 내고 기분이 좋았다. 당시 나는 신앙은 없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자유도 생기고 생활력을 일찌감치 갖도록 만드신 그 누군가 나를 돕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