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은 흔적과 잔상을 남긴다.
‘지금 이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일 것 같아’
그와 이별하던 순간,
차 안에서 흘러나오던 노래 가사다.
서로의 침묵 속에 우리를 대변하는 가사에 감정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연애의 추억만큼이나 선명하게 기억되는 이별의 순간이다.
이별 당시에 썼던 글들을 보니 끓는 감정이 넘치다 못해 눈물로 지세운 밤이 한 세월이다.
둘의 세계에서 홀로 남겨진 나는 그때의 나를, 그 사람을 복습한다.
그의 마지막 말들은 오롯이 내게 남아 한동안 나를 괴롭게 했다.
그를 붙잡는 나의 모든 말과 행동에
시간을 가지라는 그의 단호함이 나는 무서웠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거라는 그 의미 앞에
당장이라도 그의 마음을 돌려야 하는 내 조급함이 시간을 앞선다.
하지만 그는 이미 떠났다.
그가 이별을 결심하기까지의 시간과 마음에 나는 왜 안일했을까 돌아보지만
'그 때 알았더라면' 이라는 말은 틀렸다.
그 때의 내 최선이자 한계였고, 그 때는 알 수 없었을 마음과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이별 후의 나를 살피고, 위로하며, 그렇게 나아가는 것만이 현재 나에게 주어진 몫이었다.
꿈과 이별했을 때는
이렇게 무너지는 나를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어
상실감과 하루빨리 나아져야 한다는 강박에 스스로를 몰아세우며 내가 아닌 채로 시간을 버텼다. 당장 뭐라도 하지 않는 나와 싸우며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타당한 이유들이 보이지 않으면 괜찮다는 위로에도 괜찮아지려 하지 않았다. 아픔을 꽉 쥔 채 놓아주지 않는 건 나였다.
반대로 그와의 이별은 나를 깊게 각성시켰다.
이별을 말하는 그를 통해 나는 비로소 나를 보았다. 한 줌의 여유도 사랑도 없이 텅 빈, 어둠 그 자체였던 나는 내 앞에 놓여진 우울에 가장 먼저 사랑을 희생시켰다. 나의 할 일이, 슬픔이 우선이 되어 살피지 않았던 상대의 시간과 상처에 외로웠을 그의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났다. 그제서야 나는 큰 것을 희생해 작은 것을 얻으려 했음을 깨달았다. 후회였다.
후회가 가장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현실의 작은 것들에 지지 않고, 현재의 마음을 아끼지 않으며, 아무 이유도 찾지 말고 스스로를 사랑하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한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내 소식을 알리지 않았던 나는 진심을 다해 내 안위를 전했다. 혹여 그들의 반응에 상처받을까 두려웠던 내 우려와 달리 그들의 따뜻함에 내 얼어 있던 마음들은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마음이 자꾸 뒤를 본다. 마음이 울면서 뒤로 가고 싶다고 아우성이다.
기침 한번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울컥함을, 이별 노래 한 소절에 짙은 감정의 동요를 느낀다.
이별 노래의 음이 아닌 가사가 들려오면 진짜 이별한 거라던 그의 말도 떠올라 꼼짝없이 멈춰있었다.
그와의 이별은 흔적과 잔상을 남겼다.
그 사람이 사준 선물, 함께 찍은 사진, 주고 받았던 편지까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바라만 보았다.
이미 나의 일상에 깊숙이 스며있는 그의 흔적을 정리하려다 보니 어김없이 그 때의 우리를 추억하게 된다. 서로에게 기대 마음껏 사랑하고 미워하는 동안 생에 대한 염세를 잠시나마 떨칠 수 있던 시간이었다. 그 때의 진심들은 그 곳에만 있을 수 있다는 걸 느끼며 우리는 다시 한 번 이별한다.
그리고 그의 잔상은 수시로 나를 찾아왔다.
그와 자주 가던 동네, 함께 가던 맛집, 같이 듣던 노래들을 피하려 노력했지만
그와 함께여서 행복했던 기억을 넘지는 못했다.
불현듯 같은 장면 속 살피지 못했던 그의 표정, 나의 행복을 위해 애썼을 그 만큼 다하지 못했던 내 사랑이 그려진다.
그의 이별은 어떤 모습일까.
게임을 좋아하는 장난스러운 모습 속에서도 낭만을 이야기하던 그다.
로스트 아크 게임에 나오는 '별빛 등대의 섬' 노래를 틀고, 들려주는 프랭크와 에일린의 이야기.
죽은 아내 에일린의 영혼을 찾아 섬을 떠도는 프랭크와 그의 딸 레나는 그녀의 일기에 담긴 힌트들을 쫓아 보지만 어디에도 그녀의 영혼은 없었다. 아내를 떠나보낸 후 자책하며 그녀를 그리워하는 그의 노래에 에일린의 영혼은 빛이 되어 언제나 그와 레나의 곁에 있음을, 그들과 함께한 행복을 노래한다.
남겨진 이들과 먼저 떠난 이의 마음을 이야기하며 사랑과 이별을 말하던 그의 감성이
이별 후 마음 속에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행복했던 추억 속에 그대를 복습하며
깊이 앓기도 하는 것. 앓음답도록, 아름답도록.
이별을 받아들이는 내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