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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Aug 28. 2022

음악시간 나머지 공부

풍금이 있는 교실


음악 시간이 있는 날에는 풍금을 옮겨야 했다.

교실마다 풍금이 있는 게 아니라 학교에 풍금이 한 대밖에 없어서 음악 시간이 있는 날이면 다른 반에서 풍금을 가지고 왔다.

칠판에 선생님이 오선지를 그리고 음표를 달아주셨다. 음계 외우기가 산수보다 어려워서 선생님이 질문할 때마다 식은땀이 흘렀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솔솔바람이 들어오고 양쪽으로 붙들어 맨 커튼도 풍금 소리에 맞춰 하늘거렸다.

나에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솔솔 미 파 솔 라라 솔, 부반장 미희가 두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앞에 나와서 노래를 불렀다. 예뻤다.

미희는 광산 여자애들답지 않게 얼굴에 버짐도 없고 머리에 이도 없었다.

미희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놀림당할까 봐 그러지 못하고 고무줄이나 끊고 치마만 들어 올리고 도망을 쳤다.

음계 모르는 애들은 공부 잘하는 애들과 짝지어서 나머지 공부를 했다. 오늘 내 나머지 공부 선생님은 미희다.

"야! 두 번째 줄에 음표가 있으면 '솔'이야 이 바보야 너 때문에 나도 집에 못 가잖아."

미희가 구박을 했지만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지난번 춘식이 놈한테 산수 배울 땐 치고받고 싸우는 바람에, 엎드려뻗친 상태에서 몽둥이로 엉덩이 다섯 대를 맞았었다.

나머지 공부는 싫지만 미희가 가르쳐준다면 맨날 나머지 공부하고 싶었다.

"너 고향의 봄 풍금 치면서 노래해 주면 안 돼?"

미희가 노래하는 모습을 또 한 번 보고 싶었다.

"지랄하네 공부도 못하는 게. 내가 문제 내서 60점 이상 맞으면 풍금 쳐줄게."

문제를 냈고 미희가 빨간 색연필로 채점을 해서 동그라미 일곱 개를 해줬다. 70점이다.

미희가 풍금 앞에 앉았다.

미희네는 피아노가 있는 부잣집이었다.

아버지가 무령 광업소 부소장이었고, 엄마는 무령 국민학교 육성 회장이었다.

소풍 갈 때면 미희네가 학교 선생님들 도시락도 준비했으며, 어린이날에는 전교생에게 공책 한 권씩 나누어 주기도 했다.

미희 엄마가 학교에 왔다 갈 때면 교장선생님도 나와서 교문 앞까지 배웅을 했다. 그래서인지 미희가 잘못을 해도 선생님은 손바닥 한 대 때리지 않았다. 그만큼 끗발 있는 집이었다.

바람을 잔뜩 먹은 풍금이 음표들을 쏟아냈다.

미희의 양 갈래로 땋은 머리에 오후의 햇살이 4/4박자로 부서지며,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리듬을 타고 무용을 했다.

'나에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풍금소리에 맞춰 노래를 했다. 선생님보다 풍금을 더 잘 쳤다. 나머지 공부하던 모든 아이들이 따라 불렀다.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는'

나뭇잎 배도 같이 불렀다.

미희는 평강공주 같았고 나는 바보 온달이 되고 싶었지만  현실은 음계도 모르는 그냥 바보였다.

"너 내가 가르쳤으니까 선생님이 물어봐서 이거 모르면 죽을 줄 알아."

미희가 책상 가운데 그어놓은 삼팔선을 넘어와서 협박을 했다.

다른 여자애들이 책상 가운데 그어놓은 선으로 지우개 반쪽만 넘어와도 죽일 듯이 싸웠는데, 미희한테는 그러지 못했다.

미희는 얼굴에 버짐도 없고, 머리에 이도 없고

예쁘기 때문이다.

나머지 공부 더 하고 싶었는데 선생님이 오셔서 가라고 했다.

미희가 여자애들만 데리고 텔레비전 본다고 운동장을 팔랑팔랑  뛰어갔다. 우리 반에서 텔레비전 있는 집은 미희네 밖에 없다.

오늘도 나머지 공부한 거 엄마가 알면

'호랭이가 물어갈 놈' 이란 욕을 듣겠지만, 기분은 좋았다. 다음에 나머지 공부할 때도 미희랑 같이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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