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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Nov 08. 2022

열대야

열선으로 만든 그물

옥상은 하루 종일 내리쬐는 햇볕을 받은 열기로 유화물감도 녹아서 수채화 물감이 될 지경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연일 폭염주의보를  발령했고 밤에도 해만 안 보였지 온도는 그대로였다.


옥탑방에서 여름을 견뎌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방바닥도 뜨거워 밖으로 나오면 영혼까지 익어버려서,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처럼 모든 사물이 흐느적거리는 착각에 빠진다는 것을.

옥탑방에서 열대야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열대야에 무방비로 노출되면, 모진 말로 보내야 했던 애인의 이름도, 그 애인이 갖고 있던 앙증맞은 삐삐의 번호도 기억 못 하는 기억상실증에 걸린다는 것을.


화분의 꽃들도 아무리 물을 먹이고, 그늘을 만들어 주어도 성의가 부족했는지, 하나둘 척추를 꺾고

예뻤던 머리를 뜨거운 옥상 바닥에 처박았다.

그나마 꽃 중에서도 유일하게 태양의 먼 친척

해바라기는 힘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그 나름 꽃대궁이 굵어지고 있었다. 기특해서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소피아 로렌이다. 부디 소피아 로렌이 잘 버텨 줬으면 좋겠다.


어쩌다 새벽에 선잠이 들면, 역에서 들리는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라는 안내방송에 잠 깨어

비몽사몽 라면을 끓였다. 아무리 더워도 하루 세 끼는 먹어야 하니  참으로 한심한 만물의 영장이다.


가을이 기다려졌다. 그러나 잔인하게도 가을은 아직 먼 곳에 있었으므로, 가을이 올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다행히 소나기라도 올 때면 메리야스도 벗고, 팬티만 입은 채 온몸으로 비를 맞았다.

소피아 로렌, 맨드라미, 채송화도. 다 같이 입을 벌리고 비를 맞았다.

젠장 옥탑방으로 이사 오는 게 아니었는데

복덕방 영감의 감언이설에 완전히 속았다.

복덕방 영감의 그 보증금에 이만한 방 없다는 논리적인 꼬드김에 완전히 속고 말았다.


그해 여름 옥상 바닥에 계란을 깨 놓으면 실지로 계란 프라이가 된다는 것을 알았고, 오존층이 파괴되면 옥탑방에 사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통구이가 될 수 있다는 개 같은 현실도 알게 됐으며, 스케치 한 장도 못한 채, 에어컨 있는 은행으로 뛰어들어가 청원경찰의 눈치를 보며 땀을 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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