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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Nov 09. 2022

옥상의 겨울은

여행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화실 문틈에 끼어있는

메모 한 장.

'보고 싶어서 왔어요. 연락 주세요.'

여긴 어떻게 알고 왔을까, 영준이 녀석이 알려준 게 틀림없다.


눈이라도 펑펑 쏟아지면 포근할 텐데 아무리 하늘을 올려다봐도 맑은 하늘, 아직도 옥상에는 눈 부스러기조차 보이지 않고, 해바라기의 빈 대궁만 겨울바람에 흔들리며 휘파람 소리만 내고 있었다.

소피아 로렌, 내년 여름 우리 또 뜨거운 여름을 같이 보낼 수 있을까.

봄이 오면 옥상 화분에 해바라기만 잔뜩 심어야겠다. 소피아 로렌이 외롭지 않게.


바람 부는 밤이면 화실을 나와 어깨를 최대한 접고 외등하나 없는 골목길을 도둑처럼 걸어 다녔다.

쌀집, 연쇄점, 목련 여인숙, 파장을 맞은 역전시장, '월세 있어요' 써 붙인 낡은 대문, 옥탑방 소개해 준 복덕방, 골목길의 낙서, 너무 정겨워서 울컥 눈물이 났다. 황색 신호등이 점멸하는 새벽까지 기침을 하며 쏘다녔다.

그렇게 겨울 골목길에 중독되고 있었다.


옥상의 겨울은 冬安居(동안거)에 들어가는 계절,

화실 문 걸어 잠그고, 주제넘게 그려왔던 그림들 모아서 불쏘시개 삼고, 따뜻한 모닥불 피워서 진달래 피는 봄이 올 때까지만 술이나 마셔야겠다.

행여 그대가 찾아오면 아무도 없는 척 숨죽이고 있다가, 문틈에 메모지 꽂아놓고 돌아서는 그대의 야윈 뒷모습 조금만 훔쳐봐야지.

그러다 서러워 울고 싶어지면 바람 부는 골목길을 도둑처럼 걸어 다니면 될 일이다.

오늘도 성애 낀 유리창에 써보는 면목없는 고백.

가슴 시린 세 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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