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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Apr 05. 2023

디스코텍 영 파워

약속 없는 토요일

                                 

봄비 오는 토요일 오후.

해바라기 소피아 로렌도 이 비가 그치면 훌쩍 키가 자라 있겠지. 

빨리 자라서 오월의 햇살 노랗게 부서질 때 면목없는 내 모습 넓은 손바닥으로 가려주시길.


실연당한 찌질이 셋이 화실에서 술을 마셨다.

 중에 복학생 주형이는 이별한 지 한 달 됐다.

무주택에 늙은 노모, 어린 동생 둘, 거기에 복학생 여자 입장에서 볼 때 주형이는 신랑감으론 빵점이었다. 제대할 때까지 기다려준 것만으로도 열녀문 하나는 하사해야 할 정도였다. 주형이도 어느 정도 이해는 했지만 도둑처럼 도망간 사랑 추스를 시간은 필요해 보였다.

요즘도 애인과 자주 갔던 공원 벤치에 앉아, 소주 한 병은 마시고 들어가야 잠을 잔다고 했다.

갑자기 주형이가 울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술 처먹고 할 수 있는 진상 짓은 다하고 있었다. 술 취해서 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노래 부르고, 헤어진 여자에게 전화하고.

"야! 궁상떨지 말고 오랜만에 나이트나 가자."

주형이를 달래서 밖으로 나왔다.



디스코텍 영 파워


영 파워는 써니텐 한 병 마시고 새벽까지 놀 수도 있고 본 맥주값이 시내에서 제일 저렴했다. 

여자들이 많이 오는 으로 소문이 나있던 터라 토요일은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사이키 조명이 번개처럼 번쩍거렸고, 미러볼 밑에는 발정기의 개구리들처럼 청춘들이 뒤엉켜 폴짝거렸다. 춤이랄 것도 없었다. 아무리 잘 춘다 해도 옆 사람과 부딪쳐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냥 머리, 어깨, 무릎, 발 대충 움직이면 잘 추는 것처럼 보였다.


모두가 기다렸던 블루스 타임.

Gary  Moore-Still Got The Blues 신들린 기타 연주와 봄비에 어울리는 보이스가 스테이지 바닥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정중하게 한곡 추실까요? 이런 오글거리는 제비족 멘트도 필요 없었다. 디스코 타임이 끝날 때 눈여겨봐 둔 여자를 붙들고 놔주지 않으면

못 이기는 척 손을 잡아주었다. 간혹 앙칼지게 신경질 내며 벌레 보듯 하는 여자도 있었지만 극히 일부였다. 다행히 우리들은 각자 파트너 한 명씩 끌어안고 어색한 블루스를 었다. 

"몇 명이 왔어요?"

여자의 귀에 대고 크게 말을 했다. 살짝 손에 힘을 주어 앞으로 끌어당겼다. 머릿결에서 향긋한 살구 향 샴푸 냄새가 폐 속으로 들어왔다.

여자 명과 합석을 하고 관심도 없는 호구조사를 했다. 지난번엔 죽돌이처럼 영업 끝날 때까지 딕패밀리의 '또 만나요' 들으며 아쉽게 나왔는데 오늘은 성공이다. 고맙게도 시원한 생맥주까지 사달라고 먼저 말을 해주니 황송할 일이다.



호프집 카사블랑카


여자들은 전자회사 기숙사에 있는데 토요일은 외박이 된다고 했다. 계획대로 분위기가 빨갛게 익을 무렵 남자 하나가 다가왔다. 통 넓은 흰 바지는 배꼽 위로 치켜 입었고,  구두는 비를 맞았는지 흙탕물이 튀어있었다.

직감으로 양아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이는 우리보다 두세 살 위로 보였다.

"야! 너네 여기서 뭐 하냐?"

제일 예쁜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어, 오빠 우리 영 파워 갔다가 맥주 마시러 왔어."

여자가 당황했다.

"근데 이 새끼들은 뭐냐?

양아치가 대차게 물어봤다.

"뭐 이 새끼? 이 새끼가 초면에 말  하네."

주형이가 발끈했다.

"어쭈 여자 앞이라고 이것들이 객기 부리네. 얘는 내 애인이다. 세 놈 다 따라 나와."

여자가 말렸지만 양아치는 막무가내였다.

밖으로 나오자 비는 더 세차게 내렸고, 건너편에 건장한 체격의 양아치 다섯 명이 담배를 피우며 친절하게 손짓을 했다. 어느 후진 옷가게에서 단체로 바지를 샀는지 하나같이 통 넓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양아치 유니폼인가?

쓰벌 ㅈ됐다. 도망을 갈까, 무릎 꿇고 사과를 할까 싸울까 결정을 해야 했다. 역시나 실연당한 주형이가 말릴 틈도 없이 적진으로 돌진했다.

                      

                      

                      

                      

                      

태어나서 비 오는 날 렇게 많이 맞아본 적이 없다. 한 대 때리고 세대씩 맞은 거 같다.

주먹 한방에 별이 떴고, 발길질 번에 은하수가 흘러갔다. 정말 비 오는 날 흠씬 두들겨 맞으면 먼지가 날 수도 있겠다.

생맥줏집에서 신고를 했는지, 여자들이 신고했는지 경찰과 방범대원이 뛰어오고 있었다. 양아치들과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니들 다음에 꼭 보자 그때는 뒈질 줄 알아.' 애틋한 인사를 하고 뿔뿔이 도망을 쳤다.

골목길 불 켜진 가정집 처마 밑에서 서로의 몰골을 살폈다. 다행히 어디 부러지거나 찢어진 데는 없었으나 온몸이 욱신거리고 까진 손등이 쓰렸다.

"어이 실연남! 코피나 닦아 새꺄. 쪽수가 밀리는데 뭐 하러 개기냐, 쪽팔려도 살살 때려주세요 하면 되지. 담배 피워봐, 담배연기 새어 나오면 머리 깨진 거다."

 찌질이 셋이 마주 보며 낄낄거렸다.

"미안하다 나 때문에. 그래도 푸닥거리하고 나니까 시원하다."

주형이가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에 손을 씻으며 슬프게 웃었다.

봄비는 장마처럼 그치지 않았고, 우리는 비루한 청춘들의 성지 목련 여인숙으로 갔다.



련여인숙


봄비 내리는 토요일 오후에는

약속이 있어야 한다

약속 없는 사람들 하나씩 찾아내

의미 없는 약속이라도 하자

못난 놈들 모여

그까짓 사랑 별거 아니다

서로의 등을 두드려 주면서

졸릴 때까지 술을 마시고

아득한 기억이 끊어질 때까지

움푹 팬 아스팔트 웅덩이에

얼굴이나 처박고 있자


사거리 신호등이 황색으로 점멸하는 새벽

나 싫다 가버린 애인하나 생각나고

거기에 비까지 내려준다면

눈물 감추기엔 금상첨화지

사랑도 거세당한  목련 여인숙 205호

늙은 천사의 주름진 손을 잡고

성의 없는 딸기향 입맞춤으로

멍들었던 청춘기억 위로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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