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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Nov 12. 2022

목련 여인숙

가을 새벽 어느 날


오늘 남들도 다하는 이별이란 걸 했다.

이별의 이유는 '그냥'이다.

몇 년 동안의 기억들만 남긴 채 '그냥' 가버렸다.


반은 죽고 반은 살아서, 막차 떠난 전철역 주변을 '그냥'이라는 두 음절만 되뇌며 '그냥'맴돌았다.

새벽까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좀비처럼 휘적거리며 걸어 다녔다.

어렴풋이 '그냥' 가고 싶다던 그녀의 가엾은 마음을 알 것도 같아 씁쓸해진다.


문득 걸음을 멈추면 목련 여인숙.

'잠시만 쉬었다 가실래요?' 유혹을 다.

가난하고 허기진 청춘들에게 목련 여인숙은 유일하게 위로받을 수 있는 성지였다. 365일 꺼지지 않는 장밋빛 간판, 더러는 벌건 대낮에도 손짓을 한다. 말라비틀어진 영혼 하나라도 더 구제하겠다는 여인숙 주인의 속 깊은 배려인가.

빨간 매니큐어의 여주인은 하품을 하며 숙박부를

밀어주었고, 장례식장의 방명록처럼 또박또박

성의 있게 써 주었다.

마치 내가 이곳에 왔던 것을 꼭 기억해 달라는 듯이, 돌돌 말린 수건  한 장과 요구르트 한 개를 손에 들고 205호 방문을 열어 신발을 들여놓았다.


형광등은 양쪽 끝이 꺼멓게 죽어가고

실핏줄이 타들어가는지 지직 소리를 내며 가늘게 떨고 있다.

창문 틈에는 지난여름에 죽어버린 하루살이 사체들이 창문 방충망 사이에 끼어서, 뜨거웠던 여름의 기억까지 바싹 말리고 있다.

장미꽃무늬 벽지엔 온갖 원색적인 낙서들이 나를 향해 욕지거리를 해댄다.

'바보 똥개'

어떤 여자가 써 놓았을 귀여운 낙서가 유독 눈에 거슬려, 바보 똥개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손에 물을 묻혀가며 박박 문질러 버렸다.

옆방에서는 두런두런 얘기를 하더니 여자가 우는지, 온갖 감언이설로 달래는 소리, 끝내는 남자도 같이 울어버린다.

옆방에 있는 그대들은 무슨 연유로  원짜리 끈적거리는 여인숙 이불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울고 있을까.



벽 너머로 보내는 엽서


새벽 2시 같이 깨어있어 슬픈 동지들이여!

이젠 그만 우세요.

그래도 그대들은 어깨를 기대고 울 수 있는 깨끗한 두 마음 있으니 그것으로 위안이나 삼을일.

나는 오늘 혼자가 되어서 혼자 울고 있답니다.

혹시 내 눈물이 모여 5월의 봄비가 된다면 그대들

가꾸는 꽃밭에 소리 없이 내려서, 모든 꽃들을 피워드릴게요. 부디 행복이란 것도 느껴보시길.

from. 바보 똥개


목련 여인숙에는 어떤 이유로 방문을 하든

사연도 묻지 않고 무조건 어깨 토닥여주는 늙은 천사가 상주해 있다.

늙은 천사가 폭신한 날개로 감싸며 위로해 주고 딸기향 나는  입맞춤으로 유혹을 해

바보 똥개같이 눈물이 났다.

'그냥' 눈물이 났다.

그녀와 헤어지고 첫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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