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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Aug 01. 2023

자주색 르망

우울한 드라이브


정말 가을이 온 것일까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가을, 오늘 아침 무서리가 내렸다.

해바라기 소피아 로렌의 넓은 손바닥도 조금씩 수분을 잃어 갈색으로 말라가고 있다.

목을 꺾고 하늘을 보면 구름도 없는 하늘에 잠자리만 맴돌고 있다.

팔을 높이 뻗어 손가락을 세우고 눈을 감는다.

눈치 없는 고추잠자리손가락 끝에 앉아 날개를 숙인다. 손가락을 간지럽히다가 "외로우신가요?

쓸데없는 질문만 하고는 투명한 날개를 떨며 날아가 버렸다.


문득 못 견디게 보고 싶은 얼굴하나, 소나기 오던 여름밤 길가에 주차된 자주색 르망을 보며, 내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여행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던가. 

가엾은 그대 얼마나 멀리 갔기에 기별조차 없는지... 어떻게든 한 번은 만나야 한다.



열등감


르망을 사야겠다.

한 번이라도 멋진 내 모습 뽐내려면 자주색 르망 중고차라도 사야겠다.

만날 때마다 지하상가 구석 할매네 분식집에서 주야장천 천 원짜리 떡라면만 먹어도

"난세상에서 라면이 제일 맛있어."

너그럽게 거짓말을 해주던 그대를 마지막으로 만나야겠다. 비록 중고차를 보고 비웃을지라도 그녀를 태우고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갈 것이다.

떡라면보다 맛있는 함박스테이크를 먹으면서 그녀는 핑크레이디, 나는 진토닉 칵테일을 마셔야겠다. 빨리 찻값을 벌어야 되는데, 마음이 급해졌다.


첫 번째 지하철이 들어오는 새벽까지

그야말로 그림으로 돈 벌 수 있는 짓거리는 다 했지만 턱도 없었다. 그림이 청승맞다는 이유로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

돈 되는 일거리를 찾아야겠다.


낮에는 일층에 세 들어 사는 노가다 형님을 따라다니고 밤에는 갈빗집에서 불판을 닦았다.

지쳐서 새벽에 화실로 돌아올 때면

옥상의 해바라기 소피아 로렌과 맨드라미는 새벽잠에 빠져있었다. 비 내려 노가다 공치는 날엔

청림 화랑 주인 말대로 화사하고 따듯한, 영혼 일 그램도 없는 잘 팔리는 그림을 그렸다.

거리엔 건조한 낙엽이 쌓이고 잔고 만오천 원이었던 내 통장은 기름진 돈이 쌓였다.

가을이 그렇게 가고 있었다.


첫눈이라고 우기기엔 민망한 진눈깨비가  내린다.

옥상 화단의 꽃들이 모두 시들어 버렸다.

나의 해바라기 소피아 로렌도 앙상한 대궁만 남기고 죽어버렸다.

계획대로 겉만 번쩍거리고 속은 썩어 문드러진 르망을 샀다. 자주색이다.



레스토랑 릴케


그녀와 도심에서 한 시간 떨어진 북한강가의 이층 레스토랑에서 최고로 비싼 저녁을 먹었다.

헤어지고 첫 만남 서먹서먹했다.

"너 르망 타고 여행하고 싶대서 차 샀어. 자주색이야."

어색한 분위기에서 농담이랍시고 내가 말한다.

"응! 차 이쁘네."

그녀가 무심히 말하며 어두워진 창밖을 본다.

겨울 강은 달을 띄운 채 을씨년스럽게 흘러간다.

강물에 떠가는 것이 어디 시린 달뿐이랴.

길었던 우리의 시간도, 별만큼이나 많았던 사랑의 고백도 함께 떠내려간다.

반짝 그녀의 눈물이 보인다. 애써 모른척했다.

와이셔츠에 나비넥타이를 한 늙은 웨이터가 눈치를 보다가 커피를 내려놓고 정중히 허리를 숙인다. 과한 친절이 부담스럽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말이 없었다.

아무리 세게 틀어도 따듯하지 않은 히터소리와 라디오 디제이가 들려주는 캐럴 '울면 안 돼'가 어색한 분위기를 더 숨 막히게 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 주길 기대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어떤 말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서로가 알고 있었다.



담쟁이넝쿨 말라비틀어진 파란색 대문 앞.

"잘 살아."

그녀가 울면서 웃으며 하얀 손을 내밀었다.

"너도."

웃으며 내가 말한다.

혼란스럽다.

내가 그녀의 말대로 잘 살아도 되는 것인지.

내가 그녀에게 했던 잘 살라는 말은 정말 진심이었는지......

화실로 오는 길, 참았던 설움이 차 안을 가득 메웠다. 큰 도로가에 차를 세우고 담배를 피운다. 담뱃불이 살아있을 때까지만 울었다.


                                나쁜 마음


다음날 야윈 영혼까지 난도질하며 샀던 르망을 반값에 팔았다.
이제 그녀를 만나야 할 명분도, 느닷없이 전화해서 보고 싶다고 말할 뻔뻔함도 끝났다.
무너지는 가슴. 

술잔 없이 소주를 마시고 잠시 흔들리다가
외출을 한다.
겨울. 어디로 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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