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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Feb 18. 2023

첫사랑

마지막 편지



술 대신 락스를 마시면

머릿속 해마가 저장하고 있는 기억의 찌꺼기들을 깨끗이 청소할 수 있을까.

그러면 내 기억이 눈부시게 표백될까.

그러면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할 수 있을까.


단순하게, 지극히 평범하게 하루를 살고 싶었다.

하루라도 그대 생각 없이 평범하게 잠들고 싶었다.

술 먹고, 그림 그리고, 해바라기 쳐다보고 그게 전부인 하루.

술 마시고 블랙아웃이 와도 그대가 했던 마지막 약속은 또렷이 기억난다.

'일 년에 한 번 해바라기 필 때면 꼭 보러 올게요.'

삼류영화 대사같이 어이없는 약속나는 믿었지. 그대가 울면서 말했기 때문에.

해바라기 소피아 로렌이 세 번이나 피고 져도

그대는 엽서 한 장 없었다.


여름엔 열선으로 만든 그물에 갇혀 열대야를 견뎌내야 했고, 겨울엔 뼛속까지 얼어버리는 새벽을 견디며 옥탑 화실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환경 좋은 곳으로 옮기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옥탑방 화실에서 왜 쌩고생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동성 화방 주인의 질책에도, 난 이사 갈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행여 그대가 일 년에 한 번 보러 왔을 때, 나는 없고  소피아 로렌만 있다면 무너지는 그대의 야윈 어깨 상상도 하기 싫었다.

문득 그대가 너무도 야속한 날엔 차라리 지나는 길에 들렀다며 아무렇지 않게

"이젠 기다리지 마."

얄밉게라도 말해줬으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

옥상의 풍경도, 그대가 얼굴만 빼꼼히 내놓고 잤던 국방색 침낭도 그대 떠난 시간에 멈춰 있는데. 


"네가 춘향이냐 그러니까 병신 소릴 듣는 거야 인마 걘 벌써 변사또 팔짱 끼고 광한루에서 양주 마시고 있을 거다. 걘 네 생각 안 해  새꺄, 여자는 얼마든지 소개해줄게 잊어라."

날라리 친구의 말대로 기다리는 것이 미련한 짓일까.


오늘도 멍하니 해바라기만 바라보고 있었다.

소피아 로렌 얼굴의 주근깨도 까맣고 촘촘하게 여물고 잎사귀 끝은 갈색으로 말라간다.

한 달만 있으면 소피아 로렌도 떠날 거 같다.

좁고 녹슨 철계단을 간신이 올라와 우체부가 전해준 그대의 등기우편.


'삼 년이 지났네요.

결혼해서 남편과 일본으로 가요. 

아직도 날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요.

제가 했던 마지막 약속이 마음에 걸려요.

그럴리야 없겠지만 아직도 날 기다린다면

이젠 기다리지 마세요.'


'그대 아직도 날 잊지는 않았군요.

기억하고 있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혹시 그때 제가 했던 말도 기억하시나요.

그대가 돌아와 얼음땡 해줄 때까지 얼음이 되어 기다리겠다는 철없던 말. 그러나 그대

미안하게도 난 오래전에 그대를 잊었습니다.

행복이란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행복하세요.'


쓸데없는 답장을 썼다가 물감으로 확 지워 버렸다.

                

                

                

                

                

이 마지막 인사는 지우지 않았다.

잠자리 높이 날고 눈치 없는 가을볕은 좋은데......


늦었던 나의 첫사랑만 끝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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