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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May 09. 2023

연탄가스 마신날엔

라면을 먹었지



무령 광업소 까만 신작로가 어제 내린 눈으로 하얗게 얼고, 달빛까지 차가운 겨울밤이었다.


엄마와 아버지의 부르는 소리에 잠을 깼다. 잠은 깼지만 정신은 혼미했다. 머리가 두 쪽으로 갈라지는 두통과 울렁거림, 일어나려 애써보지만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봉제 공장 간 큰누나 빼고 다섯 식구가

연탄가스를 마셨다.

해마다 겨울이면 연탄가스로 죽는 사람이 생겼고

집집마다 가정상비약 동치미 국물도 준비해야 했다. 겨울엔 아마도 광산에서 갱이 무너져 죽는 사람보다 연탄가스 마시고 죽는 사람이 더 많았을 것이다.

엄동설한의 새벽,  엄마는 모든 문을 다 열어놓고 피식피식 쓰러지는 자식들에게 동치미 한 사발씩 마시게 했다. 엄마도 어지러워 비틀거리면서도 암사자가 새끼들을 옮기듯 하나씩 열어놓은 문 앞으로 자식들을 옮겼다. 살얼음 낀 동치미 국물에 겨울바람까지 맞으니 몸이 떨리고 추워서 정신을 안 차릴 수가 없었다. 자식새끼 셋의 생사를 확인하고선 엄마는 목놓아 울었다.

시커멓게 그을린 장판을 걷자 아랫목 방바닥이 쩍 갈라져 있었다.

그 틈으로 연탄가스가 새어 들어온 것이다.

오들오들 떠는 삼 남매를 구석으로 몰아 이불을 씌어놓고, 아버지가 금이 간 방바닥을 시멘트로 메꾸었다. 그래도 이 정도로 끝난 게 천운이라며 우는 엄마를 달랬다.

열어놓은 뒷문으로 눈보라가 쳤다.

아침이 올 때까지 그렇게 떨었다.



고마운 연탄가스


정신은 말짱했지만 일부러 비틀거렸다.

학교에 안 갈 핑계가 생긴 것이다. 오늘 숙제를 안 해서 손바닥 맞을 일이 걱정이었는데, 더 아프다고 엄살 부려야겠다.

작은누나가 꾀병이라 말할 때마다

왝왝 헛구역질을 했다. 내가 하는 행동을 동생 미숙이도 똑같이 따라 했다. 내가 비틀거리면 미숙이는 쓰러져 버렸고, 시래깃국에 말아놓은 밥을 깨작거리며 남기면, 미숙이는 아예 숟가락도 들지 않았다. 나보다 한 수 위다. 미숙이도 말짱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미숙이와 나는 공부 빼고는 다 잘했다. 미숙이는 고무줄 왕이었고 나는 딱지 왕이었다.

"선생님께 가서 얘들 연탄가스 마셔서 학교 못 간다고 하거라."

"엄마 얘네 꾀병이야. 나는 괜찮은데."

하여튼 도움이 되지 않는 작은누나다.

반에서 항상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던 작은누나는

학교 안 가면 죽는 줄 알았고, 미숙이와 나는 학교 가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작은 누나의 통지표에는 수가 가장 많았으며 우는 간혹 하나 있을까 말까 했다. 미숙이와 내

통지표에는 누나가 버린 미, 양, 가를 선생님이 주워와 과목마다 꾹꾹 눌러 도장을 찍어 주셨다.

우리가 꼴찌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교무실로 작은누나를 불러 혼을 냈다. 동생들 공부시키라고.

작은누나가 엄마에게 고자질하는 날이면 호랑이가 물어갈 연놈들이라고 싸리 빗자루로 매 타작을 당했다.

작은 누나가 우리를 보며 한심한 듯 눈을 흘기고 학교로 가버렸다. 미숙이와 내가 씩 웃어 주었다.



삼양 라면


아침을 안 먹으니 배가 고팠다.

라면 끓여 달라고 엄마를 조르기 시작했다.

라면과 계란 프라이는 가끔 아버지만 드셨다. 어쩌다 식구들이 라면 먹는 날이면 엄마는 밀가루를 밀어서 칼국수와 라면을 같이 끓였다. 칼국수8 라면2의 비율로 끓였다. 그래도 수프 때문인지 라면 맛이 나긴 났었다.

그만큼 귀한 라면이지만 오늘은 연탄가스 마셔서 죽을뻔했으니, 계속 조르면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숙이도 칭얼대며 조르기 시작했다.

부엌에서 라면 봉지 뜯는 소리가 들렸다. 성공이다. 

아버지만 먹던 노란 계란이 올라간 라면.

입에 침이 고이며 배가 더 고파졌다.

엄마가 들고 들어온 냄비를 보고 미숙이와 나는 벌러덩 자빠져서 울어버렸다.

물을 많이 붓고 라면 하나를 끓인 것이다.

거기에 라면만 건져먹는다고 납작보리가 썩인 밥을 말아왔기 때문에 라면 하나씩 먹을 줄 알았던 우리 꿈은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안 먹는다고 땡깡을 부렸다. 엄마는 어르고 달래다 끝내는 수수 빗자루를 거꾸로 잡고 두들겨 팼다.

"이 육시랄  라면이 얼만데 하나씩 처먹으려고 해. 연탄가스 마신 게 무슨 큰 벼슬이나 한 줄 알아. 니들 죽는 줄 알고 엄마가 얼마나 놀랬는데 이 호랭이가 물어갈 것들.

추워서 밖으로 도망갈 수도 없고 때리는 로 맞다가 이불 뒤집어쓰고 울었다. 미숙이는 잘못했다고 손을 싹싹 비는 바람에 덜 맞았다.

조용했다. 더 이상 엄마의 욕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빼꼼히 뒤집어쓴 이불을 내리자 엄마가 미숙이를 안고 종아리에 안티프라민을 바르고 있었다. 내 종아리는 내가 치덕치덕 발랐다.

엄마가 그만 처바르라고 소리 지를 때까지 발랐다.

"이거 처먹지 말고 있어."

냄비를 윗목으로 밀어놓고 부엌으로 나갔다.

또다시 라면 봉지 뜯는 뽀시락 소리가 들렸다.

대접에 계란이 올라간 라면을 들고 들어왔다. 정신없이 먹었다. 국물 한 방울까지 맛있었다.

라면만 먹을 수 있다면 맨날 두들겨 맞고 싶다.

윗목에선 엄마가, 납작 보리밥 말아놓은 퉁퉁 불은 라면을 먹었다. 엄마의 눈도 새벽에 울어서 퉁퉁하게 부어있었다.


연탄가스는 조금 마시고 라면 많이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랫목에 배를 깔고 큰누나가 소포로 보내온

어깨동무 만화를 읽으며 뒹굴 거렸다. 동생도 뉘어놓으면 눈을 감는 노랑머리 인형과 말을 주고받으며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없었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사택을 지나가는 똥개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조용했고 기분이 이상했다. 혼자서 썰매를 타는데 재미가 하나도 없다.


쉬는 시간인지 멀리 보이는 학교 운동장에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구름 낀 하늘엔 겨울새 한 마리가, 꾹꾹 울며 날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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