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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Jun 13. 2023

범인은 없다

50원은 어디에


누명


"점심시간까지 순자 돈 가져간 친구는 교무실로 가져와. 선생님은 여러분을 믿어요."


선생님이 심각하게 말씀하셨다.

내 짝꿍 순자가 공책과 연필 사려고 책상 서랍에 넣어놨던 오십 원이 없어졌다고 한다.

"너는 교무실로 와서 선생님 심부름 좀 해." 선생님이랑 교무실로 갔다.

"선생님 눈 똑바로 보고 묻는 말에 대답해. 순자 돈 누가 가져갔을까?"

순간 나는 알았다. 순자랑 짝꿍이란 이유로 나를 의심한다는 것을.

너무 억울해서 왕하고 울어버렸다.

나는, 부반장 미희 필통에 청개구리 넣어 놨던 것도 자수해서 손바닥 맞았었고, 삐라도 선생님이 읽으면 간첩이라고 해서 한 줄도 읽지 않는 정직하고 착한 어린이다.

얼마나 크게 울었는지 선생님이 교무실 밖으로 끌고 나왔다.

"이놈이 왜 울어. 네가 안 가져갔으면 그만이지."

더 크게 울었다.

"선생님이 미안하다. 그만 울고 가봐."

교무실 앞 화단에 피어있던 맨드라미 모가지를 확 꺾어버리고 교실로 왔지만, 억울함은 가라앉지 않았다.

"모두 눈 감아. 선생님이 점심시간까지 기다렸는데 아무도 오질 않았어요. 눈 감고 순자  돈 가져간 학생은 조용히 손만 들어."

조용한 교실에 유지매미소리와 멀리 제재소의 기계톱 소리만 가늘게 들렸다. 가끔은 교실로 날아온 풍뎅이가 '붕붕' 날아다니는 소리도 들렸다.

눈을 감고 있으니 더 억울했다.

"모두 눈떠. 선생님은 아주 기뻐요. 지금 손들은 학생은 용기 있고 정직한 어린이야. 쉬는 시간에 돈 가지고 교무실로 와. 순자는 집에 갈 때 돈 가져가거라."

모두가 안도했지만 나는 찝찝했다.

맨 뒷자리에 앉아서 실눈을 뜨고 누가 손드나 보고 있었는데 한 놈도 손을 들지 않았다.

선생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의심받은 게 억울해서 범인을 잡아야 했다.

범인을 잡기 전까지는 선생님이 나를 의심할 거란 생각밖에 없었다.



탐문수사


다음날부터 점방 텔레비전에서 봤던 수사반장처럼 아무도 모르게 수사를 시작했다.

유력한 용의자 영희.

영희는 아버지가 갱이 무너져 죽고, 이듬해 엄마도 젊은 총각과 눈이 맞아서 도망가는 바람에 할머니와 어린 두 동생과 살고 있었다.

육성회비 못 내는 건 당연하고, 미희가 쓰다 버린 몽당연필을 주워 한 학기를 버틸 정도로 가난했다.

순자 돈이 없어진 그날 저녁, 영희 동생 둘이서 자야와 뽀빠이를 먹고 있었다. 영희 동생에게 과자 누가 사줬나 다정하게 물었더니, 언니가 소주병 팔아서 사줬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이다. 영희네는 술 먹는 사람도 없었고 길바닥에서 소주병 하나 줍는 것도 하늘에 별 따기인데, 어디서 많은 소주병을 구했을까. 수사반장 최불암이 고민했던 것처럼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었다.



경고


오늘은 장학사님이 온다고 대청소를 했다. 복도 마룻바닥도 양초로 칠을 하고 걸레로 윤이 날 때까지 박박 문질렀다. 옆에서 영희도 양초 동가리로 초 칠을 하고 있었다.

"영희야! 순자 돈 누가 가져갔는지 난 알아."

영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영희가 양초를 떨어뜨렸다.

"누군데?"

"말 안 할 거야. 또 그러면 선생님께 이를 거야."

"네가 봤어?"

"보진 못했는데 누군지 알아. 또 그러면 정말 이를 거야."

영희가 콧등에 땀을 닦으며 마룻바닥을 빡빡 문지르다가 또 물어봤다.

"누군데?"

"이게 말 안 한다는데 왜 자꾸 물어봐. 우리 엄마가 깍두기 해놨다고 갖다 먹으래. 집에 갈 때 가져가."

엉덩이를 높이 들고 초 칠 한 마룻바닥을 쭉 밀고 도망갔다.

엄마가 영희 불쌍하니까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해서, 한 번도 영희와 싸운 적이 없는데, 저 지지배가 범인이라니.



가정방문


영희가 이틀이나 결석했다.

"너 영희네 집 알지? 학교 끝나고 선생님하고 같이 가보자. 너한테 할 말도 있고."

영희네는 광산 일하는 사람이 없어서 사택에서는 살지 못하고, 학교에서 한 시간이나 떨어진 산 밑에 살고 있었다.

까만 신작로를 선생님이랑 나란히 걸었다.

제무시가 지날 때마다 탄가루가 먹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지난번에 너 의심해서 미안하다. 공부도 안 하고 맨날 싸우고 말썽만 피우니까 의심하지. 돈은 찾았으니까 그나마 다행이구나."

또 거짓말을 한다. 분명 선생님 돈을 순자에게 줬을 것이다.

"누가 범인인지  저는 알아요."

선생님이 당황한다.

"네가 어떻게 알아?"

"그때 눈 안 감고 다 보고 있었는데 손드는 애 없었어요."

" 너 그때 눈 감으라고 했는데 눈을 뜨고 있었단 말이지. 이놈 봐라. 그래 범인이 누군데?"

"비밀이에요."

선생님이 난감한지 한참을 말이 없다.

"음... 누군지 모르겠지만 네 눈으로 본 거 아니면 의심하지 말거라. 너도 의심받으니까 억울했잖아

오늘 선생님이랑 한 얘기는 비밀이다."

선생님이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양철지붕으로 된 영희네 집엔 어린 두 동생이 마루에서 감자를 먹고 있었다.

영희는 할머니와 싸리제  환갑 잔칫집에  허드렛일 하러 갔다고 한다.

선생님과 마루에 나란히 앉아 감자를 먹었다.

언제 쪘는지 감자에서 쉰 냄새가 났다.


무령산 너머로 해가 질 때쯤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할머니와 영희가 싸리문으로 들어섰다.

할머니는 선생님을 보자마자 육성회비 못 내서 송구스럽다고 머리를 조아리며, 보따리를 풀어서 시루떡과 잡채를 내어놓았다.

땡볕에서 잔치 음식 나르던 영희의 얼굴과 양팔은 벌겋게 달아있었고, 고단했는지 하품을 쌕쌕하며 선생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선생님은, 아무리 어려워도 학교는 꼭 보내라는 부탁을 하고 영희네 집을 나왔다.

"어! 깜박했네. 너 이거 영희 갖다주고 오너라."

공책과 연필 한 자루였다.

다시 갔을 때 영희는 동생들을 씻기고 있었다.

연필과 공책을 마루에 놓고 나오려는데 영희가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야! 순자 돈 훔쳐 간 애 누구냐?"

"내가 잘못 알았어. 선생님이 친구들 함부로 의심하면 나쁜 어린이랬어. 근데 나 시루떡 더 먹어도 되냐?"

영희가 시루떡을 뚝 데어주며 방금 떠오른 보름달처럼 환하게 웃었다.

밖에서 기다리던 선생님은 미루나무에 등을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모습이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배우 신성일 같았다.

달빛이 내려앉은 까만 신작로 길에는 반딧불까지 날아다녀서 더욱 밝았다.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새마을 담배만 연달아 피우며 한숨을 쉬었다.

성황당 지날 때는 무서워서 선생님 옆으로 바싹 붙었다. 선생님이 웃으며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반딧불 한 마리가 선생님 머리 위에서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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