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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Apr 11. 2023

미희. 꼴찌의 짝사랑

유년의 꿈



한 달에 한 번 아버지와 절에 가는 날.

탄가루 푸석거리는 까만 신작로를 지나, 무령사 가는 산길로 들어서자 뻐꾸기가 먼저 반겨주었다. 산토끼 가족은 인기척에 놀라 바위틈 속으로 숨어 버린다. 개복숭아 가지엔 먹구렁이 한 마리 칭칭 감겨서 햇볕을 쬐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낙엽송들이  빼곡히 줄 서있는 숲을 지나 무령사에 도착했다.



적막


아버지는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나도 그 옆에 조용히 앉았다. 은은한 향냄새가 마룻바닥에 깔리고 솔솔 부는 바람에 촛불이 하늘거렸다.

목탁소리와  스님의 청아한 독경만이 금빛의 부처님과 독대를 하고 있었다. 가끔 울어대던 뻐꾸기도 숨을 죽였다.

처마 끝에 매달렸던 풍경의 작은 물고기가 땡그랑 소리를 낼 때 사르르 졸음이 왔다.  



행복한 꿈


싸리꽃 사이로 부반장 미희가 팔랑팔랑 뛰어오고 있었다. 미희의 머리 위로 순백의 나비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녔다. 발밑에는 아침에 봤던 산토끼들이 폴짝거리며 미희를 따라다녔다.

미희가 활짝 웃으며 손을 잡았다.

무용할 때 선생님이 손잡으라고 하면 연필을 내밀어서 연필을 잡고 무용을 했었다.

어쩌다 장난을 치면

"난 꼴찌하고 안 놀아."

쌀쌀맞았던 미희가 먼저 손을 잡아준 것이다.

손톱에 때도 없었고 심지어 큰누나의 손처럼 따듯했다.

다래 넝쿨 엮어서 미희와 내가 살 집을 만들었다.

산딸기와 찔레 줄기로 반찬을 만들어 가랑잎으로 만든 밥상에 마주 앉아 맛있는 식사를 했다.

미희를 따라온 산토끼들도 엉겅퀴 잎사귀를 오물오물 씹고 있었다.

꿈속의 소꿉놀이였지만 우리는 신랑 각시였다.

개울가에서 가제의 집게발에 물렸을 때 미희가 '호'하고 입김을 불어 주었다. 입김에서 오 원짜리 가루 주스의 새콤한 과일 향기가 났다. 나뭇잎 배를 만들어 반짝이는 물비늘 위로 띄워 보내며 소원도 빌었다. 눈을 감고 빌었던 소원 미희에겐 말하지 않았다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석가여래가 새겨진 바위 앞에서 미희가

'초록바다'를 불렀다. 이끼 낀 바위틈에서 청개구리도 같이 따라 불렀다.

미희가 내딛는 걸음마다 원추리꽃이 피고

높은 음자리표와 음표들이 나비들과 같이 날았다.

잠자리채를 만들어 도망 다니던 높은 음자리를 잡아 음악 책 속에 넣어주었다. 대장을 찾던 귀여운 음표들도 쪼르륵 따라와서는 오선의 고무줄에 계명대로 앉아, 미희가 불러주길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미희가 손뼉을 치며 재미있어했다.

어린이날보다 생일보다도 백배는 더 좋았다.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항상 반장 놈 하고만 놀던 미희였는데 오늘부터 미희는 내 각시다.

"고무줄 안 끊고, 꼴찌 안 하고, 착하게 살면 너한테 시집갈게."

미희가 내 손을 끌어다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 나비 잡지 마. 난 나비가 제일 좋거든."

대답하려는 순간 강한 바람이 불어와

잡았던 미희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미희가 바람에 날려 싸리꽃 속으로 나비들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나도 따라가려고 발버둥 쳤지만 발이 땅에 붙어 꼼짝하지 못했다. 잠을 깼을 때 배추흰나비 다섯 마리가 법당 안을 날아다녔고, 밖에서는 젊은 스님이 노을을 뒤로한 채 木魚의 뱃속을

두드리고 있었다.



내 각시 미희


무령광업소 부소장 딸. 엄마는 육성회장, 반에서 유일하게 텔레비전이 있는 집. 머리에 이도 없고 학교에서 제일 예쁜 애, 항상 일등만 하는 부반장 미희. 그야말로 끗발 있는 집의 막내딸.


등굣길 맨드라미 피어있는 화단 옆에서 어제 절에서 가져온 약과 하나를 미희에게 건넸다. 갑자기 콧물이 났다. 흐르는 콧물을 빨아먹으며 히죽 수줍게 웃었다.

"이게! 안 먹어 더럽게."

손을 '탁'쳤다. 약과가 땅바닥에 뒹굴었다.

꽃무늬 약과의 꽃잎 두 개가 떨어져 나갔다.

약과가 더러운 건지 콧물 빨아먹은 게 더러운 건지 헷갈려서 한참을 서있었다. 동생이 달라는 것도 안 주고 필통 속에 숨겨 놓았었는데...

여느 때 같았으면 양 갈래로 땋은 머리를 잡아당기고 도망을 갔겠지만 그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인정머리 없는 지지배지만 밉지 않았다.

어제는 꿈에서라도 내 각시였고, 정말 착하게 살면 저 깍쟁이 지지배가 나에게 시집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언제 왔는지 영식이 놈이 약과를 집어서 흙을 털고 있었다. 꼴찌 둘이서 흙 묻은 약과를 맛있게 먹었다. 잠깐이라도 미희의 손이 닿아서 그런지 엄마 몰래 퍼먹었던 설탕보다 더 달콤했다.



착하게 살기


꿈을 꾸고 난 후로 아이들과 땅따먹기 할 때 악착같이 영토를 넓히려 애쓰지 않았고, 내 땅을 먹으러 오는 아이가 있으면 순순히 내어주었다.

여자 짝꿍이 책상 가운데 그어놓은 선을 넘어와도

용서해 주었다. 고무줄도 끊지 않았고, 애들과 싸우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착한 어린이가 돼버렸다.

착하게 살면 미희가 시집온다고 약속했으니까.

간혹 곤충채집하느라 아이들이 잡아놓은 나비를 몰래 날려 보내기까지 했다.

미희는 나비가 제일 좋다고 했으니까.

미희가 제일 싫어하는 꼴찌는, 다행히 영식이가 대신해 주었다. 내가 두 번 꼴찌 하면 영식이가 세 번 꼴찌 하는 식이었다. 5학년 올라가서도 영식이랑 같은 반이었으면 좋겠다.


무서리가 내릴 때까지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제비들은 강남으로 날아가고, 화단의 맨드라미와 해바라기가 시들 때까지 나는 착하게 살았다.

미희는 여전히 나만 보면 꼴찌라고 눈을 흘겼다.

이상했다. 내가 꼴찌 하는 건 기가 막히게 알면서 내가 착하게 변했다는 건 왜 모르는 건지.


미희가 몰라주니까 착하게 살기가 점점 싫어진다. 어차피 모를 거면 예전처럼 편하게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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