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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May 02. 2023

봄감기


새벽에 홀로 잠 깨어 감기몸살을 앓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극한의 고독이 어떤 것인지를.



증상


 39도. 오한에 진땀 기침.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개보다도 못한 것일까. 자괴감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개보다 잘난 것도 없다. 개처럼 기어서 물 마시고 개처럼 하울링도 한다.

석호형이 소주에 청양고춧가루 타서 마시라고 특급 처방을 했다. 젠장 더 심해졌다.

나 싫다 가버린 여자 하나 생각나고, 끝내는 옥상을 올라오는 검은 옷 입은 저승사자까지 보인다.

까만 원피스의 주인집 첫째 딸이 전기세 달라고 다. 정신이 혼미해서 천 원 더 줄 뻔했다.

김 내과의원, 김원장이 폐렴이고 더 늦게 왔으면 죽었을 거라 혀를 차며 말했다.

아뿔싸! 괜히 병원에 와서 죽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폐렴인 줄 알았으면 좀 더 버틸걸.


주사 맞고 약을 먹어서인지 열은 내렸지만 자꾸만 누워있고 싶다.

비몽사몽 이젤 앞에 앉았다.

청림 화랑에서 의뢰받은 가을 정물화를 그려야 한다. 50호 캔버스에 마른 해바라기와 모과를 놓고 뒤에는 구절초 피어있는 화병으로 구도를 잡았다. 간신히 스케치만 해놓고 야전 침대에 자빠져 버렸다. 어차피 살아났으니 뭐라도 먹고 몸을 추슬러야 했다.



역전 해장국집


최루탄 냄새 향기로운 앞에는, 전경들 서너 명이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춘들 잡아놓고 가방을 뒤지고 있었다.

모든 꽃들이 핀다는 봄, 운동권 학생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꽃 한 송이를 세상에 선보이기엔 아직도 엄동설한, 위압과 협박이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었다.

나는 비겁하게도 그들을 외면 한채 내 몸을 살 찌우기 위해서 소피로 끓인 선지 해장국을 먹는다. 언젠가는 내피도 몽땅 빼서 소먹이로 줘야겠다. 내 피를 먹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빚을 갚았으면 좋겠다.

"며칠 사이 얼굴 많이 좋아졌네 화가 선생."

낮술에 취한 식당 주인의 의미 없는 인사

쓰벌, 인사를 해도 얼굴 꼬락서니 좀 보고하지.

이 몰골이 좋아 보이면 그전의 내 모습은 미라였단 말인가.

"소주 한잔해야지 소주는 내가 살게."

식당 사장이 뚱뚱한 마누라 눈치를 보며 반쯤 남은 술병을  들고 왔다.

염병할 해장국에 소주, 눈치 없이 맛있다.

술맛이 나는 걸 보면 살았나 보다.

오월의 오후 네시,

긴 그림자를 끌고 화실 철계단을 올랐다.



갈등


미열은 지속되었지만 정신은  맑아지고 있었다.

팔레트의 굳은 물감을 긁어내고 새 물감을 짰다.

그림 그리는 과정에서 이 시간은 경건하다.

비록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화랑 사장의 입맛에 맞춰 그릴지라도, 물감을 새로 짤 땐 마음이 순백으로 정화되는 기분이다.

사경을 헤매느라 며칠 그림을 못 그렸다.

주문 기한에 맞추려면 오늘은 밤새워 그려야 할 것 같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카시아 향기 맡으면서 그리는 봄밤의 가을 정물화. 니기미 이왕이면 봄을 주제로 한 그림을 주문할 것이지.

하기야 가을이면 어떻고 겨울이면 어떠랴. 어차피 먹이와 바꿀 그림인데.

언제쯤이면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오늘은 빨랫줄에 널어놓은 청바지처럼 무심히 늘어져 쉬고 싶다.

지난 전시회에서 그림 팔리면 여름이 오기 전에 꼭 옥탑 화실에서 도망치려 했는데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옥상의 여름.

모든 사물이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이 된다.

이젤도 녹아서 흘러내리고 술병도 흘러내린다. 

작년에는 해바라기 소피아 로렌도 옥상의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척추를 꺾은 채 죽어 버렸다.
태양이 던져놓은 그물에 갇혀사는 여름이 두렵다.
청림 화랑 사장의 밝은 그림을 그리라는 잔소리.

딜레마다. 태생이 염세적으로 생겨 처먹어서 뭘 그려도 우울한 그림이 되는데 어쩌란 말인지.

속 편하게 친구 따라서 행사장이나 기웃거리며 지나가는 연인들 초상화나 그릴까. 그러면 떨어진 모이라도 쪼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볼 일이다.



화가였던 김민성


오늘은 그림 때려치우고 음식점 하는 김선배가 했던 말이 비수처럼 박힌다.

'미술을 하려면 있는 집에서 태어나던가, 누구의 희생이 필요한데, 나는 마누라의 희생을 보며 그림 그릴 용기가 나지 않아 그만두기로 했다, 내년에는

둘째도 태어나는데 어쩔 수가 없다.'

비장하게 말했지만 그림 안 그리겠단 말은  믿을 수 없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생전에 빛을 본 화가가 몇이나 되겠냐? 다 자기만족이지, 죽으면 그림값 올라간다. 물론 무명 화가는 죽어서도 별 볼일  없지만 말이야. 난 국수집하는 지금이 딱 좋아.'

얼마나 좋을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그림 그릴 때보다는 식솔들 생활하는데 부족함은 없는 듯 보였다. 김 선배의 부탁으로 보관하고 있는 화구들이 먼지에 덮이고, 시간은 쌓여가지만 내가 보관하고 있는 그의  화구들을 버리라는 말은 끝내하지 않았다.

정말 딱 좋은 게 사실일까?


열이 오르니까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아카시아꽃 몇 조각이 창틈에 끼어있다. 한 조각 들어 냄새를 맡아보지만 향기는 전혀 없다. 나무에 매달려 끼리끼리 얽혀있어야 향기가 나나보다.

그날밤 잘 먹고 푹 쉬라는 김원장의 말을 무시한 채

지하철 첫차가 들어올 때까지 밤새워 돈을 그렸다.

또다시 열 39도.
플랫폼에선 낯익은 목소리의 여자가, 안전선 밖으로 물러서라며 건조한 안내 방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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