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 학교에서 학부모를 대상으로 개최한 에니어그램 강의에 참석한 날이다.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라는 부제로 자신의 타고난 유형을 알아보기 위해서 어릴 때 나의 모습을 떠올려보라고 말한다.
“당신은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언제인가요?”
강사의 질문에 재치 있지만 뼈가 있는 답변들이 쏟아져 나온다.
‘결혼식 전날!’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 전!’ ‘고 3 수능시험 보기 전’
심지어 ‘태어나기 전 엄마 뱃속’이라고 누군가 말해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었지만, 나는 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어떤 학부모는 어릴 때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는 가정환경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며 그것이 지금 자녀들을 양육하는 데 자양분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데, 나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어 ‘참 좋겠다.’고 진한 부러움이 섞인 탄식만 뱉어낸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일곱 살 때다. 노란 병아리 같은 원복을 입고 모두 똑같은 가방을 메고 ‘유치원’이라는 곳에 참 다니고 싶었다. 그곳에는 그네와 미끄럼틀, 지구본 모양의 빙글빙글 돌아가는 놀이기구가 구비된 놀이터가 있었다. 매일같이 놀이터에서 놀 수 있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벅차오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녹록지 않은 형편에 밥 굶기지 않고 오 남매를 키워내는 일이 다행이었던 우리 집에서는 2남 3녀 중 누구도 가보지 못한 유치원을 갑자기 넷째가 다닐 수는 없었다. 언니 오빠들은 동생에게만 주는 특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유치원을 갈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부푼 꿈은 외마디 떼 한번 써 보지 못하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래서 매일같이 집 근처 철길 주변을 놀이터 삼아 소꿉놀이를 하러 나갔다. 지천에 널린 삐비를 찾아 껌처럼 질겅질겅 씹어 먹기도 하고 샐비어를 발견하는 날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꽃잎 끝을 입에 물고 쪽쪽 빨아서 천연 꿀로 주린 배를 채운다. 납작한 돌멩이 위에 풀을 짓이기고 맨드라미나 채송화 꽃잎으로 그럴싸한 장식을 해내기도 한다. 크고 작은 돌과 흙을 가지고 밥도 짓고 토끼풀과 꽃을 꺾어다가 반찬을 만들고 하루는 내가 엄마가 되고 다음날은 아빠가 되고 그렇게 놀이하는 데 시간을 때우는 것이 일상이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마다 연필 놀이터, 해적 놀이터, 물 놀이터까지 다양하고 안전한 놀이터가 있어서 언제든지 나가 놀 수 있지만 당시 내가 살던 시골 동네에서는 놀이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적어도 학교나 유치원에 다녀야만 입장할 수 있는 특별한 곳이었기에 유년시절 기억 속의 ‘역’은 내게 유일한 놀이터이자 비밀기지 같은 친근한 장소이다. 그 기억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지금도 남아있는 사진 속에 나는 아빠랑 동생이랑 제법 말끔하게 차려입고 역 앞에 서 있다. 아마도 ‘카메라’라는 값비싼 물건이 우리 집에 처음 입성했을 때 아빠는 역에 대한 기억을 남겨놓으려는 듯 찍어 두셨나 보다.
그 뒤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역’은 내게 더 이상 매일같이 뛰노는 놀이터는 아니었으나 가슴 답답할 때면 여전히 찾게 되는 곳이었다. 강산이 3번이나 바뀌는 세월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던 간이역의 모습에 비해 우리 집의 변화는 지각변동 그 이상이었다. 오 남매가 한창 자라는 사이 아빠는 지역종합병원에 입·퇴원을 반복하며 날로 병세가 쇠약해져 갔고 뒤늦게 췌장암 진단을 받은 뒤엔 이렇다 할 손도 쓰지 못한 채 돌아가시게 되었다. 내 나이 스무 살이었다.
달력에서 빨간 날은 어김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고 억척스럽게 학비와 용돈을 충당해가며 학업을 이어나가고 싶었으나 그조차 이기적이라는 핀잔 한마디에 바로 그만두었다. 그렇게 나는 졸업 전에 취직할 수만 있다면 대한민국 어디라도 가야 했다.
2002년 1월 1일 오후, 난 엄마와 단 둘이 역 앞에 서 있다. 유난히도 눈보라가 세차게 불던 겨울날 제법 뚱뚱한 가방을 3개씩이나 챙겨 양 어깨에 메고 지고 플랫폼에서 아무 말 없이 기차를 기다린다. ‘취집’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취직하기 어려운 시기에 직장이 생겼다는 안도감보다는 엄마와 떨어져 지낼 앞날이 덜컥 겁이 난 나와 엄동설한 한겨울에 어린 딸을 멀리 떠나보내야 하는 엄마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퉁퉁 부어있는 엄마의 젖은 눈을 보는 순간 엄마는 참았던 한 마디를 내뱉으셨다.
“너네 아빠만 살아계셨어도.. 거기까지 안 보내도 됐을 건데.. 미안하다.”
그동안 대회에서 상을 받거나 기를 쓰고 장학금을 받거나 내 딴에는 애써서 집안 청소를 말끔하게 해 놓아도 칭찬이나 포옹 한번 해주신 적 없는 엄마!
어쩐지 내겐 특히 곁을 주지 않았던 엄마!
그런 엄마가 눈물범벅이 된 채 나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자꾸만 미안하다고 하신다. 늘 엄마의 사랑이 고팠던 나는 그간 섭섭했던 마음이 서러움으로 몰려온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기차는 이미 플랫폼에 들어와 있다. 그런데 아무런 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진작부터 “엄마 나 괜찮아.”라고 꾸역꾸역 눌러 말하고 있는데 정작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알이만 나온다. 결국 말 한마디조차 뱉어내지 못한 채 기차에 올라탄 나는 그렇게 기차 안에서 두 시간 동안 꺼이꺼이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타향에서 누울 자리 없는 객지 생활로 20년이라는 시계탑을 쌓으며 ‘결혼’이라는 선택까지 한 나는 마지막 떠나온 눈물의 ‘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지금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한동안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먼저 반응하는 기억 때문에 서랍 속에 감춰둔 사진첩처럼 일부러 꺼내지도 않았는지 모르겠다. 나의 오래된 기억 속 유년시절만큼 자란 두 아이를 데리고 그 역에 간다면 이제는 넉넉해진 마음으로 새로운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 모를 그 간이역, 20년 전 혼자 떠나올 때는 무거운 짐 가방만 곁을 지키고 있었지만, 지금은 든든한 남자가 셋이나 있다.
어느 가을날 무궁화호 완행열차를 타고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 찬 그 역에 내려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여기가 엄마 어릴 적 놀이터이기도 했고, 외할머니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곳이야.”
그 시절로 돌아가 아이들과 사방치기도 하고 비석치기도 하면서 ‘역’에 대한 나의 기억을 언제나 꺼내보고 싶은 흐뭇한 추억으로 아로새기고 싶다.
*본문에서 사용한 ‘삐비’는 삘기의 전라도 지역 명칭이며 ‘비석치기’는 비사치기의 방언이나 당시 사용한 지역 특색을 살리기 위해 그대로 사용함을 알려드립니다. (필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