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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롱 Jun 15. 2022

자기소개_ 프롤로그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시간이란 없다

 "처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절대로 20대나 3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때는 영혼의 허기가 너무 심각했기 때문이다. 항상 사랑에 굶주렸고, 타인의 관심에 일희일비했고, '나는 재능 있는 사람인가'에 대한 물음이 지나쳐 스스로를 학대했다. 돌이켜보니 젊음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좀 더 자신감 있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성격으로 타고났다면 좋았겠지만, 나는 예민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타고났기에 더더욱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할 수 없었다.

 마흔은 내가 처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기 시작한 나이다. 30대까지만 해도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는 강박만 있었지 진심으로 꾸밈없이 나를 보듬지 못했다. 마흔 이후 나는 내 '그림자'를 완전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내게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콤플렉스와 트라우마가 있음을, 하지만 그 그림자조차 나의 어엿한 일부이며 사랑하고 돌봐야 할 나 자신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마흔은  '내 그림자와의 행복한 동거'로 힘차게 시작되었다.


마흔은 멀리서 그저 아련히 반짝이기만 했던 삶의 숨은 가능성들이 이제야 그 빛을 발하는 시기다. 그저 '다음에 돈 생기면 해봐야지' '다음에 여유가 되면 해보리라'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정말 시작할 수 있는 나이다. 더 늦으면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시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도 함께 느껴지는 나이다.


중년은 결코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시간'이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비로소 나 혼자만의 힘으로 결정할 수 있는 시기, 지혜와 용기를 굳이 저 멀리 타인의 참고문헌에서 꺼내오지 않고 나 자신에게서 바로 참고할 수 있는 시기, 그리하여 내 안에 깃든 밝음과 향기만으로도 능히 내 세상을 지탱할 수 있는 뱃심이 두둑해지는 시기, 그것이 바로 찬란한 '마흔'이라는 시간이다.


더 젊어 보이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제 나이의 무게에 걸맞은 지혜와 용기를 지니기 위해 애쓰는 나날들이 내게는 기적 같은 신비와 축복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 정여울의 [마흔에 관하여] 프롤로그 중에서-



 

 1980년대 대한민국의 '국민학교'라는 곳에 입학하면 호구조사라도 하듯이 학기초 질의응답이 제법 여러 날 계속되었던 기억이 난다. 집에 텔레비전이 있는지 냉장고가 있는지부터 주택의 형태가 아파트인지 자가인지, 부모님의 학력과 직업 등등등 지금 생각해보면 지나친 개인정보를 아무런 동의 없이 요구한 처사이지만, 매번 성실하게 적어 제출했었다.

또한 나의 장래희망과 부모님의 장래희망을 구분해서 적어야 하는 일은 늘 고민 같은 숙제라서 하루는 저녁식사 후 아버지께 여쭤보았다. "아빠, 아빠는 내가 커서 뭐가 되면 좋겠어?"

아빠는 오래 생각하지도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초롱이, 공부 열심히 해서 의사 되면 제일 좋지!"

그랬다. 또래 친구들은 하나같이 선생님, 경찰, 간호사, 의사,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적어 냈다.

하지만 다음날 나의 장래희망란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작가'라 쓰고, 미래에 작가가 된 모습을 상상하며 혼자 히죽거렸던 어린 나는 얼마 후 집으로 보낸 생활기록부를 보신 부모님께서 작가 되면 굶어 죽기 딱 좋은 걸 뭐하러 되려고 하냐는 핀잔에 한 마디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 당시에 작가라고 하면 화장기 없는 얼굴에 두꺼운 렌즈의 뿔테 안경을 쓴 모습을 하고 헝클어진 머리를 아무렇게나 한데 묶은 채 목둘레와 소매는 늘어질 대로 늘어진 티셔츠와 무릎이 마중 나온 트레이닝 바지 차림의 모습이 대표적인 이미지처럼 묘사되고, 몇 글자 쓰다가 맘에 들지 않으면 바로 원고지를 구겨버리는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를 떠올리기 쉬웠다. 게다가 늘 돈이 없어서 컵라면과 빵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일반 회사원 친구의 월급날이 되면 천연덕스럽게 빈대 붙어 위장에 기름칠을 하는 모습도 작가의 숙명처럼 받아들여졌기에 부모님의 말도 딱히 반론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보다 글이 편안했던 내겐 그런 구질구질해 보이는 생활상조차 별 거부감이 없었나 보다.


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한다


 여러분은 학창 시절의 꿈을 기억하시나요? 3월에 새 학기가 시작되면 학생들에게 꿈을 물어보곤 했습니다.

대개 "제 꿈은 변호사예요." "CEO예요.""공무원이에요" 하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이건 대부분 직업이잖아요. 대한민국 학생들에게 꿈은 곧 직업이에요. 직업 이름을 대지 않는 학생들의 꿈도 출세, 성공 이런 식입니다. 원하는 직업을 얻거나 성공한다고 해서 삶이 끝나는 것도 아닌데 딱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이러니 정작 꿈을 이뤄도 더 이상 뭘 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 순간 참 많이 흔들려요. 달성해야 할 목표가 사라지니 공허하기도 하고, 내가 원했던 삶이 이런 것이었나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생기는 까닭은 그들의 꿈이 '명사'였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되느냐가 중요했을 뿐,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고민은 없었던 것이죠.


 학생들이 명사의 꿈을 꾸는 것이 결코 그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가 그런 사회예요.

제가 어릴 적에 주위 어른들이 저한테 꿈을 물어보면 저는 없다고 대답했어요. 제 대답을 들은 어른들의 눈빛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걱정하는 눈빛, 실망하는 눈빛이었어요. 어린 나이에도 그 마음을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살아가는 데 직업은 무척 중요합니다. 어떤 직업을 가질지 고민하는 만큼 무엇을 위해서 그 직업을 원하는지도 생각해봐야 해요. 도전도, 용기도 좋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위한 도전이고, 무엇을 위한 용기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 최종 종착지는 동사의 꿈이었으면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삶에서 길을 잃기 십상입니다.

 

 꿈은 더 행복해지기 위해 꾸는 것입니다. 불행하고 싶은 사람은 없잖아요.

저는 사람들이 명사가 아닌 동사의 꿈을 꾸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지요. 그 꿈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하는 자신만의 자리를 발견하길 바랍니다. 그 힘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거든요.                             


                                -최태성의 [역사의 쓸모],  본문 3장 한 번의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중에서-




  

 1997년 12월, IMF를 맞은 대한민국에서는 여성으로서 취업의 길이 조금이라도 더 넓다는 담임선생님의 조언 하나만으로 결국 이공계를 선택하게 된 난 그렇게 '뼛속부터 이과생의 삶'을 이십 년 간 꾸역꾸역 살아내지만, 마흔이 되어서야 그 삶이 가면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어린 시절 그 소녀의 꿈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장래희망: 작가]

과연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어서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슴속에 품은 것인가?

'명사형' 작가가 아닌 '동사형'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무엇을 위해 쓰고 싶은지

이제 나의 꿈을 찾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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