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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롱 Oct 16. 2021

나는 소망한다

후회 없는 오늘

 나는 소망한다.

지금 이 시간 이후에는 미련 없는 선택, 후회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기를..

내 인생의 팔 할은 후회였다.

늘 선택의 고비에서 누구보다 치열한 고민을 하고, 되지도 않는 계산기를 여러 차례 두드려보았으나 '후회'라는 감정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는 나와 마주쳐야 했다.

후. 회.

평소 닥쳐서 일 처리를 하는 편도 아니고, 목표가 생기면 잠을 설칠 정도로 몰입하느라 계획을 세워 준비한 대가라고 하기에는 잔혹하지 않은가!


 2016년 가을,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2박 3일간의 제주 여행을 가기로 한 즈음.

 "시월 여행! 상상만 해도 낭만적이야."

빨강머리 앤이 양손을 모으고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말하듯 내가 딱 그랬다. 여섯 살과 두 돌이 채 안 된 어린아이까지 유아를 동반한 여행의 험난함을 알 리 없는 초보 엄마였기에 더 그랬던 거 같다.

양가 부모님을 모시는 첫 여행이다 보니 완벽하게 계획을 짜야한다는 부담감과 뭔가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릴 때 설렘, 그 경계의 감정을 오가느라 쉽게 잠을 이룰 수 없다. 아들 며느리 덕분에 난생처음 비행기도 타보겠다고 친척과 가까운 지인들에게 굳이 안부 전화를 돌리는 아버님, 며칠 전부터 여행용 가방과 옷가지를 사들이며 평소 보지 못한 웃음기 가득한 어머님 모습을 보면서 이 여행이 길이길이 회자될 효도관광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터라 여행 내내 모든 식단 메뉴와 관광 코스는 예순이 훌쩍 넘은 어르신 위주로만 고민하여 결정하기로 했다.

제주의 이곳저곳을 다니는 내내 만족스러워하시는 표정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뒤에도 자식들 등쌀에 못 이겨 다녀온 여행이라며 흉 인지 자랑 인지 모를 여행 후기를 무한 반복하느라 바쁜 부모님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보다 좋을 순 없다. 여느 때보다 촘촘하게 계획을 짜느라 졸린 눈을 비벼가며 밤늦도록 고민하는 모양이 흡사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고 말리라 비장한 각오에 찬 수험생 같기도 하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예정된 일정에 여행을 갈 수 없게 되었다는 전화를 한다. 이게 무슨 날벼락같은 소린지 잠시 동안 내 주변에는 삐~~! 하는 금속음만 들린 채 온 세상이 일순간 정지된 것처럼 보인다.

남편은 이미 항공사와 숙박업체에 예약을 취소할 경우 우리가 부담해야 할 금액까지 알아본 모양이다. 수수료를 부담하더라도 이번 계획은 취소하고 여행은 다음에 얼마든지 가도 되니까 잘 말씀드리고 미루자 말하지만 귀에 전혀 들리지 않는다. 나이 지긋하신 부모님들에게는 마냥 다음을 기약할 수 없다는 생각과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그렇게 좋아하셨는데 갑자기 취소하기로 했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쓰나미처럼 휘몰아 덮치는 듯하다.

 "제가 모시고 가면 되잖아요."

그냥 해 본 말이었는지 혼잣말이 나도 모르게 크게 튀어나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여행은 반드시 일정대로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도 많이 당황하거나 심각한 상황에서는 남편에게 극존칭과 존댓말을 사용한다.)

그날부터 하얀 종이 위에 제주 지도를 매일같이 그려가며 그날 이동할 장소에 번호를 매기고 몇 가지의 시뮬레이션을 적어나갔다. 평소 입맛이 까다로우신 어르신들이기에 별점 다섯 개의 별을 받아내고야 말리라 목표를 정하고 '먹는 게 남는 거지'라는 원초적인 신념까지 더해져 당시 TV 프로그램 수요 미식회 제주 편을 되감아 보며 기록에 남겼다. 인터넷 검색창에 유명한 여행 블로거의 제주 인생 맛집, 제주 도민만 아는 리얼 맛집까지 실제 후기 내용을 꼼꼼히 읽고 식당 상호와 전화번호, 주소, 주문할 메뉴와 가격, 주차장 유무까지 일목요연하게 표로 정리하기도 했다. 그렇게 더 며칠간 벼락치기 수험생 모드로 변신하여 한 권의 수첩을 모두 채워갈 즈음에 안 보고도 제주의 주요 도시 위치와 관광지를 콕 콕 찍어가며 일필휘지로 지도를 그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양가 어르신 챙기랴 어린아이 챙기랴 혼자서 어떻게 할 거냐고 걱정하던 남편도 나중에는 집념이 대단하다고 혀를 내두르며 박수를 쳐주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태극마크를 단 제주행 비행기는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가을 하늘을 향해 부드럽게 날아오른다.

제주 여행의 시작과 끝은 렌털인 법, 여보란 듯이 최고급 사양의 신형 카니발로 계약을 해두었고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차량을 인도받아 물 흐르듯 계획대로 여행길에 오른, 그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제주 현지 가이드로 빙의되어 2박 3일간의 여행 일정을 간단하게 브리핑하는 것으로 여행의 포문을 여는 게 좋을까? 제주에서의 첫 일정인 사려니 숲길에 대해 어떻게 소개할까? 뭔가 에지 있는 멘트 후보 몇 개가 머릿속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듯하다. 나만 믿고 있다는 듯 기대에 찬 눈빛으로 소리 없는 응원을 보내고 있고, 결승 경기 시작 전 무대에 오른 선수처럼 '그래, 난 해낼 수 있어!'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어느새 제주시 전체가 내려다보인다. 이륙과 착륙, 큰 불편함 없이 매끄럽다. 예정대로 렌털 차량을 인도받기 위해 순조롭게 척척 절차를 마치고 호기롭게 출발하는 데 '덩컹덩컹' 뭔가 자연스럽지 않은 주행에 이상한 느낌과 불길함이 등줄기를 따라 순식간에 온 몸으로 퍼진다. 설마 아니겠지 하는 마음과 달리 렌털회사로 다시 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차량 점검을 다시 한 뒤 차량 재배치 조치가 내리고 새로운 차량으로 인도받기까지 지루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대기실에 계시던 어르신들은 무슨 일이냐는 걱정, 언제쯤 차량을 받는 거냐는 채근으로 몇 번씩 찾아오신다. 아이들도 언제 뛰뛰빵빵 타고 출발하는 거냐고 옷자락을 잡고 매달리기는 마찬가지이다.

거의 한 시간 만에 새로운 차량에 전원 탑승한 뒤 잠시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가이드 본분을 다하기 위해 사려니 숲길에 대해 짧게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사려니 숲길은 신성한 숲이라는 뜻으로 제주의 숨은 비경 31중 하나예요. 유네스코가 지정한 제주 생물권 보전지역이기도 한데요. 오래된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빽빽하게 있어 피톤치드 삼림욕으로 힐링하는 시간이 되시라고 첫 일정으로 정했답니다. 특히 사려니 숲길은 오름이 없는 평탄한 산책로라서 남녀노소 부담 없이 이용하기에 좋다고 합니다."

설명이 끝나고 몇 마디 대화가 오간 뒤에도 한참이나 더 가서 사려니 숲길에 도착했지만, 이미 폐장을 30분 앞둔 시간이었다. 십여 분만의 산책, 동네 한 바퀴 같은 숲길 구경이 제주에서의 첫 일정이 돼버린 것이다.

제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숨은 맛집으로 이 아쉬움을 달래보고자 황급히 식당으로 차를 돌리지만 블로거 후기나 홈페이지 안내와 달리 잇달아 문이 닫힌 식당! 빽빽한 수첩 속에는 플랜 B 식당 목록이 있었음에도 별 소용이 없다. 결국 육지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에게 S.O.S를 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값비싼 메뉴라도 좋으니 숙소 근처에서 먹을 만한 식당으로 수소문해달라고 하고서야 간신히 첫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으나, 가격 대비 찬 구성이 부실하네 맛은 어쩌고 하는 혹평에 시달리느라 정작 내 입안으로 뭐가 들어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제주여행 첫날의 일정, 이때까지만 해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무려 5등급의 초강력 슈퍼 태풍, 제18호 태풍 차바가 우리 여행 일정을 고스란히 따라다니기 위해 바로 옆에 와 있다는 것을!!! 그랬다.

다음 날 일정은 TV를 통해 보면서 한 번쯤 가보고 싶었다는 어르신들의 워너비, 제주 동부로 정했으나 비구름은 정확하게 우리를 따라다녔다. 심지어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결제를 하려는데 태풍의 영향으로 단말기 송수신이 안된다며 결제하느라 애를 먹었다.

계속되는 기상악화로 둘째 날 오후 일정은 취소하고 숙소로 돌아왔으나 제주의 중심, 서귀포시에서 내로라하는 호텔도 차바의 위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멋진 뷰를 감상하기 좋게 마련한 투명한 유리창은 뒷걸음치게 만들 만큼 위험한 흉기가 되어 복도에 쓰러져있고, 곳곳에 깔린 고급진 레드카펫도 성난 비바람이 몰고 온 쓰레기를 뒤집어쓴 흉물의 모습으로 변해 있다.

완벽한 제주 여행이 될 거라는 확신은 과연 집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뉴스를 통해 제주의 태풍 피해 현황을 접한 남편도 부랴부랴 돌아오는 항공 편부터 확인해보았지만, 다음날까지 결항이라는 비보를 전하며 꼭 객실에만 있으라 신신당부를 한다. 난생처음 호텔 객실에 유배된 채 숨죽여 뉴스만 보는데 제주공항의 실시간 상황 중계는 더욱 참혹하기만 하다. 공항에 발이 묶인 많은 관광객들이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먹고 자는 기막힌 모습을 보고 있는 데 당장 다음 날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다. 그런 야속한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비바람은 더욱 세차게 창문을 두드렸고, 보물이라도 되는 양손에 꼭 쥐고 다니던 애먼 수첩만 만지작만지작하고 있다.

 그렇게 끝이 났다. 태풍 차바의 심술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숙박 연장, 항공 예약 대기 후 연락을 기다려야 하는 등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임시항공편 연락을 받아 제주를 탈출하는 심정으로 떠나왔다.

[여행의 반은 날씨]라는 걸 뼈저리게 배울 수 있는 경험이었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여행 계획을 세우는 시간에 왜 단 한 번도 기상 확인은 하지 않았을까 이토록 허당인지 얼마나 자책하며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남편이라는 방파제 없이 온몸으로 맞는 바람이 얼마나 시리고 매서운 지 알게 된 시간이었다.

이미 지난 일을 두고 후회해봤자 스스로 갉아먹는 일이라는 것도 뜨겁게 가슴앓이를 끝낸 뒤에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소망한다.

어제는 잊고 오늘을 살기를..

후회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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