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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롱 Nov 02. 2021

[詩]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나,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살아가리라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나"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 선생의 명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의 초고 발굴. (이 시는 함석헌이 1947년 7월 20일 쓴 것으로 명기)

같은 해 3월 17일 월남 직후 서울에서 집필한 것으로 A4용지 두장에 종서로 쓴 시는 총 8연으로 구성됐는데 필자가 4연과 마지막 연을 삭제한 상태로 남아있다.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는 선생의 평생을 기리기 위해 위의 詩가 새겨진 기념 시비가 세워져 있다(2001. 11.19. 건립).


* 신천 함석헌咸錫憲(1901~1989)은 ‘한국의 간디’ ‘한국의 예수’로 칭송받는 한국 민주주의의 등불이었으며, 평화를 사랑한 아름다운 사상가이자 실천가였다. 그는 90여 년의 긴 일생을 단 한 번도 자신의 양심과 신념을 거스르지 않고 폭압에 굴복하지 않으며 일제와 독재 정권 등 부패하고 불의한 세력들에 맞서 싸웠다. 작고한 지 30여 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위대한 사상가이자 ‘민족의 큰 스승’으로 사람들의 가슴속에 깊이 남아 있는 이유다. 1953년에 출간한 시집‘수평선 너머’에는 ‘그 사람을…’등 112편을 수록하였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노벨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는데 1979년과 1985년 두 차례에 걸쳐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출처] 함석헌 - 오강남



두 해째 큐티를 통해 말씀 나눔을 이어나가던 어느 날 우연히 도입부에 [동서양의 우정론]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우연이다. 도입부는 펼쳐보는 일도 없었고 더구나 형광펜으로 밑줄 그어가며 읽어본 게 올해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중 함석헌 선생님의 시가 가슴팍에 콕 박혀 오래전 그분이 살아온 시간을 거슬러 찾아가는 작업으로 이어졌고 그 후로도 쉽게 정리되지 않는 이 감정의 실타래를 풀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미친다.


1연에서는

구한말 독립운동가. 그 험난한 길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사는 삶에는 정작 내 자식이 커가는 모습을 볼 수 없다. 노쇠한 부모님의 마지막 모습조차 지킬 수 없다. 그들의 사무치는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 전해진다.


2연에서는

다산 정약용의 집안이 천주교 신앙으로 풍비박산이 나고 귀양길에 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한때 문예와 재능으로 사귄 벗, 명분과 절조로 사귄 벗, 도학과 경서로 사귄 벗이 끊이지 않았지만 헌신짝처럼 버림받은 다산의 심정이 녹아있다.


3연에서는

세월호가 가라앉기 시작하는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9분경 전남 진도군 병풍도 앞 인근 해상에서 코 앞에 닥친 죽음의 시간을 직시하지만 단 한 명의 제자라도 살려보겠다고 선체 안으로 기어이 들어가는 선생님, 하나밖에 남지 않은 구명조끼를 제자에게 양보하며 "꼭 살아야 돼." 선생님의 마지막 부탁은 유언이 되고 만다. 지금도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살아줘서 고맙다고..


4연에서는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 친히 십자가의 사형 길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사형 당일 하나같이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배반하고 도망갔던 열 두 제자에게 세상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남긴 크신 뜻이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말씀으로 은혜로 전해진다.


5연에서는

1989년 2월 4일 췌장암으로 작고하신 함석헌 선생님의 유언 한마디를 떠올리게 한다.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에서 친히 그런 사람이 되신 분

'저 하나 있으니'라는 마지막 한 마디와 함께 평온하게 잠드신 분


6연에서는

2021년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

소시민으로 무기력하게 대중에 휩쓸리듯 보내는 시간이 아닌

바른 신념을 지키며 살아내는 하루하루를 감사할 줄 아는 이가 되라고 말씀해주시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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