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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ssy Aug 30. 2023

집에 돌아오니 냉장고가 피를 흘리고 있다

집 문을 여는 순간 기절할 뻔..

줄인다고 줄여도 포기 불가인 열무김치, 고추장, 참기름, 들기름, 인스턴트 냉면, 소포장 스팸 등등 한국에서 사서 모은 혹은 만든 물건들로 빈틈없이 채워진 여러 개의 캐리어를 밀고 끌고 인도네시아에 도착했다.


우리가 머무는 집은 수도 자카르타가 아니라 외곽에 위치해 공항호텔에서 하루 자고 다음날 이른 아침 비행기를 또다시 타야 했다. 세 번의 비행 끝에 드디어 우리 집에 도착했고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현관문 열쇠 구멍에 넣고 돌렸다.


한 달 조금 넘게 걸려 돌아온 집. 드디어 도착했다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문 열다. 한동안 닫힌 공간이어서 그런지 후욱하고 텁텁한 공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그와 동시에 내 눈을 강타한 장면이 있었다. 


하얗게 깔린 타일 바닥 모퉁이 벽 쪽에 나란히 세워진 양문형 일반 냉장고와 김치 냉장고 아래로 흘러있는 정체불명의 빨갛고 누리끼리한 액체들이 그것이다. 흡사 냉장고가 주인을 기다리다 지쳐 피를 흘리고 죽어있는 모습이다.


분명히 떠나기 전에 전기가 얼마나 남아있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건만 전기 충전 기구가 보관된 곳의 문을 열고 계량기의 남은 충전 숫자를 확인 나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각 집마다 전기 쓰는 방식이 조금 다른데 우리 집 전기는 선불 충전식이다) 매일 에어컨을 돌려도 한 달은 충분히 사용가능한 양이었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0>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내가 실수로 전기충전을 하지 않은 것 아닌지 타박을 했다. 덜렁대는 남편과 달리 난 제법 꼼꼼한 편이고 떠나기 전까지 일주일을 매일같이 확인하고 또 했기에 그럴리는 절대 없었다.


일은 벌어졌고 더위부터 해결해야 했기에 휴대폰 앱으로 10만 원 치 충전부터 했다.


무엇보다 냉장고에 있던 식료품이 제일 문제다. 먼저 양문형 냉장고의 냉동실부터 시작다. 안에 있는 식자재들의 상태로 보아 전기가 떨어진 지 2~3일 정도 되었음에 틀림없다. 눈으로 보기에 그렇게 상태가 나쁘진 않았지만 혹시 몰라  고기들은 죄다 버려야 했다.


스테이크용 연어, 삼겹살, 소고기, 닭고기, 생선류, 청국장, 냉동시켜 둔 대파 등등 냉동실에 있던 식재료는 모두 눈물을 머금고 커다란 까만 쓰레기 봉지 안으로 집어넣었다. 남편과 함께 돌아왔기에 망정이지 혼자였더라면 엄두도 나지 않았을 거다.


냉기가 없어진 냉장고 안에 음식들이 녹아가면서 악취가 났기에 부엌 싱크대용 세제를 뿌려가며 비워진 냉장고를 닦고 또 닦아냈다. 속이 쓰렸다. 돈으로 따지면 도대체 얼마인가.. 덕분에(?) 쟁여두기만 한 냉동실 식자재들이 아낌없이 모조리 정리됐다. 허. 탈. 했. 다. 캐리어에 얌전히 앉아있는 몇 푼 아끼겠다고 이고 지고 온 한국 식료품들이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그나마 남편과 함께여서 정신줄은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깨끗하게 버려져 비워진 냉장고에 탈취효과를 위해 원두커피 가루를 사이사이에 넣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어렵게 정리된 냉장고는 한국에서 엄마와 함께 만든 열무김치를 시작으로 고추장, 참기름, 들기름, 인스턴트 냉면 등 캐리어에 담아 온 한국 식자재로 다시 채워졌다. 웃픈 현실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대충 일을 마치고 샤워하러 올라갔다. 근데 뭔가 이상했다. 물살이 너무 약하다 싶더니 더 이상 물이 나오지 않는다. 앞마당의 물탱크를 열어보니 물이 없다. 집의 구조와 생리에 전혀 무관심한 남편이 우리가 먼저 떠나 혼자 지내는 동안 물탱크의 물을 확인하지 않아 텅 빈 것이다. 속 돌아가는 시끄러운 모터소리가 거슬리지도 않았을까..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물을 공급받는 밸브를 열어 다시 물을 채웠지만 채워진 물을 옥상 물탱크로 끌어올려야 하는 모터가 일을 하지 않았다. 만져보니 너무 뜨거웠다. 수리공을 불러 수리를 한고 나서야 이제 조금씩 정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내막은 이랬다. 아이와 내가 먼저 한국으로 떠나고 남편이 혼자 지내는 동안 일층의 커다란 물탱크를 채우지 않아 텅 비어버렸다. 모터는 없는 물을 이층 물탱크로 끌어올리느라 쉼 없이 열일했고 그러면서 한 달 치 전기를 다 써버리고 결국 냉장고 마저 죽여버린 것이다.


한국 가느라 정신없어 물탱크의 물을 제대로 확인 못한 나의 실수가 제일 크긴 하다. 작은 실수로 막대한 정신적 금전적 손실이 발생했다. 전기도 며칠 만에 10만 원 치 써버리고, 냉장고의 수십만 원 치 식자재도 쓰레기로 만들고, 모터도 과열되고(전기가 더 많이 남아 있었더라면 모터가 더 과열돼서 불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이 대목에서 어렵게 감사를 하나 찾았다), 냉장고 두 개를 대청소해야 하는 수고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인도네시아에 8년 넘게 살면서 이런 일은 또 처음이다. 지역마다 물과 전기를 관리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른데 물관리 때문에 연쇄적으로 이런 엄청난 일을 겪게 될 줄이야.. 다음부턴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도록 미리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섬세하게 확인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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