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의 세계를 엿보다
지난 아이 여름방학 때의 일이다.
한국을 가면 해야 할 일 리스트가 엄청 길어서 지인을 만나기는 참 힘들다. 특히 이번처럼 열흘 남짓되는 일정이면 더더욱 그렇다.
아이 랩탑컴퓨터 소리가 좀 이상하다고 한국 가는 길에 삼성서비스에 들리자고 한다.
회사에 몸을 담고 있는 남편은 오가는 날짜부터 포함이라 우리보다 좀 더 일찍 인도네시아로 복귀했다. 사실 남편과 함께 해야만 되는 일정들이 있어서 삼성서비스는 아이와 둘이 가기로 한다.
이제 한국을 일 년에 한두 번 가다 보니 한국의 시스템이 내겐 늘 새롭고 실수할까 조심스럽다.
먼저 삼성서비스 입구에서 안내하는 필요한 서비스에 맞는 번호표를 뽑고 대기 의자에 앉는다.
잠시 후 우리 차례가 되었는지 뿔테 안경을 쓰신 분이 고개를 내밀고 내 이름을 부르며 찾는다. 우리는 혹시라도 그분의 시간을 뺏을까 봐 얼른 대답하고 호다닥 뛰어간다.
랩탑이 부피가 있어서 그런지 서비스하는 장소가 구석진 곳에 있다.
<삼성서비스맨>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나> (딸아이를 쳐다보며) 어서 설명해. 엄만 잘 모르잖아
<딸> (급 공손한 모드로 바뀌며..엄마한테도 좀 그러지..) 아.. 네.. 제 컴퓨터 소리가 오른쪽 왼쪽이 크기가 다른 것 같아요.. 그리고 자판을 쳐보면 한글을 칠 때 간혹 마지막 글자가 더블클릭 돼요..
<삼성서비스맨> 흠.. 한번 열어보죠..
이상한 공기압박하는 도구를 랩탑 바깥 부분에 갖다 대시더니 쏙 빼낸다. 랩탑의 내장이 훤히 다 드러나니 희한하고 신기하다.
<삼성서비스맨> 별 이상은 없어 보이는데요..
<나> 제 귀엔 아무렇지도 않구만 얘는 이상하다고 그러네요.. 애가 좀 소리에 좀 예민해요..
<삼성서비스맨> (갑자기 무슨 생각에 잠긴 듯 잠시 그냥 있는다) 흠.. 소리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리고 그 소리에 돈을 어마어마하게 투자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이건 극비인데.. 저도 삼성직원이 LG 단종 유선이어폰을 쓰고 있어요.. 하하
<나> 네? 삼성직원은 모든 삼성제품에 상당한 할인도 받으실 텐데 왜요?
<삼성서비스맨> 제가 쓰는 유선이어폰은 삼성엔 안 나와요.. 그리고 LG도 단종돼서 더 이상 안 나와요..
<나> 뭐.. 소리가 다 똑같지.. 어떻게 달라요? 차이가 뭔가요?
<삼성서비스맨>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물품보관대에서 까만색 물체를 꺼내신다.)
이게 단종된 20만 원 넘는 LG 이어폰입니다. 한번 껴보세요..
<나> (시키는 대로 귀에 꽂는다)
아.. 이건 뭐지? 귀 안으로 어떤 세상이 펼쳐진다. 소리가 그 음악이 품고 있는 세계로 나를 이끌고 들어간다. 새로운 체험이다. 난 여태 이어폰은 다 일, 이만 원이고 유. 무선 으로만 나뉘는 줄 알았는데 이건 전혀 딴 세상이다..
분명히 귀에 꽂고 있는데 꽂은 느낌은 없고 고막을 두드리지도 않고 심장까지 소리가 품은 세계를 전달해 준다.
그분은 내 표정을 보시며 만족하신 듯 덤덤한 표정으로 하시던 일을 계속 이어 나가신다..
아.. 이래서 가수 이승환이 소리소리 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깟 이어폰이 일, 이만 원이면 됐지라는 흔들린 적 없는 생각이 한 순간에 무너진다.
갑자기 이런 이어폰을 꽂고 자전거 타고 머리카락 날리며 해변을, 알록달록한 잎을 품은 가을 나무숲거리를, 온통 터진 팝콘알들을 안은 벚꽃 나무들 사이를 달리고 싶은 충동이 인다.
<나> 이게 뭐예요.. 고막도 하나 안 울리고 소리가 온몸으로 느껴지는데요? 정말 신기하네요.. 20만 원 넘는 이어폰을 쓰는 사람이 있나 싶었는데 정말 가치가 있네요..
<삼성서비스맨> 그래서 설명 없이 그냥 써보시라고 드린 거예요.. 무슨 설명으로 이걸 정확히 표현해 드릴 수 있겠어요? 하하하
<나> 아.. 정말 그러네요..
<딸> (귀에 꽂으며) 이야.. 진짜 좋은데요?
<삼성서비스맨> 이건 이미 단종된 거고, 공부 열심히 해서 돈 많이 벌어서 더 좋은 거 사서 써.
대학시절 재즈카페, 현장 마당놀이를 통해 소리의 세계에 살짝 들어가 본 적은 있지만 돈도 없고 내겐 그런 여유가 사치였기에 그냥 흘려버린 시간들.. 중년의 내게 이런 소리 세계를 살짝 안내해 주신 삼성서비스맨의 친절이 내내 내 귀를, 내 마음을 울린다.